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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 전 헌법재판관 김종대 편] 이순신 전문가, 공직자의 사표...이것이 그의 나라사랑 법‘이순신 전도사’ 김종대 전 헌법 재판관에게 공직자의 길을 묻다 / 편집국장 차용범
이 글은 인터뷰 시점이 2014년인 까닭에 일부 내용은 현 시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이는 이순신 연구가 김종대(金鍾大, 70, 2019년 기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5번째 이순신 평전(2014년 개정) 제목이다. 한국영화 흥행사상 신기록을 새로 쓴 <명량>(김한민 감독)은 그의 탄탄한 자문에서 출발, 당시 ‘이순신 열풍’을 가열시켰다. “백령도에서 제주도까지, 이순신 정신 알리기에 바쁘다.“ 지난 40여년 ‘이순신 정신’을 공부하고 알리는데 온 힘을 쏟아오며, 최근 부산∙서울에서 ‘이순신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오직 부산∙경남지역에서 법관생활을 해 온 대표적 향판(鄕判)이며, 헌법재판관 퇴임 후도 사회봉사에 올인하고 있는 이 시대 공직자의 사표(師表)다.

이순신 전도사 김종대는 지난 40여 년 ‘이순신 정신’을 공부하고 알리는데 온 힘을 쏟아오며, 오직 부산∙경남지역에서 법관생활을 해 온 대표적 향판(鄕判)이고, 헌법재판관 퇴임 후도 사회봉사에 올인하고 있는 이 시대 공직자의 사표(師表)다(사진: 차용범 제공).

우리 민족 최고의 영웅 이순신은 성공한 공직자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정신적 지도자요 영원한 스승이다. 우리네 인식의 바탕은 넓고 깊다. 광화문 광장의 동상으로부터, 영화∙드라마와 베스트셀러급 대중적 글쓰기 작품까지-. 전문법관 생활을 하며 이순신의 공직자적 리더십을 집중 연구해 온 집념은 어디에서 출발했나? 전문적 인물사가(人物史家)∙작가도 아니면서, 강렬한 문체의 <난중일기>나 수사적 문체의 <칼의 노래>와 다른, 사료해석에 충실한 인물평전을 저작한 저력의 뿌리는 무엇인가? 이순신을 공직자의 지표로 삼아 실천적 삶을 사는 그의 숨은 보람과 남은 숙원은 또 무엇인가?

[약력]

1948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김해에서 어린시절 보냄. 부산고, 서울대 법학과 졸. 1974년 공군 법무관 시작으로 2005 부산고법 수석부장판사, 창원지방법원장 30여 년간 부산, 경남지역에서 법관으로 사회갈등 해소와 분쟁조정에 힘써 왔으며, 2006-2012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임했다. 충무공정신을 약재로 복용한다면 양극화 및 갈등의 이 사회가 치유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이순신학교 설립 꿈꿈. 2013년 시원공익재단 이사장, 2014년 부산문화재단 이사. 저서 <이순신 장군 평전>(2002),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2004), <여해 이순신>(2008), <9인의 명사 이순신을 말하다>(2009),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2012) 등.

‘이순신 신드롬’-먼저 김종대 재판관의 TV출연 풍경이다. 2014년 추석연휴, TV채널을 돌리다 한 인물의 ‘낯선 장면’을 보곤 깜짝 놀랐다. TvN의 <고성국의 빨간의자> 추석특집편에 김 재판관이 출연한 것이다. 인터뷰하고 싶은 사람이 TV에 나왔으니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보다 그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빨간의자’에 앉은 김 재판관은 짙은 황토색(빨간색과 비슷한 색조) 콤비 상의에, 바지가랑이가 홀쭉하고 길이가 종아리까지 오는 감색 슬랙(slacks) 바지, 양말은 목이 없이 그저 발가락만 가리는 페이크삭스(fakesocks)에, 구두는 끈이 없이 굽이 낮은, 정말 캐주얼한 초콜릿색 로퍼(loafer)를 신고 있었던 것.

TvN의 <고성국의 빨간의자>에 출연한 김종대 재판관. “젊은사람들 주로 본다”는 출연진의 말에, ‘품위 없음’(?)을 무릅쓰고, 황토색 상의에, 바지가랑이 짧은 슬랙(slacks) 바지, 페이크삭스(fakesocks)에, 굽이 낮은 로퍼(loafer) 구두를 감수했다. ‘젊은이들이 이순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내가 어떻게 망가져도 좋다’는 생각에서다(사진: 차용범 제공).

나의 첫 반응은 “아니, 저 분이?” 하는 정도의 놀라움이었지만, 대략 사연을 짐작할 것 같기도 했다. 인터뷰 때 ice-breaking 삼아 먼저 물었다, “당시 ‘빨간의자’ 차림새가?” 그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 담당PD가 나를 보곤 대뜸 ‘이 프로그램, 젊은사람들 주로 봅니다, 옷차림 좀 바꿔야겠어요’ 그러며 달려들데. 이내 내가 입은 옷과 구두를 싹 벗기곤 그 차림새로 갖춰 주는거라.” 그는 "젊은사람 많이 본다"는 한 마디에 순순히 그 낯선 차림새를 수용했다. “난, 내 모습 거울도 안봤어요”, 그저 ‘젊은이들이 이순신장군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내가 어떻게 망가져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점잖고 신중해야 할 전직 헌법 재판관이 ‘품위 없이’ 젊은 층 유행의 첨단을 걷는다? 그 덕분일까, 그 날 ‘이순신 리더십의 12가지 비밀’편, ‘빨간의자’ 34회 방송분 중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 김 재판관의 외곬수 ‘이순신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에피소드다.

이순신 열풍? ‘이순신’형 공직자 갈망 때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은 국내 영화흥행의 신기록을 갱신했다.  당시 대통령과 여∙야 대표도 너나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온 국민이 ‘이순신 신드롬’에 열광하기가지, ‘이순신 전도사’ 김종대 재판관의 기여가 적지 않았다. 일찍이 이순신 연구에 빠져 이순신 평전을 저술, 보급하며 200차례 이상의 ‘이순신 리더십’ 강연을 하고 있다. 당연히, 영화 <명량>의 제작에도 그의 숨결은 배어 있고.... 영화 <명량>은 당시 9월 하순 누적관객 1750만 명을 돌파, <아바타>(1330만 2637명)와 <도둑들>(1298만 3341명)을 누르고 역대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Q. 영화 <명량>이 누적관객 1700만 명을 넘어서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다시 쓰면서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순신 신드롬’, 왜 뜨거웠나?

“세월호 참사가 났던 당시 국민의 마음은 많이 아팠다. 세월호 참사 같은 대재앙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마저 없었다. 그런 불안 속에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들이 생겨났다. 옛날엔 나라가 위기를 맞자 이순신 한 사람이 나타나 구해냈는데, 왜 지금 공직자 중엔 그런 사람이 안 보이나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봤을 거다. 우리 국민들은 이순신 같은 인물을 갈망하기 때문에 더 열광했던 것 같다.”

자기의 명예,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백성을 살리고 나라를 지켜내려는 지극한 나라사랑과 위험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솔선수범해 정성을 다하는 지도자 이순신의 무한책임 의식이 국민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도망친 선장이나 GOP(일반전초) 총기난사 사건 당시 도망친 군 간부도 앞에 놓을 가치와 뒤에 놓아야 할 가치를 전도시켜 자기만 살고 보자 해서 도망간 것이라고 본다. 뒤집힌 가치를 바로잡을 가장 큰 보약으로 ‘이순신 정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는 영화 <명량>의 흥행을 계기로 한 언론 대담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영화의 흥행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배경이 됐다고 하는데?” 그는 반박했다, “아니다. 특정한 지도자 한 명이 아니라 지도층 일반에 대한 불만과 갈증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이순신이 나라를 어떻게 구했나.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정승으로 무슨 큰 정책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맡은 바다를 지켰을 뿐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100% 완수하니 나라가 지켜진 거다. 자신의 임무를 100% 정성으로 수행하니, 하늘도 감동해 이긴 것이다. 우리도 각자의 책임을 100% 이루는 사회가 되면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당시 언론 대담자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전 BIFF 초대 집행위원장) 역시 김 재판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책임과 최선을 다하면 사회와 국가가 발전한다”고.

이 언론 대담에서 김 재판관은 또 하나의 민감(?)한 질문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이 영화의 어떤 대목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보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도 김 재판관의 의견은 뚜렷했다. “이순신의 배가 회오리에 휘말려 침몰하기 직전 백성들이 갈고리로 배를 살려내는 장면에서 박 대통령도 찡하지 않았을까 싶다. 백성들이 이순신에게 감사의 눈물을 뿌리며 절할 때에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게 바로 사랑이다”, 이런 내용이다.

Q. 영화 <명량>은 무려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다. 영화 <명량>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또 어떤 것을 배워야 하는가?

"당시 1000만 관객을 돌파하기 전까지는 1000만을 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다 누적관람객 1500만 명을 넘어서자 두려움이 생겼다. ‘우리 지도자들은 이순신처럼 목숨을 바쳐서 우리 공동체의 가치를 수행해주지 않느냐’ 하는 관객들의 아우성, 나무람으로 들렸다.“

이순신은 400년 전 목숨을 바쳐 공직자로서의 선공후사 정신을 보여준 사람이다. 사(私)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이 스스로의 목숨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목숨보다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시 했다. 공직자의 선공후사 정신, 모든 국민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물질만능주의 속 돈과 권력이 우선시되는 삶을 살고 있다. 교육도 적성∙인성보다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권력을 얻는 직업을 갖는데 초점을 맞춰왔다. 선공후사 정신은 공직자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순신이라는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로 끝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선공후사 정신을 단순한 감상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느껴야 한다. 그가 평소 강조하는 ‘이순신 정신’의 핵심, <고성국의 빨간의자>에서 역설한 그 내용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 이순신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위기가 다가올 때 이를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고, 둘은 위기 상황에서 이를 이겨내는 지혜다.” 그는 어제-오늘의 상황을 대비하며 그 교훈을 되새긴다. 임진왜란이 있던 16세기 조선이나 지금이나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은 비슷하다. 오늘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요,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니 무슨 위기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밖으로는 중국, 일본, 미국 같은 강대국의 역학관계에 영향을 받는 상황에 놓여 있고, 안으로는 분단된 영토에서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통일의 꿈을 생각한다면 조금도 걱정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Q. 영화 <명량>을 만드는데 큰 힘을 실었다고 들었다. 김한민 감독과는 어떤 인연으로 영화제작을 돕게 됐나?

“2년 전에 인천에서 이순신 정신에 관해 강연할 때다. 김 감독의 형(변호사)이 찾아왔다. 동생이 <최종병기 활>을 감독한 영화인이다, 이순신 영화를 준비하고 있으니 꼭 만났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김 감독은 이순신 장군이 불과 13척으로 왜적선 133척을 물리친 명량해전을 일본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쓴 책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의 맨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이순신에게 바친 시'를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이내 의기투합했다.”

그는 김 감독에게 부탁했다, "영화를 잘 만들어 1000만 명 관객을 돌파하게 해 달라"고, “김한민 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라고. 젊은 사람이 영화로써 이순신 정신을 알린다니 너무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는 김 감독에게 진정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나 퇴직하고 나서 이순신 정신을 알리고자 십수 년에 걸쳐 수백회 강연을 다녔지만 고작 2만여 명을 만났다. 영화 한 편으로 17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이순신을 만났으니 나를 대신해서 엄청난 일을 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다.

그는 <명량>을 크랭크인할 때 찾아가서 축사를 했다. 광양만 등지에서 촬영할 때 1시간 동안이나 지켜보기도 했다. 10초 분량 영상을 위해 1시간 이상 촬영에 몰입하는 것을 보고 성공할 것이라고 예감했다.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은 최근 김 재판관과의 대담에서 이 같은 얘기를 듣곤 선뜻 덕담했다, “당신은 <명량>의 정신적 제작자”라고. 김 감독이 김 재판관을 부르는 호칭은? ‘고문님’이다.

Q. 세월호 여파로 영화 개봉을 무기한 연기하자는 제작사의 의견에 고민하던 김한민 감독에게 ‘오히려 지금이다’라고 조언했다고 들었다. 어떤 생각에서 그런 판단을 한 것인가?

"세월호 사고가 터진 뒤 김 감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제작사 측에서 세월호 사건으로 국민 정서가 좋지 않으니 개봉을 무기연기하는 게 어떠냐고 한다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국민이 이렇게 맥 빠져 있고 우울해 할 때 이순신 정신이 국민정서를 치유하며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순신 정신이 가득 담긴 이 영화가 세월호 아픔을 이겨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며 개봉을 절대 늦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김 감독은 제작사를 설득해 7월 30일 영화를 개봉했다. 만약 개봉을 연기했다면 많은 국민들이 이렇게 좋은 위로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Q. 2012년 헌법재판관으로 퇴임을 한 이후, ‘이순신 전도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후 서울과 부산에서 ‘이순신 아카데미’를 출범했다. ‘이순신 아카데미’, 왜 만들었으며 어떤 공부를 하게 되나?

"부산에서는 사단법인 청목문화회가 주관해서 지난 6월 23일부터 21명을 대상으로, 서울에서는 재단법인 충무아트홀이 주관해서 7월 14일부터 31명을 대상으로 시작했다. 수강생들은 약 8주간 교육을 받는다. 그들은 미래의 '이순신 강사'이자 나의 동지들이다. 내가 직접 1주일에 한 번씩 강의하면서 이순신 정신을 가르치고 있고, 수강생들은 이순신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한다. 이들은 앞으로 우리 아카데미를 이끌고 갈 주춧돌 역할도 할 것이다.“

서울지역 이순신 아카데미 강연. 수강생들은 약 8주간 이순신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하며 이순신 정신을 공부한다. 미래의 ‘이순신 강사’를 기르는 과정이기도 하다(사진: 차용범 제공).

그는 장담한다, 이순신은 학교 인성교육의 표준인물로 삼으면 좋을 것이라고, 인성교육진흥법 제정으로 각급 학교가 인성교육을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카데미 수료생들도 일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안타까움도 덧붙인다, “시중에 나와 있는 이순신 관련 책 상당수가 이순신을 잘못 소개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순신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고-.

Q.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이순신 학교’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 군데도 아니고 서울, 아산, 여수, 통영 네 곳에 건립을 추진 중이다. ‘이순신 학교’는 어떤 곳이며, 특별이 네 곳을 고른 이유가 있나?

“이순신이 태어나서 자랐거나 전쟁을 치렀으며 유적이 있는 네 곳을 골라서 이순신학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품어 왔던 꿈이다. 이 학교는 정규 교육과정이 아니라 새마을 정신을 배우는 새마을연수원과 같은 형태로 운영할 것이다. 누구든지 입소해서 이순신 정신을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는 이 학교 건립에 동기 부여의 역할을 맡고 싶어한다. 지금의 온갖 사회 병리현상은 단시일에 고쳐지지 않는다, 이 학교가 이런 사회병리를 바로 잡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본다. 기업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서운한 부분도 없진 않다. 몇 년 전 관련 중앙부처에 이순신학교 건립 지원을 요청하자, 돌아온 답은 "훌륭한 생각이나 두고두고 연구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이 연구하겠다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의 서운함이다.

Q. 많은 인터뷰에서 ‘이순신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특히 ‘기술’이 아닌 ‘사랑과 정성’의 리더십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이순신의 리더십’ 정확히 어떤 리더십을 뜻하나?

"칠천량해전에서 수군이 참패하자 권율 장군이 이순신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권율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고문당해 숨지기 직전까지 가는 데 관여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권율에게 사사로이 원망하는 마음 대신, “현장을 둘러보고 방책을 구하겠다”고 답한 뒤 전세를 파악하고 수군을 재건한다. 공적인 가치를 사적인 감정보다 앞세우는 게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이다. 공직자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자세다.“

“또, 원균은 배 200척을 갖고도 참패해 전사한 반면 이순신은 불과 12척만으로 133척의 왜선 군단을 무찌른다. 그건 두 장수가 가진 내면의 차이 때문이다. 원균은 적의 목을 베어와 그 숫자를 자신의 전과로 보고했다. 그는 자신의 공이 드러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엔 장수의 평가 기준이 적의 목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적을 죽인 뒤 그 목을 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다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적의 목을 따는 대신 죽이는 데만 전념하라”고 했다. 그 결과 전투 효율이 높아지고 전사자도 급감했다. 원균은 ‘목이 없으면 내 공도 없어지는데 이겨봤자 뭐하나’란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이순신은 ‘내 공을 따지기 앞서 나라 구하는 게 급하다’는 자세로 임했다. 그런 자세가 명량해전이란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는 몇 가지 사실을 덧붙인다. 이순신은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군·민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다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상·전라도 수령들은 일제히 도망가 버리지만 이순신은 전라도 300리 길을 돌아 적진을 향해 나아가며 전투 준비를 했다고, 백성들은 그런 이순신을 보고 ‘이제 우린 살았다’고 안도하며 군량미를 헌납했고 장정들은 자원해서 병사가 됐다고.

영화 <명량>을 보면 이순신의 대장선이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던 순간 백성들이 배를 끌어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적 허구다. 김 재판관은 이 장면을 ‘완전한 허구’가 아닌 ‘현실에 근거한 허구’로 본다. 이 장면이 이순신 리더십의 원천이다는 것이다. 바로 '백성에 대한 사랑'이다.

Q. 대한민국 국군의 잇따른 사건사고들을 보며, 군과 국민에게 주고 싶은 얘기 한 말씀.

“우리는 큰 은혜를 잘 모른다. 군 복무 2년은 그저 병역의 의무에 따라 ‘청춘을 썩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가족,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희생이다. 이 제도를 인권문제로만 재단할 수 있나. 애국심과 전우애로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Q. 역시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으로 ‘사람관계’가 있다. 임진왜란을 맞아 나라를 구한 것으로 알려진 서애 류성룡과의 인연, 교류관계를 평가해 달라.

“그는 조선 최고의 국난을 극복한 최고 정치가다. 그는 이순신의 장재(將材)됨을 일찍 알고 높이 대접했고, 이순신은 류성룡에 대해 “나라에 이만한 어른이 없다”고 평가했다. 두 영웅의 협력으로 조선이 살아났으니 그 두 분의 만남은 ‘위대한 만남’인 거다.“

<이순신 파워인맥’-조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사람들>(제장명 지음)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의 핵심 지휘관으로, 정운 권준 어영담 이순신(입부) 배홍립 등을, 문신으로는 류성룡, 이원익, 정탁 등을 열거했다. 서애 류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말 그대로 ’이순신의 멘토‘다. 서애는 그의 저서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 하는 심경을 적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담기가 있어 몸을 잊고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니, 이는 평소부터 그의 정신 속에 쌓아온 수양의 결정이었다”-.

Q. 이순신을 연구한 지 45년이 됐다. 역사학자도 아닌 헌법재판관이 이순신 연구를 언제, 왜 시작했나?

“그냥 좋아서다. 그런 말을 많이 묻는데 정말 답을 하기 어렵더라. 1975년 법무장교로 지낼 때였다. 장교와 사병 50명을 상대로 교육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제목도 내가 정해야 했다. 그래서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때 노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한 번 읽고는 '와! 이순신이 이런 사람이었나? 굉장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서점에서 이순신을 운명적으로 만난 것이다. 뭐 결혼도 그렇게 우연히 이루어지듯 한 두 장 읽은 뒤 책을 바로 샀고, 두 번 읽고 강연했다. 그때부터 헤어나질 못하고 계속 빠져들었다. 신문에서 나는 거, 문제가 됐거나, 뭐 발견됐다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았다. 노산 선생의 책은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다시 읽었다. 읽으면서 생각하고, 내가 일을 하는 것도 거기에 관련해서 생각하곤 했다.”

Q. 이순신 장군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출간했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쓴 책부터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이순신 장군을 소개한 책까지… 법조인으로 바쁘게 살면서 책까지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우리 국민 중 70%가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으로 꼽지만 알고 있는 지식은 초등학교 교과서 수준이다. 그냥 왜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이기고, 감옥을 가기도 했다는 게 대부분이다. 이순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갔는지 하는 생애와 사상, 부하와 백성, 그리고 나라를 끔찍이 사랑한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을 내게 됐다“.

그는 2002년 첫 저작 <이순신 장군 평전>(2002)을 낸 데 이어, 2004년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를 발간했다. 이순신의 탄생부터 노량해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명한 평전이다. 좌절과 역경을 이겨내고 한민족의 가슴에 성웅으로 자리잡은 그의 충실한 일대기를 담고 있다. <여해 이순신>(2008)은 30여 년간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순신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이다. 역사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순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오늘날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기 쉽게 풀어냈다. 2009년에는 이순신의 성공 리더십을 잭 웰치(GE 회장)의 성공 리더십과 비교, 이순신 리더십의 고차원성을 강조한 <9인의 명사 이순신을 말하다>를 출간.

2012년 초판을 낸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는 이순신의 ‘리더십’에 주목, 이를 네 가지 내면가치로 체계를 잡아 정리한 책.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경쟁사회에서 오히려 제힘을 기르고, 내면과 외면을 고루 성장시키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후 <이순신, 조선의 바다를 지켜라>도 나왔다.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에, 역사 소설가 김정산 작가가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다듬고, 재치와 위트가 번뜩이는 이우일 만화가가 솜씨를 보태 알차고 재미있는 책을 완성한 것. 이 책은 두려움에 떠는 백성의 보호자로, 군사들의 지휘관으로, 한 가정의 아버지로의 이순신 장군을 그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선생과 제자, 또는 친구끼리 진정한 리더의 모습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의견을 나누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Q. 이순신을 다룬 책은 지금까지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훈의 <칼의 노래>와 감탁환의 <불멸의 이순신>이 있다. 이 책들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칼의 노래>에 대한 감상을 얘기하면 부패하고 썩은 기성세대와 당파싸움으로 백성과 국가는 안중에도 없는 지배층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이 부르는 칼의 노래는 그 분노를 참아내는 것이다. 김탁한의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이 불멸하는 길은 자살을 하는 것처럼 생의 마지막을 묘사한 것 같더라. 그것들이 문학작품으로는 굉장히 재미있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이순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순신은 분노를 녹일 수 있는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 이순신에게 분노를 참는다는 것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벼슬을 아무리 빼앗아도,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아도 그 마음에 원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능히 자신을 이긴 인격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이순신은 자기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외적을 다 깼다. 그 힘을 바탕으로 자기에게 돌아오는 모든 업무, 부당한 처우도 웃으면서 받았다고 본다. 그러니까 분노의 노래를 부를 사람은 아니다.“ 그는 그의 저작에 대해 ”소설과는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소설을 썼고 그는 이순신 정신이 담긴 일대기를 썼다는 것이다.

Q. 45년 동안 이순신에 대해 공부하고 모든 자료들이 상당할 것 같다. 지금까지 어떤 자료들을 얼마나 모았나? 또 이순신 장군에 대해 연구를 하거나 책을 쓸 때는 어떤 자료들을 토대로 하나?

"제일 중요한 자료가 정조 임금이 만든 <이순신 충무공 전서>(노산 이은상 번역) 두 권이다. 이순신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정조가 완전 이순신 팬이어서 자료를 다 모았더라. <난중일기>는 물론이고, 이순신 조카가 쓴 <이순신의 행록>, 이순신에 관해서 사람들이 평한 것, 이순신이 쓴 시, 이순신이 주고 받은 편지 등등. 이순신에 관한 전국에 있는 모든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게 이순신 자료의 90%다. 사실은 류성룡의 <징비록> 같은 것들도 보조 자료다. 이들을 이용해서 이순신이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기록을 정리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해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있었다.“

Q. <이순신, 조선의 바다를 지켜라>(2014)는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책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이순신의 인간성과 인품에 대한 내용이 생생히 담겨있다.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특별히 따로 만든 이유가 있나?

"어린 학생 때부터 선공후사, 책임완수, 솔선수범, 소통, 유비무환, 창의력과 열정 같은 이순신 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투자해야 한다. 어린이는 이순신 정신이 담긴 '당의정'을 먹고, 어른은 '주사'를 맞아야 하지 않겠나.“

Q. 영화 <명량>의 흥행으로 <이순신, 신은 이미...> 같은 책도 많이 팔렸을 것 같다. 인세는 어떻게 사용하나?

“책은 꽤 많이 팔렸지만, 나는 인세를 전혀 받지 않는다. 저작권 계약을 모두 (사)청목문화회가 출판사와 맺었기 때문이다. 청목문화회는 독서진흥과 문화활동 지원을 위해 20여 년 전 몇몇 뜻있는 부산사람들이 참여해 만든 모임이다. 이제는 사단법인으로 발전해 이순신 전도의 재정적 지원을 맡고 있다.”

<이순신, 신은 이미...> 같은 책은 몇 권이나 팔렸을까? “한 4만 권 팔린 것 같다”는 대답이다. “사람들이 좀 읽기는 읽는 것 같다”면서, 스토리 한 토막도 덧붙인다. 올 개정판이 한창 팔릴 무렵, 서울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한 우강(友江) 한상완 시인이 이 책을 읽은 뒤 자신의 시집 속표지에 금색 글씨로 써 보낸 독후감 얘기다. 김 재판관이 보여준 휴대폰 사진 한 컷-“제가 최근 읽은 책 중 <이순신, 신은 이미...>만큼 제 영혼과 정신을 흔들어 깊은 감명을 준 책은 없었습니다. 책 끝에 쓰신 시는 역사상 어느 분의 글보다 진솔하고 폐부에 깊은 감명을 준 글이었습니다...”

한상완 시인이 얘기한 그 ‘책 끝에 쓴 시’는 김 재판관 스스로 평한 ‘이순신 연구의 결론’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이순신의 일대기를 정리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산 바다 거북전선 적의 탐욕 응징했고/명량 바다 열두 전선 배달 불꽃 되살렸네//노량바다 차가울 제 하늘 두고 맹세했네. 이 원수를 다 갚으면 아무 여한 없겠다고//영웅으로 태어나서 성웅으로 돌아가니/거룩하다 님의 생애 죽었어도 살았도다!”

Q. 그 동안 전국을 돌며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강연도 많이 했다. 얼마나 많은 강연을 했나?

"퇴임 후 전국 각지를 다니며 이순신 관련 강의를 한 것만 50회 이상이다. 그 이전까지 더하면 200회가 넘는다. 그러나 나는 강연료를 좀 주는 기업체나 기관 같은 곳은 그 값을 하도록, 나보다 ‘이순신’을 훨씬 잘 아는 학자에게 그 강연을 맡긴다. 알선한다고나 할까. 이순신의 나라사랑과 정성을 잘 전해야 할 학교처럼, ‘내가 안하면 이순신이 나무랄 것 같은 강연’은 어디든 내가 간다.“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특강 기념사진. 그는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서 200회가 넘도록 이순신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이순신의 나라사랑을 잘 전해야 할 학교처럼, ‘직접 안하면 이순신이 나무랄 것 같은 강연’은 어디든 달려간다(사진: 차용범 제공).

그는 2박3일 일정으로 백령도 강연도 다녀왔다. 백령도, 우리 육지와의 최단거리 230Km, 쾌속선으로 4시간 30분이 걸리는 서해 5도 최북단 섬이다. 그 곳 주민들은 국방에 관한 한 군인과 다름없더란다. 이들에게 이순신의 지극한 나라사랑과 정신을 전해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풍랑주의보 속의 험한 바다를 뚫고 힘들어도 직접 갔다. 특강을 청한 이는 농협 조합장, 직선을 거친 백령도의 지도자였다.

‘이순신 장군과 나라사랑’-그들은 특강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온 도내에 10개 넘게 내걸었다. 북한의 장산곶과 ‘심청전’ 속의 임당수가 지척에 보이는 그 곳, 특강에는 농민지도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스타 현빈이 해병으로 근무한 섬, 그 섬에서 현빈이 찾았던 작은 펜션에서 잠을 잤다. 그 분들의 따뜻한 대접에, 그는 깊은 보람을 느꼈다.

Q. 헌법재판관 퇴임 후 서울의 대형 로펌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이순신 전도사’로, 삼일회계법인 고문으로, 부산문화재단 이사로 헌신했다. 이러한 행보 역시 40년간을 연구하고 본받고자 했던 이순신의 영향인가?

“평소 판사를 그만두면 돈만 버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서울의 법무법인 등에서 상당한 조건을 제시하며 영입하겠다고 했지만 사양했고, 헌법재판관을 마치고 부산에 내려간다고 하니 후배들도 개업을 말렸다. 지금 사무실을 쓰고 있는 ‘삼일회계법인 고문’, 그 조건은 이순신 강연을 맘 놓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김종대 헌법재판관의 퇴임인사. 그는 부산에서 학창생활을 보내고 향판생활을 한 뒤, 헌법재판관 퇴임 후 다시 부산으로 귀향했다. 서울지역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고향 부산 지역사회에 기여하려는 일념 때문이다(사진: 차용범 제공).

“부산에서 가장 큰 법무법인 국제의 고문을 수락한 이유는 따로 있다. 부산, 경남, 울산지역의 개인∙기업이 시스템적으로 가동하는 서울지역 대형 로펌을 쓰려면 10배에 가까운 수임료를 줘야 한다. 학교도 서울로, 직장도 서울로, 병원도 서울로 가는 현실에서 고급 법률 서비스를 받으려고 서울까지 가야 한다면 억울하지 않나. 걸음마 단계이지만 서울 서비스 수준을 따라가려고 전문적 팀 가동 같은 전문 시스템을 갖추는 데 자문역할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사건을 맡지는 않지만, 부산 법조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부산지방변호사회에 변호사 등록은 했다.”

‘시원공익재단 이사장’, 이 직책은 이미 정리한 직책이다. 전임 김기춘 이사장이 2013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가며 그에게 ‘시민을 위한 공익적 봉사활동’ 차원으로 맡긴 일이긴 하나, 2013년 말 여러 생각 끝에 사임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일부러 알리기도 그렇고 해서 지금껏 지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남 창녕 태생이다. 유년시절은 김해에서, 초등 3년 이후부터 고등학교까지 부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판사가 된 후 첫 근무지 역시 부산지방법원으로 발령받으면서 헌법재판관이 되어 서울로 가기까지 줄곧 부산∙경남에서 근무한 소위 ‘향판(鄕判)’이다. 사실 ‘향판’이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이 된다는 건 부산시장이나 경남도지사가 장관이 되는 길보다 더 어려운 일, 부산에서는 조무제 대법관에 이어 그의 헌법재판관 등극은 지역 법조계의 큰 경사였다.

Q. 부산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창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부산은 어떤 의미인가?

"난 고향이 좀 애매하다. 그러나 부산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군대 갔다 온 기간 빼곤 다시 부산 일원에서 20여 년간 법관 근무를 했다. 헌법재판관 생활 6년을 마치고 부산으로 귀향했으니, 부산은 곧 나의 고향이다.“

Q. 부산의 강점, 부산사람의 특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부산, 바다(해양)와 산, 강과 온천을 다 안은 ‘4포지향’ 아닌가. 이런 천혜의 환경을 가진 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제대로 활용을 못할 뿐이지. 개방성, 활달함, 포용성, 이런 부분 역시 부산사람들이 자랑할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Q. 과거 부산과 비교한다면 지금의 부산은 얼마나 달라졌나?

"부산은 원래 경남도청 소재지였다. 울산도 부산과 함께 ‘경남’의 일원이었고. 그 때만 해도 물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고, 가덕신항 경계문제로 서로 싸우고, 그럴 일이 없었다. 한 뿌리이니 잘 어울릴 수 있었겠지. 지금은 부산-울산-경남으로 나뉘고 나니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없지 않다. 이제, 부산-울산-경남이 ‘함께 사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도 검토해야 할 때인 듯 싶다. 3개 지역을 재통합, 수도권과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지자체로 거듭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는 수년전부터 해왔다. 어려울까?“

Q. 앞으로 부산에서 어떤 일들을 하고 싶은가?

"앞으로? 시인은 시로, 소설가는 소설로, 영화감독은 영화로, 연극연출가는 연극으로, 판소리 대가는 판소리로, 온 국민에게 여러모로 이순신정신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찾아가며 살고 싶다.“

그는 부산문화재단 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가 하고 싶은 일과 부산시민에게 보수 없이 봉사하는 일, 그 접점에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맘껏 할 수 있는 것? 그건 많은 부분 가족의 도움 덕분이다. 그는 경상도 사나이답지 않게 ‘가족자랑’을 내세운다, “우리 가족, 모두 업어주고 싶다”고-.

그는 앞으로 언제까지 이순신을 연구할 계획일까? 그는 단문으로 대답한다, “기한은 없다”고. 책을 쓰고 강의 하는 일이 체력 소모가 클 것 같은데, 평소 건강은 어떻게 관리할까? 그는 걷기와 골프를 즐기지만, 올들어 한 반년 골프는 치지 못했다. 세월호 사건의 영향으로 자제하기도, 팔을 좀 다쳐 골프채를 못잡기도 했다. “아마도 장군께서 올해는 골프를 치지 말라는 계시를 주신 듯 하다”는 그의 해석이다.

Q. ‘이순신 전도사’, 얻은 보람은 무엇이며, 남은 숙원은 무엇인가?

"아직은 보람을 느끼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정성을 다할 뿐 뒷일은 생각도 안할 요량이다. 이순신처럼-“ ‘이순신처럼’? 이 말은 그의 저서 <이순신, 신은 이미...>의 결론 부분, ‘이순신의 삶과 지도자적 품성-리더십의 원천을 찾아서’에 잘 나와 있다. ”정성스러운 사람은 일이 있기 전 철저히 준비하고, 일에 직면하면 그 일에 전념하고, 일을 끝내면 뒷일을 두고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그 시간에 열심히 즐기고 일하면 된다.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세속적 표현의 해석이다.

오늘도 ‘이순신 전도’에 여념이 없는 김종대 재판관. 앞으로, 온 국민에게 여러모로 이순신정신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찾아가며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다. 아무 기한 없이 이순신 연구에 전념하며(사진: 차용범 제공).

Q. 헌법재판관에서 '이순신 전도사까지'… 앞으로 주변으로부터 어떤 사람으로 평가 받고 싶은가?

"난 이순신 어법으로 대답하고 싶다, 그건 ‘신이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라고.“

부산 남구 문현동 동천변 별다른 뷰(전망)도 없는 작은 사무실, 그는 ‘부앙무괴(俯仰無愧: 하늘을 우러러보나 세상을 굽어보나 양심에 거리낄 만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맹자(孟子)> ’진심(盡心)‘편에 나오는 고사성어 서예 액자 아래에서, 둥그스런 미남형 얼굴에 경쾌한 호남형 웃음으로, 오늘도 ’이순신 전도‘에 한창 바쁘다. 한 우물 파기 45년에 아직 보람을 느끼지 않는 그, 앞으로도 오직 ’이순신 전도‘에 필생의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 이 ’천생 이순신 전도사‘ 김종대 재판관이 걷는 길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두루, 참 궁금하지 않은가?

그동안 [부산의 현대인물을 찾아서]를 열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시빅뉴스는 4월부터 [시빅뉴스가 만난 사람]이란 새로운 인터뷰 코너를 마련해서 다시 독자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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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헌법재판관#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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