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범죄 피해자 인권은 우리가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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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범죄 피해자 인권은 우리가 지킨다”
  • 취재기자 조나리
  • 승인 2013.06.04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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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센터 '햇살', 사건 현장 정리서 법정 모니터까지

지난 31일 부산지방법원 제 352호 법정. 한 폭행 사건에 대한 사실 심리 공판이 열렸다. 

“검사 측, 사건 개요 말씀해주세요.” 판사의 말이 시작되자 법정 내에 약간의 긴장감이 돌았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몇몇 사람들이 일제히 펜을 들고 재판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진행되는 재판 속에 그들은 판, 검사의 질문과 피고인의 대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바삐 손을 움직였다.

재판이 끝나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재판장에서 나와 문 앞에 붙어있던 재판 일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신의 노트를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다. 짧은 재판이었지만 그들의 노트는 휘갈겨 쓴 글씨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기자도, 법정 서기도 아닌데 메모에 열중하던 특이한 방청객들은 법정을 나선 후에야 긴장이 풀린 듯 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들의 정체는 바로 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햇살'의 인권지킴이단이다.

 

▲ 인권지킴이단. 왼쪽부터 좌은비, 백정훈, 손현태 씨(사진: 취재기자 조나리).

 

범죄 피해자를 돕기 위한 시민단체는 전국에 58개가 있다. 그 중 하나인 사단법인 햇살은 부산 지역의 강력범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2005년 창립됐다. 햇살에서는 의료비 지원과 법정자문, 심리 치료 등 범죄 피해자를 돕기 위한 모든 활동이 원스텝으로 이뤄지고 있다. , 학교폭력과 성폭력 예방을 위해 부산 내 중고등학교에서 인권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햇살은 법무부와 부산시, 일반 시민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며, 현직 법조인, 의료진, 상담전문가들을 전문위원으로 두고 협력하고 있다.

햇살은 매년 상하반기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양성교육을 실시한 뒤, 이들을 인권지킴이단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휘하고 있다. 대부분 인권지킴이단은 로스쿨을 준비하는 법대생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권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대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햇살에 상근하는 인원이 3명이라 부산 지역 전체 범죄 사건을 감당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었지만, 인권지킴이 70여 명이 햇살의 손과 발이 되어 다양한 지원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 인권지킴이단이 쓴 재판 내용은 햇살에 전달된 뒤, 여러 사람의 기록을 조합해 재판에 참석하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알려진다. 사정이 있어 법정에 오기 힘들거나 피고인의 얼굴을 보는 것을 꺼려하는 피해자들은 이를 통해 재판 결과를 알 수 있고, 혹 피고인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진술했을 경우에는 햇살 법률 자문단의 도움을 받아 항소할 수 있다.

좌은비, 백정훈, 손현태 씨는 햇살의 인권지킴이단의 일원이다. 그들이 이렇게 특별한 봉사활동을 시작한 지도 수 년 째. 법학도로서 법정 모니터가 법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게 된 것이 이제는 ‘베테랑 봉사꾼’이 됐다.

인권지킴이단은 법정 모니터 활동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백정훈 씨는 “일반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법률 용어를 알아듣기 힘들다. 특히, 피해자가 장애인일 경우에는 법정에 오기조차 힘든데, 내가 공부한 지식으로 피해자들을 도울 수 있어서 굉장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좌은비 씨는 이 활동을 하며 스스로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면서는 법을 평면적이고 객관적으로만 받아들였는데, 법정 모니터를 하면서 사건이 생생하게 다가왔고 피해자들의 어려움도 헤아릴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법조인으로 일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들의 색다른 행보는 사건 현장까지 이어진다. 깨진 유리 조각을 정리하는 단순 강도 사건 현장부터 참혹한 살인사건 현장까지,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 피해자의 주거지이기 때문에 다시 범행의 악몽을 마주해야만 하는 피해자들을 위해 햇살과 인권지킴이단이 직접 발 벗고 나선 것이다.

 

▲ 인권지킴이단이 사건 현장을 정리하고 있다(출처: 햇살 홈페이지).

 

범죄 현장을 정리하며 생긴 에피소드도 많다. 폭탄이 터졌던 현장에는 철문이 천장에 박혀 있는가 하면 사람의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있었다고 한다. 좌은비 씨는 범행 장소에서 피에 구더기가 마구 엉겨있는 모습을 보고 ‘참깨’가 연상돼 그 사건 후로는 ‘참깨라면’을 못 먹는다는 웃지 못 할 얘기도 털어놓았다.

남들이 꺼려할 현장 정리에 더 마음이 간다는 손현태 씨는 “TV나 영화에서는 핏자국 정도인데 실제로 가보면 끔찍하다”며 “햇살이라는 단체를 알고 요청해 오시는 분들도 많지만 몰라서 피해자 본인이 직접 현장을 정리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고 전했다.

햇살의 사무국장 이지연 씨는  “보통 사람들은 범인이 잡히고 형이 선고되면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하나의 범죄로 한 가정이 무너지는 경우도 많다”며 "멘토링을 통해 밝아진 피해 청소년들을 만나고, 감사의 인사를 들을 때마다 그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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