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우 칼럼]입학, 유붕자원방래 그리고 ‘촛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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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칼럼]입학, 유붕자원방래 그리고 ‘촛불혁명’
  • 대표/발행인 이광우
  • 승인 2019.03.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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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 발행인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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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의 계절입니다. 공부를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공부란 무엇일까요? 매사 의문을 품고, 물어보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수학자이자 밀교 교주였던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의 질문을 용납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공자 부처 예수 소크라테스 같은 분들은 심지어 제자들의 질문을 유도했고, 친절하게 답을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물음은 곧 답’이라고들 합니다. 물음이 정확하면 답이 정확하게 나오고, 물음에 격조가 있으면 답에 격조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물음은 어떻습니까?

<논어>의 제1장 제1절 ‘학이’편에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란 말이 있습니다. 흔히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이 또한 군자 아닌가"로 해석합니다. ‘온(慍)’을 성내다, 노여워하다, 원망하다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물음이 나옵니다. 이런 정도의 태도가 과연 그토록 대단하고 어려운 것인가? 유교 경전의 첫 구절치고는 지나치게 시시하고 세속적이지 않은가?

물음이 나왔으니, 1절 전체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답을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자왈(子曰),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흔히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해석합니다. 공부, 벗, 마음 다스림 따위의 중요성에 관한 진술로 보입니다.

그런데, 명색 "아침에 천하가 올바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고까지 한 대 철학자가, 작심하고 내뱉는 일성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그릇된 해석을 접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제가 동의하는 해석을 보면, 중국의 고대사에 대한 일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정리 정돈을 해 보겠습니다.

공자는 ‘도(道)’를 절대시했습니다. 수상한 남녀가 행인을 붙잡고 물어보는 그런 종류의 도나, 불교의 해탈 같은 종류의 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공자의 도’는 중국 고대의 태평성대, 즉 ‘요순시대’를 이끈 요 임금과 순 임금 같은 성인들의 통치 이념을 말합니다. 이 성인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덕을 닦았고, 생활은 검소했으며, 백성을 내 몸같이 사랑했습니다.

공자는, 지도자란 이러한 성인들의 통치 이념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컨대, ‘학이시습’은 이러한 통치 이념을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공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붕자원방래’에서 ‘붕’은 벗이 아니라 ‘백성의 무리’를 뜻합니다. ‘민족’이란 개념은 근대에 생겨난 것입니다. 기원전 시대의 사람들은 지도자를 좇아 이리저리 나라를 옮겨 다녔습니다. 회사를 옮기는 일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도를 실현한 사실을 알고 주위의 백성들이 자연스레 몰려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는 자신이 도로써 태평성대를 이루었지만 백성들은 그런 사실을 몰라볼 수 있는데, 이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공자는, 세상의 평판에 초연하고 다만 부단히 노력할 것을 지도자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는 아마도 요 임금의 사례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요 임금은 세상을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그 결과가 궁금해서 미행을 나갔습니다.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쉰다.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는다. 임금의 힘이 어찌 내게 있을까”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노래가 저 유명한 ‘고복격양가(鼓腹擊壤歌)’입니다.

이때 요 임금은 선정(善政)이 이루어지면 지도자의 존재나 지도자가 한 일 자체를 모르게 되는 것이라면서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의 공부를 토대로 ‘학이’편 제1장 제1절을 해석해 보면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인들의 통치 이념을 배우고 익혀서 마침내 내 것으로 만든다면 기쁘지 않겠는가. 성인들의 통치 이념이 구현돼 주위의 백성들까지 자연스레 몰려든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 이런 데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진실로 훌륭한 지도자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돌아보니, ‘온’이란 글자 하나에 대한 의문과 물음이 제법 폭넓은 세상을 펼쳐 보여주었습니다.

농업혁명, 분서갱유, 프랑스혁명, 삼국통일, 기미독립선언서, 일왕 히로히토의 종전조서(항복선언이 아닙니다), 한반도 비핵화, 5.18 유공자, 촛불혁명 등, 우리가 당연한 듯이 인용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한 번쯤 물음을 제기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 물음들이 생각지도 않은 답으로써 더 폭넓은 세상을 알게 해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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