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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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을 보고나서
  • 편집인 강성보
  • 승인 2014.08.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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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영화 <명량>을 ‘드디어’ 관람했다. 나는 남들 다 보는 영화는 애써 안봤다가 맨 마지막에 막차로 보든지, 아니면 나중에 인터넷으로 공짜로 보는 취향인데, 집사람이 하도 성화를 부려 집 근처에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송파 CGV로 끌려갔다. 가보니 6개 상영관 중 4개가 <명량>을 상영하고 있었다. 당시 이미 누적 관객 1,500만을 돌파했음에도 각 상영관에 빈자리가 드물 정도였다. 정말 공전의 히트작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엔딩이 올라오는 순간 뭔가 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작품성이나 흥미성 면에서 기대치를 밑돌았다. <명량>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성웅 이순신의 리더십을 갈망하는 시대 상황 때문이지, 작품의 완성도 때문은 아니라는 일부 평론가의 지적에 동감했다. 김한민 감독의 이전 작품 <최종병기 활>보다도 못한 졸작이라는 평론가 진중권의 독설에 가까운 혹평에도 수긍이 갔다.  최소한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할 만큼의 수작은 아닌 것 같았다.
 
우선 스토리텔링이 산만했다. 연극이나 영화, 오페라, 드라머 등 이야기를 담아내는 장르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조를 갖는 게 원칙이다. 도입부가 전개되고, 본격 스토리가 따라가며, 관객들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극적 반전이 있은 뒤에, 그 긴장감을 풀어주고 여운을 남기는 대단원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명량>은 이런 기본적인 구도를 무시한 듯했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지 않고 제각각 따로 놀았다.  
 
조선군 세작(細作, 스파이)의 벙어리 아내(이정현 )가 해안에서 치마를 벗어 마구 흔들며 수신호를 하는 대목이 왜 나와야 하는지 의아했다. 관람객의 누선을 자극하기 위해 삽입했다는 짐작은 가지만 좀 생뚱맞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수하 장수가 일본 수군의 규모에 지레 겁을 먹고 패배감에 젖어 결전을 독려하는 이순신 장군의 암살을 기도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뒤 도망가다 화살에 맞아 죽는 에피소드도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했다.
 
물론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웬만한 한국 사람이면 너나없이 숙지하고 있고, 명량대첩에 관한 내용도 다들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만큼 그런 상식적인 구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해명이 가능하다. 그래도 기본 틀에서 벗어난,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 앞니 빠진 듯이 성긴 스토리 전개는 관객들에게 허기감을 안겨줬다.
 
몇몇 장면에서 드러난 리얼리티의 상실감도 <명량>의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통상 영화는 판타지가 아닌 이상 리얼리티가 생명이다. 진정성이 결여된 장면들은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신라, 백제, 고구려군의 전투 신에서 저 멀리 산 등성에 철탑 전신주가 보이고 엑스트라로 등장한 배우 발에 운동화가 신겨져 있으며, 심지어 오른쪽 눈 애꾸가 장면이 바뀌자 왼쪽 눈 애꾸로 변하는 등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냈던 60년대 한국 영화가 얼핏 생각났다. 물론 <명량>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과연 저게 가능할까” 하는 회의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군데군데 나타난 것은 아쉬웠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구성된 백병전부터가 그랬다. 우선 백병전 자체가 사실(史實) 에서 벗어났다. 영화를 본 뒤 역사를 전공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명량해전에서 조선군과 왜군의 함선이 부딪히는 육박전이나 수군들이 직접 칼사움을 벌이는 백병전은 없었다고 단정한다. 설사 백병전이 있었다고 해도 농사만 짓던 농민 출신과 의병으로 참전한 승려가 대부분인 조선 수군이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처절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무라이 출신 왜군을 맞아 그렇게 훌륭하게 칼 싸움을 해냈을 개연성은 적다. 백병전을 시작하면서 왜군 지휘관이 “도츠게키(돌격)”라고 외치자 이순신 장군이 “백병전이다”라며 사병들에게 전투를 지시하는데, 이 호령도 어색하다. “백병전이다”는 명령어가 아니다. 그 장면에선 “돌격”, 또는 “쳐라”, “죽여라” 등이 어울리는 호령일 것이다.
 
왜군의 선봉장 구루시마 미치하루(來島通總, 류승룡 )의 측근 저격수의 등장도 의아하다. 초정밀 망원렌즈가 부착된 소총이라면 모를까, 탄착군 형성도 제대로 되지 않을 듯한 구닥다리 화승총으로 수백m 떨어진 조선 함대의 지휘관을 그렇게 정확하게 겨낭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더욱이 반격에 나선 조선군 궁수가 이 저격수의 머리에 활로 한방에 쏘아 맞히는 장면은 통쾌감보다는 오히려 실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은 한산도 대첩과 함께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대승이다. 불과 12척의 함선으로 133척(영화에서는 330척으로 나옴)의 함대를 물리친 이 전투는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군은 10여 명의 사상자가 났을 뿐 함선을 1척도 잃지 않은 반면, 왜군은 함선 1백여 척을 잃었고 수천 명 사망자들이 흘린 피가 울돌목을 붉게 물들였다고 할 정도였다. 객관적 전력 비교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 일방적인 승리의 비밀이 늘 궁금했다. 울독목의 급한 물살과 소용돌이를 이용한 것이라는 대강의 사실은 알고 있지만 어떤 방법으로 왜군 함대를 타이밍 맞게 그 수역으로 유도했고, 또 어떻게 물살을 이용했는지 호기심을 가졌었다.
  
이번 CGV 영화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도 김한민 감독이 이 대첩의 수수께끼를 정색으로 조명하지는 못하더라도 대가 답게 멋진 상상력으로 풀어냈을 것으로 은근한 기대감을 가졌었다. 그런데 영화는 이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이 현지 촌로의 안내를 받아 울돌목 급류를 사전에 관찰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이 급류를 실제 전투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 해답은 없었다. 또 오락성을 높이기 위한 상상적 장치로 이해는 되지만, 이순신 장군의 기함이 단기필마 식으로 앞장서 적함과 육박전을 벌이는 것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오히려 명량 대첩의 비밀을 미궁으로 빠뜨린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듯싶다.  
 
이순신 장군의 용기가 지나치게 부각되어 전략가적 측면이 소홀히 다뤄진 점은 이 영화의 최대 결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량 대첩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한 지모과 적의 심중을 꿰뚫는 전략이 일궈낸 승리다. 여기에 엄정한 신상필벌로 부하를 통솔하는 장군의 리더십과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가 덧붙여져 그런 사상 최대의 대첩을 일궈낸 것이다.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 관우(關羽)의 면모를 합친 것 같은 이순신 장군을 장비(張飛)와 같은 용장(勇將)으로만 묘사한 것은 모순이다.
 
이순신 장군으로 분한 최민식의 연기는 일품이었지만 장군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뿜어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 아닌가 싶었다. 단호하고, 의젓하고, 강렬해야 할 때 늘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적장 구루시마 역을 맡은 류승룡의 눈빛 연기가 돋보였다. 물론 공연히 어깨 힘만 잔뜩 들어간 껍데기 카리스마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겠지만…
 
친구들에게 이런 소감을 이야기하자 핀잔이 돌아왔다. 그냥 관람석에 앉아 2시간여 즐기면 되는영화를 뭐 그렇게 까탈스럽게 보느냐는 것이다. 1,500만 관객을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 영화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논리도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해전 스펙타클과 조선군과 왜군의 투구, 갑옷 등 철저하게 고증을 거친 디테일은 우리 영화사에서 일획을 그을 만 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사실 그들의 주장에 동의한다.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못한 실망감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아서 그렇지, 영화 <명량>은 수준급 작품이라는 데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다. 사실 영화보는 재미도 솔솔했다. 7,000원 입장료가 결코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이순신과 같은 리더십을 갈망하는 시대상황 때문인 듯, 결전 하루 전 장군이 장병들을 모아놓고 “아직도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 생각을 하면 죽고 죽을 생각을 하면 산다(, 死即生)”는 사자후를 토하는 장면에서는 울컥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영화보고 나서 인터넷으로 왜장으로 나온 인물들을 검색해봤다. 그중 흥미를 끈 인물이 해적왕 구루시마와 육박전을 벌이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조진웅 )였다. 일본 중부 오오미(近江, 현 시가현) 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처음엔 전국시대 3효웅 중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오른팔 아케치 미쓰히데 밑에서 일하다가 오다가 혼노지(本能寺)의 변으로 아케치에 척살당한 뒤 재빠르게 변신, 아케치 토벌군의 지휘관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승승장구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뒤 귀국,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세를 넓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히데요시의 아들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벌일 때 도요토미의 진영에 있으면서도 도쿠가와 측과 내통, 그 공을 인정받아 에도 막부시대 5만 석의 대 다이묘(大名, 봉건영주)로서 73세까지 천수를 누린다.
 
한마디로 시류에 매우 잘 적응하는 눈치 빠른 인물이었다. 명량 해전때도 해적 출신 구루시마를 슬슬 자극하면서 앞장세우고 자신은 뒤로 슬쩍 빠져 있다가 도망쳤다. 이 와키자카는 임진왜란 때 처음엔 육군이었다가 나중에 수군으로 보직이 바뀌는데, 육전에서는 상승장군이었지만 해전에서는 이순신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햇다. 특히 한산대첩 때는 이순신의 학익진에 백수십 척의 함선을 모두 잃고 자신도 온몸에 화살을 맞고 간신히 목숨만 건진 뒤 가덕도 인근 무인도에 숨어 한동안 미역 만으로 연명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와키자카는 이 수모를 잊지 않으려 7월 8일 한산도 대패전 기념일엔 죽을 때까지 미역만 먹고 지냈다고 한다. 그 전통은 후손들까지 이어져 아직도 와키자카 가문은 모두 7월 8일엔 미역으로 하루 끼니를 때운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전백패의 이런 두려움 때문에 영화 <명량>에서 와키자카는 선봉에서 “이순신을 잡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구루시마에 대해 "이순신은 만만한 상대가 아냐"라면서 거듭 경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와키자카가 조선 수군에 딱 한 번 이긴 적이 있었다. 이순신이 선조의 질시를 받고 애꿎은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동안,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격파했을 때다. 리더십과 전략 결핍증의 원균은 이 와키자카 등 왜군에게 169척의 함선 중 157척을 모두 잃고 자신의 생명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여기서 간신히 빠져나온 12척이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동원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고 하는 그 12척이었다.
 
같은 수군에 같은 함선인데 한사람은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왜군을 몰살시킨 반면, 누구는 갖고 있는 함선 모두를 잃고 자기 생명도 잃는 처참한 패전을 기록한 것이다. 올바른 리더십과 지도자의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한 대목에서 여실히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움직이고 사회 갈등이 극렬하게 부딪히는 요즘 우리는 이런 이순신의 리더십이 정말 필요한 시점이다.  
 
천수를 누리고 죽은 왜장 와키자카의 묘소는 현재 도쿄에 있는 한 사찰에 있다. 그 위령패엔 와키자카가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 이런 내용의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은 이순신이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내가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은 이순신이요/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것도 바로 이순신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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