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누에보 다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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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누에보 다리’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
  • 김태호 시빅뉴스 스페인 특파원
  • 승인 2014.10.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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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고종 13년에 강화부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조선 내부에서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개화파와 외세로 인해 정신적 기반인 성리학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위정척사파 사이의 갈등이 커져 갔다. 개화파는 새로운 문물과 우리 전통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위정척사파는 이게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부 갈등 속에서 조선은 새로운 문물을 타율적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나라 주권을 외세에 빼앗기면서, 당시 우리는 외국 문물은 무조건 나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기자가 체류하고 있는 코르도바 시가 속해 있는 안달루시아 주는 711년부터 1492년까지 약 800년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사람들은 다른 유럽인들과는 다르게 얼굴에 아랍인, 혹은 동양인의 모습이 남아있다. 검은 머리, 작은 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건물들 또한 그렇다. 이곳에는 유럽 양식인 고딕이나 바로크 양식도 있지만,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이슬람 건축 양식들이 즐비하다.

이슬람 왕국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한 스페인은 로마네스크 양식, 고딕 양식, 이슬람 양식을 아우르는 무데하르(Mudé jar) 양식을 탄생시켰다. 무데하르 양식은 스페인 전통과 이슬람 문화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이슬람 문화를 배척하기보다는 조화와 포용을 선택한 것이다.

스페인에는 메즈키타(Mezquita, 스페인에 있는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비롯해 알카사르(Alcazar) 요새, 그리고 이슬람 거주 지구인 알바이신(Albayzin) 등 이슬람 세력이 만든 많은 건물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매년 수많은 해외 관광객들이 이를 보러 스페인으로 몰리고 있다.

▲ 코르도바 시내에 있는 이슬람 사원 알카사르 내부의 모습(사진: 스페인 특파원 김태호)

기자는 얼마 전, 안달루시아 주의 다른 대표도시인 세비야와 론다에 다녀왔다. 세비야 시의 한 버스 역에서 하차해 10분 정도 걸었더니 책에서만 봤던 ‘황금의 탑’이 눈에 들어왔다.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보통 역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들은 보호되기 마련이지만, 황금의 탑 바로 옆으로 난 큰 도로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조깅하고 있었으며, 이른 새벽부터 카페테리아들이 문을 열고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스폐인의 광경은 문화재는 대개 산에 있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렇게 유산 가까이 사람들이 뛰어 다니고 바로 그 옆에서 커피를 마시면, 그 유산이 훼손되지 않을까?

▲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황금을 보관했다는 황금의 탑이 세비야 시에 우뚝 서있다(사진: 스페인 특파원 김태호)

기자는 이런 걱정이 앞섰다. 그곳에서 만난 스페인 대학생 마리아(Maria, 21) 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문화재를 가깝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은 문화재를 더욱 자신의 것처럼 여긴다. 새로 생긴 도로와 항금의 탑은 충분히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세비야 시를 떠나 론다 시로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세비야 시는 버스, 트램(도로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전차의 일종), 지하철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대도시였다. 하지만 세비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도시와는 그 형태가 달랐다. 한국의 도심에는 백화점, 레스토랑, 커피숍이 일렬종대로 나란히 서있게 마련이지만, 세비야의 중심가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세비야 대성당, 알카사르 요새, 그리고 세비야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고색창연한 세비야 대학이 사람들을 반겨준다. 도시 중심에 문화재가 있는 것이다.

세비야 대학과의 첫 대면 순간이 아직도 뇌리에 스친다. 독자들도 상상해보라. 부산 서면 1번가에 도산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세비야 대학생들은 여느 대학생들과 같이 스타벅스 커피를 오른손에 쥐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대학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오른손에 쥐어진 커피만 없었다면, 500년 전 대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 역사를 자랑하는 세비야 대학은 버스와 전차의 일종인 트램이 지나다니는 중심가에 위치해 있다. 사진 오른쪽에는 레스토랑과 커피숍이 셀 수 없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사진: 스페인 특파원 김태호)

 

▲ 고색창연한 세비야 대학의 웅장한 모습(사진: 스페인 특파원 김태호)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코르도바 대학에 와 있는 건국대 3학년 이승복(23) 씨는 론다를 이미 다녀왔다. 그는 기자에게 론다에 다녀오면 진정한 문화간 조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기자가 수강한 과목을 가르치는 코르도바 대학 강사인 아돌포(Adolfo) 교수도 “스페인에 왔으면 꼭 가봐야 할 곳이 ‘론다’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론다는 누에보 다리(Nuevo Bridge)로 명성이 자자하다. 누에보란 new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누에보 다리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다. 이 다리는 론다 시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120m 깊이의 협곡 사이에 서 있어 보는 이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 론다 시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해주는 누에보 다리. 120m 협곡 위에 세워져 있어 그 아래가 아득하다(사진: 스페인 특파원 김태호).

기자는 이 황홀한 다리를 마음속에 담기 위해 절벽 가장 아래부터 시작해 누에보 다리 정상까지 신나게 걸어 다녔다. 누에보 다리가 새로 건축됐지만, 기자는 다리 주변 자연은 그대로 보존돼 있어 놀랐고, 자연에 녹아 인위적이게 보이지 않게 지어진 누에보 다리라는 건축물에 또 한 번 놀랐다. 국적을 불문하고 주변에 있던 독일인, 캐나다인, 일본인, 미국인들도 커다란 감동에 말을 잃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했다.

기자는 그 자리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 온고지신이란 옛 것을 알면 새 것도 안다는 것으로 옛것과 새 것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스페인은 옛것을 버리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면서 동시에 새 것을 추구하고 있는 듯했다. 스페인에 온고지신의 정신이 있었다.

한국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준비에 한창이다. 한국은 단 며칠간의 스포츠 행사를 위해 조선시대부터 가꾸어 왔던 가리왕산의 산림을 개발하는 특별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가리왕산은 수많은 희귀 생물이 살아 있어 산림청에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현재 스키장 건설 명목으로 벌목이 진행 중이다. 옛 것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옛것과 새 것, 어느 것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느 하나를 우선하려는 것은 인간의 그릇된 욕심이 아닐까?

▲ 옛것(절벽)과 새 것(누에보 다리 위의 카페테리아)의 조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론다 시 누에보 다리 위의 광경(사진: 스페인 특파원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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