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인물 알아보는 눈 가져야
상태바
큰 인물 알아보는 눈 가져야
  • 김수인 시빅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13.07.15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다보면 사람을 업신여길 때가 많지 않습니까. 특히 젊은 시절에는요. 학교 친구거나, 직장 동료라도 집이 못 살거나, 못 생겼거나, 행색이 초라하면, 일단 무시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조선조 초기 대학자인 한명회가 업신여김을 당한,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1392년 태조 이성계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지워준 이가 한상질이라는 학자로, 그의 손자가 한명회입니다. 7개월 만에 태어난 한명회는 부모가 갖다 버릴라 했을 정도로 작고 몰골도 이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밤낮으로 책을 손에 놓지 않아 학문의 깊이는 조선팔도에서 뛰어난 것으로 <세조실록> 등에 나와 있습니다.

공인 가문의 한명회는 음서(蔭敍)제도(양반가의 자제를 테스트 없이 벼슬길에 오르게 한 제도, 일종의 특혜)를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었지만 그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이라며 거절합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고, 권람이라는 친구의 장원급제를 도와 사헌부(지금의 감사원)의 국장자리에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쌀을 처가에서 얻어다 먹을 정도로 가난해 자식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 등, 생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권람의 설득으로 식구들을 위해 하는 수 없이 관직을 얻어 떠나간 나이가 37세. 그 관직이란 것도 지금은 있지도 않은 지방공무원 20급쯤 되는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송도(지금의 개성)의 경덕궁이라는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한명회가 그러한 하찮은 직업을 얻은 나이가 37세(지금으로 치면 50대 초중반)라면 상상도 안 갈 겁니다. 남산 밑 가을밤에 봇짐을 한 한명회는 부인과 식구들을 뒤로 한 채 홀로 떠나갑니다. 그때 그가 남긴 말이 <세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해옵니다.

“장부의 일생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법이다. 오늘의 처지를 보고 그의 내일을 평하지 말라. 사람에게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니 내 지금 경덕궁 직의 하찮은 신분으로 떠나가지만 높은 산의 푸른 소나무는 홀로 강인한 법, 오늘의 비참함을 절대 잊지 않고 돌아오리라.”

송도에 간 한명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하찮은 생활을 했는데, 마침 한양에서 송도로 관직을 하러온 졸장부들끼리 모여 ‘계(契)’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모임에 갈 때면 다소 높은 관직을 하고 있던 자가 한명회를 발길로 차며 “너 따위가 어딜 오느냐”며 쫓아내곤 했답니다. 그 설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처지를 보고 사람을 평하지 말라던 한명회는 그 말을 실현하게 됩니다. 한명회는 그 후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돌아왔고, 성종 때까지 모든 관직을 거치는 것은 물론 영의정, 좌의정 등 3번이나 재상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송도에서 계를 하던 한양 사람들이 땅을 치며 “왜 우리가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는가!”라며 통탄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 ‘진실되고 능력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리켜 ‘송도계원(松都契員)’같다’라는 4자성어가 생겨나게 됩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소리꾼으로 유명한 장사익 씨, 다들 아시죠? 그는 살아오면서 17개의 직업을 가졌는데, 그중 하나가 카센터 사무장입니다. 그는 카센터 사무장(말이 사무장이지 카센터 궂은 일을 도맡았음)을 1990년대 중반, 서울 논현동에서 했는데, 그 카센터의 사장이 제 친구의 동생이어서 그곳을 이용했고, 저는 그때 장사익 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행색이 초라했고, 심부름이나 청소를 마다하지 않는, 궁 문지기나 다름없는 신분이었죠. 만약 그때 그를 업신여겨 하대를 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면, 어찌 됐을까요. 소리꾼으로 출세한 지금, 제 전화를 깎듯이 받을 리가 없죠.

지난 6월말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국가주석이 박대통령을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은 보도를 통해 다 아실 것입니다. 극진한 대접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2005년 시진핑이 시안의 서기(우리나라로 치면 작은 도시의 당 간부)를 지내고 있을 무렵,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그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적당히 지방시찰을 보내는 등 전혀 예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보좌관이었던 구상찬(현 상하이 총영사)이 시진핑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박 대표와의 회동을 주선하게 됩니다.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며 중국 정계와의 친분을 원하고 있던 박 대표는 서울 63빌딩 백리향이라는 고급 중국음식점에 시진핑을 초대해 융숭한 대접해 보냈습니다. 시진핑이 그때 은혜를 잊지 않고, 이번에 신세를 갚은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문화부 장관은 영화감독 출신인 이창동 씨였습니다. 이창동 씨는 장관에 임명되기 전, 좋은 작품을 얻기 위해 충무로 영화사에 늘 죽치고 살았답니다. 영화사에는 영화인들 외, 영화담당 기자들도 자주 들락거렸습니다. 어느 비오는 날 기자들이 술판을 벌이다 술이 떨어지자 옆에 있는 이창동 씨에게 “어이, 거기 소주 몇 병하고 오징어 좀 사와~”했더랍니다.

몇 년 후 이창동 씨가 장관이 됐을 때, 그 기자들의 얼굴색이 어떻게 변했을지 뻔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겉으로 판단해 나중 얼굴을 붉히는 ‘송도계원’이 절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늦게 세상의 반열에 오르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알아주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실하게 보여주며 살아야겠습니다.

*김수인 시빅뉴스 객원 칼럼리스트: 현 홍보회사 KPR 미디어 본부장/ 매일경제-서울신문 기자,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부국장 역임 /2009년 수필가 등단/ 저서 <IMF는 야구도 못말려(1997년, 중앙 M&B)>.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