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나 물어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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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나 물어가라지
  • 양산시 이창호
  • 승인 2013.07.1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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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면, 단 한 구절만 기억해도 잘한 일이라고 한다. 이번에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읽었다. 기억나는 구절은 단 한 마디다. “악마나 물어가라지.” 삐딱한 것 같으나 정면으로 세상을 맞서는 조르바의 당당한 패기와 기상이 가장 잘 드러난 한 마디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게 참 맘에 들지 않는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시간’이다. 나는 그리스 식의 원제가 더 맘에 든다. 그에게 ‘그리스인’이라는 딱지는 무릎 위를 수놓은 흉터 자국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칭호다.

조르바는 결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그는 한때 조국을 사랑했다. 그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신물이 올라오고 토가 솟구칠 때까지" 조국을 사랑했기에, 그는 더 이상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조르바는 조국이란 이상 때문에 벌인 과거의 잔인하고도 용맹스러운 행동들과 함께 애국심을 인생길 저 언저리에 던져놓고 왔다.

그는 짐승과도 가까운 언행을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태도가 적나라한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철저하게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는 영혼도 몸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실체라고 생각한다. 먹고, 자고, 일하며, 노는 사람의 욕망과 행동력 없인 영혼도 마음도 모두 헛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거침없이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그는 모든 것에 열정이 넘친다. 먹을 땐, 정말 누가 잡아가도 모를 것처럼 열심히 먹는다. 일을 할 땐, 돌격부대의 선봉장만큼이나 용맹하다. 여자 앞에선 끓어오르는 뜨거운 가슴 속 용암을 시와 노래, 춤으로 승화시킨다. 기쁘면 춤을 추고, 슬프면 땅을 치며 눈물을 토해낸다. 그에겐 매일매일 뜨고 지는 해와 달이 항상 새롭다. 그에게 인생은 기적의 나날이다. 철저하게 감정적이고, 철저하게 순박한 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인생의 진리를 행동으로 밝혀냈다.

그런 그가 보스라며 따르는 이가 있다. 소설 속 화자이다. 조르바가 보스라며 따르는 화자는 조르바와 철저히 대비되는 사람이다. 그는 부처를 ‘최후의 인간’이라 여기며, 부처가 걸었던 금욕주의와 해탈의 길을 찾아 영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의 친구는 그를 항상 ‘책벌레’라고 부른다. 종이와 잉크에 파묻혀 삶의 대부분을 보내온 화자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봄날의 해안가 모래처럼 고요한 품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인생을 행동으로 개척하기보단 책과 사색을 통해 연마해온 인물이다. 책, 원고, 펜, 이 세 가지가 그의 삶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조르바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사연으로 삶을 가득 채웠다면, 화자는 반대로 책, 사색, 글쓰기로 삶을 깨끗하게 유지해왔다고 볼 수 있겠다.

소설에서 화자와 조르바는 마치 정신과 몸을 나누어놓은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구성하는 두 요소를 극명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엔 인간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조르바는 실제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났던 인물, 기오르고스 조르바란 인물에서 따온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실제로 어느 섬에서 광산 일을 했던 적이 있는데, 작가는 그 시절 만났던 인물인 조르바에게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많은 영항을 준 인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를 꼽았다. 그는 조르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만약 힌두교에서 말하는 ‘구루’나 수도승들이 말하는 ‘아버지’의 길잡이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그만큼 카잔차키스에게 조르바는 각별한 인물이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조르바의 모습은 순수한 인간 본연의 모습 그 자체이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과 거침없이 몸과 마음이 시키는 길을 헤치고 나가는 그의 모습은 스스로가 삶을 쥐고 흔들며 선도하는 주체적인 삶이 어떤지를 잘 보여준다.

많은 생각과 고민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구름을 뚫고 비추는 한줄기 빛처럼 눈부신 작품이라 얘기해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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