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한국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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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한국 교육
  • 김수인 시빅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13.09.30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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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지만 역대 정권의 교육 정책을 보면 백년은커녕 겨우 2, 3년을 내다보는 정도인 것 같다.  먼저 교육정책의 수장인 교육부장관(그간 문교부, 교과부 등등 명칭이 수시로 바뀌었지만)은 교육의 '교'자를 조금 아는 정도의 정치인이나 대학교수, 심지어 경제부처 장관을 줄곧 임명해왔다.

교육부 차관이 장관으로 자체 승진한 것은 건국 후 이번 박근혜 정권에서 처음 이뤄졌다. 정말 놀라운 인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60여년 간 교육 현장을 잘 모르는 인사들이 장관을 맡다 보니, 교육 공무원들은 장관을 취임초부터 업신여기기까지 했다. 겉으론 “장관님, 장관님” 하며 극진히 모시는 척하다가도 뒤돌아서서는 장관에게 삿대질하는 이도 있었다.

장관이 비전문가인데다 임기가 1년 정도였으니 백년 앞을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할 수도 없었고, 설사 수립한다 해도 다음 장관은 새로운 계획으로 이전 계획을 덮어 버리니, 입시생들과 학부모들만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국민들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하는, 5년 장수의 교육부장관이 임명돼 ‘미래 창조형의 인재 양성’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과연 이번 정권에서 그런 기적이 탄생할 것인가.

오늘 아침 엘리베이터를 타니 얼굴이 부석부석한 학생이 있길래 “고 3인가?” 물었더니, “네”라는 짤막한 답이 왔다. 필자가 입시 지옥에서 해방된 지 벌써 40년(1973년 대학 입시)이 넘었으니 시험의 악몽에서 이제 벗어나고도 한참 되지만, 시험 시즌만 오면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콩닥거린다. 어릴 때 워낙 시험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필자가 부산 시내의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인 1964년 무렵만 해도 중학교 입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다. 소위 일류 중학교 합격권에 든 학생들은 쉬는 시간도 없다시피 하며 오후 늦게까지 교실에서 공부와 모의시험에 시달려야 했고, 수업을 마치면 주로 담임 선생님이나 학부형 집에서 밤 11시가 넘게까지 과외를 받았다.

철없이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이 매일 수용소 생활을 하다시피 하니 스트레스가 없을 리 없다. 밤 11시가 넘어 과외가 파하면, 당시 유일한 휴식처인 만화방으로 달려가 그림을 보는 둥 마는 둥 만화책을 넘기다가 귀가하면 통금 사이렌(자정)이 귓전을 때리곤 했다. 목표한 대로 일류 중학교엘 간다 하더라도 또 다시 일류 고등학교 합격이라는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으니 중 2부터는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청소년기를 교과서, 참고서와 씨름하다시피 했으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아픔이 가시지 않아 안색이 파리한 고3생과 마주치면 가슴이 저려온다. 하지만 이들 중 자신의 소질에 맞는 학과나 대학에 소신껏 진학하는 이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고3 가을,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S대 치과 대학 진학을 권했다. S대 합격생 한 명당 동창회에서 적지 않은 사례금을 담임 선생에게 준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선생님에게 당돌하게 “저는 문과 체질인데, 어떻게 학생의 진로를 함부로 바꾸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하고 문과대학을 지망했었다.

70세까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치과의사를 저버린 게 결코 후회는 안되지만, 당시 부모님들로부터 인생의 진로에 대한 상담을 받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다. 하기야 자식들 공부시키기에 힘드셨던 부모님들이 20, 30년 후에 어떤 직업이 좋을지 알 수가 없었으리라.

일제의 암울한 시기에도 인촌 김성수 선생(고려대학교, 동아일보 창설자)은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때는 가장 첨단을 달리는 곳이나, 아니면 가장 낙후된 곳을 찾아라. 성공 가능성은 그 곳에 많다”고 하셨으니 입시생들이나 학부형은 귀담아 들을만하다.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고 학부모들이 굳이 낙망할 이유 또한 없을 것이다.

1960년대 말 이후 세계 가전업계를 한동안 주름잡았던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생전에 자신에겐 3복이 있어 글로벌한 부자가 됐다고 회상했다. 그 3복이란 허약한 것, 못 배운 것, 그리고 가난한 것이었다고 한다. 허약했기 때문에 술, 담배를 못해 장수하게 됐고, 못 배웠기 때문에 자신보다 나은 인재를 등용했고, 가난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돈에 눈을 떠 이재에 밝았다고 한다.

작고 하찮은 일과 크고 위대한 성취는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 미국 대통령이 NASA를 방문했을 때 청소부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없이 “우주선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일이라도 자기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그가 바로 장차 큰 일을 해 낼 사람이다. 인구의 5%쯤 되는 인재들이 나머지 95%를 먹여 살린다고 한다.

30여일 후 수능 시험에서 상위 5%안에 들었다고 자만할 일이 아니요, 그 하위 95%에 속했다 하더라도 크게 실망할 일은 더욱 아닐 것이다.

김수인/홍보회사 KPR 미디어본부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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