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 격려 편지로 해직의 아픔을 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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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격려 편지로 해직의 아픔을 딛고..
  • 취재기자 이창호
  • 승인 2013.05.14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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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전 대전중 3학년 7반 담임, 학생들의 사제지정 반세기

조신형 할아버지(83)는 '해직 교사의 원조'다. 대전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재직 중이던 52년전, 군사 정권에 의한 병역 미필 공직자 무조건 퇴출 조치에 따라 직장을 잃었다.  그후 임시 강사, 복직 등을 거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조 할아버지. 그에겐 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물 1호가 있다. 바로 정든 학교를 떠날 당시 까까머리 제자들이 만들어준 손편지 묶음 책자다. <파간(波間)에 흘러 간 추억>이란 고풍스런 제목의 이 손편지 책자는 조 할아버지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힘들 때마다 펼쳐보았던 삶의 반려였다.

1961년 조신형 씨가 대전 중학교 3학년 7반 담임 선생을 맡던 때의 일이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한 달 뒤인 그해 6월,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해직 통보였다. 당시 군부 정권은 군 복무를 안 한 공무원들을 일괄적으로 모두 해직시켰다. 조 씨는 고등학생 시절 자전거를 타다가 팔을 심하게 다쳐 장애 판정을 받았고, 이에 따라 군 소집이 면제됐지만, 그런 예외가 인정되지 않았다.

조 할아버지는 “참으로 막막했지...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데, 모아 둔 재산은 없고. 어떡해야 할지, 참  걱정이 태산이었지”라며 당시의 암담한 심정을 회상했다.

그는 3학년 7반 담임을 맡은 지 불과 4개월밖에 안된 시점에서 허망하게 제자들과 뜻하지 않은 이별을 고해야 했다. 실의에 빠져 술로 마음을 달래던 어느 날, 그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뜻밖의 선물을 건넸다. 자신이 담임했던 반 학생 60명 전원이 일일이 손편지를 써서 그것을 끈으로 묶은 책자였다.

맨 앞 장에 적힌 그 책 제목은 <파간(波間)에 흘러 간 추억>.  '파간'은 물결과 물결 사이 이랑을 말한다. 짧지만 애틋한 인연을 노래할 때 쓰이는 시어다.

당시 반장이었던 정재홍(68, 현 대전시 구봉신협 이사장)  씨는 “조 선생님은 인정이 많으시고, 성품이 온화하셨으며, 제자를 끔찍이 사랑하셨지요.  당시 병역미필자라면 무조건 다 해고를 시켜버린 조치는  가혹했어요. 우리들은 선생님을 그냥 떠나보내기가 너무 안타까워 다 함께 각자 한 편 씩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책자로 만들자고 의견을 모은 뒤 그것을 실행했지요”라고 당시 배경을 설명했다.

정 이사장은 "선생님과의 만남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애틋했다는 의미에서 <파간에 흘러간 추억>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30대 청년이었던 조 씨는 제자들이 써준 글을 읽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북돋웠다. 그후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 준 것은 바로 제자들의 편지였다. 조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 아직도 그 책을 볼 때마다 그 제자들이 참 기특하고 소중하게 느낀다네”라고 말한다.

몇 년 전 선생님과 재회한 제자 정재홍 이사장은 선생님이 그 동안 가보처럼 간직했던 책자를 빌려 복사본을 만들고 자신도 가보처럼 모시기로 했다. 정 이사장은 “당시에 선생님이 저희들의 편지가 큰 힘이 되셨다고 해 저희도 참 기뻤어요”라고 말했다.

제자들이 일일이 편지를 썼고, 이를 모아 책으로 묶은 다음, 정 씨는 책의 표지와 머리말을 자신이 썼다고 했다.

<파간에 흘러 간 추억>에는 조 교사를 향한 제자들의 사랑과 존경심이 듬뿍 담겨 있다. 한 학생은 편지에 “선생님의(이) 학교를 떠나면(떠나지 않으면) 아니 된단 이야기를 듣고, 저는 눈물이 핑 돌아 나옴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마지막 종례 시간, 앞날이 막연하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 저 또한 한숨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이별의 아쉬움을 적었다.

또 다른 한 제자는 “훌훌히 떠나신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이 흐뭇히 추겨진 어두운 허공에 떠오릅니다”라고 썼고 “비록 몸은 떨어져도 제 생각은 선생님의 곁에 있습니다”라고 적어 선생님을 향한 사랑을 절절히 표현한 대목도 있다.

무엇보다도, 편지 내용엔 선생님의 앞날을 위해 기원하는 제자들의 애틋한 바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 제자는 “선생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어와요”라고 적었고, 다른 제자는 “선생님은 지금을 불행하다 하시되, 비관은 안 하시겠지요. 선생님, 불행 없이 행복은 안 오는 거니까요”라고 적은 사연도 있었다.

▲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나침반을 잃고 항해하는 조각배처럼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를 개척하시어 꿋꿋이 살아가신다면, 제자로서 더한 영광이 없겠습니다”라는 머리말을 가진 손 편지 책자 ‘파간에 흘러 간 추억’ 표지와 한 장의 편지 모습(사진 정재홍 구봉신협 이사장 제공).

그는 교직에서 쫓겨난 뒤, 새로 생긴 사립학교에서 임시 강사로 일했다. 당시 봉급은 일반 교사들의 1/3이었으며, 그는 “1년을 일하면 그대로 잘리는 신세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직업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3년 뒤, 정부의 방침이 바뀌어 일괄적으로 해직된 공무원들을 다시 복직시켜야한다는 방침이 들어서면서,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해직자들에게도 교사 임용고시에 응할 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시험 경쟁률이 무려 30대1, 아주 치열했다고 한다. 만약 그 시험에서 떨어진다면, 그는 영영 교직에 다시 서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는 시험 준비 기간 내내 제자들의 손편지를 어루만지고 읽으며 공부에 매진했고, 무사히 교직에 복직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정재홍 씨가 운영하는 ‘일본어 무료 강습 교실’에서 정 씨의 부탁으로 무료 특별 강의를 하고 있는 조신형 씨(중앙)의 모습(사진: 정재홍 구봉신협 이사장 제공).

조 할아버지는 "그렇게 어렵게 교직을 다시 찾고 나니, 누구보다 교직을 소중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교직에 헌신한 결과, 복직 이후 수학 교과서 검토위원 등 문교부 교과서 관련 위원을 지냈고, 교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엔 학교 경영 우수상도 두 번이나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 못 하는 언어 장애 학생들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을 실행해서 1981년에는 언어 장애 교정의 최우수 사례로 선정되어, 전국 유수의 교육 관계자들 앞에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

또한 조 씨는 현직 교사 시절, 자신이 만나는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배고픈 학생들에게 자신의 봉급을 축내 점심을 사주기도 했고, 사정이 딱한 학생을 집에서 같이 먹이고 재우며 가르친 적도 있다.

조 씨는 해직 시절 3년간의 힘겨운 생활,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찾은 교직을 열성적으로 이어나가게 된 데엔 그 시절, 자신에게 손편지를 선물해 준 제자들의 힘이 컸다고 믿고 있다. 그는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많은 교육 기관에서 특별한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해직되고 힘들던 시절에 나에게 힘이 되어준 대전중 3학년 제자들이 기특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라고 했다.

이렇듯 조 씨가 다시 교직을 찾는데 힘이 된 그 시절 제자들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명망 있는 인물들이 되어 있다. 당시 손편지를 쓴 3학년 7반 제자들 중에는 교수, 병원장, 대기업 임원이 다수 있고, 다른 반이었지만, 수학 과목을 직접 배운 제자로는 강창희 현 국회의장과 고현철 전 대법관이 있다. 조 할아버지는 “제자들이 그렇게 성공했다는 것이 참 뿌듯하고 기특하다”라고 말했다.

팔순의 조 할아버지와 이제 고희를 바라보는 3학년 7반 제자들은 지금도 서로 가끔씩 연락하고 만나며 지낸다고 정재홍 씨는 전했다.

조 할아버지는 “교직이라는 건 참으로 뜻 깊은 직업이지요. 교단이 아닌, 다른 직장생활에선 느낄 수 없는 사제지간의 뿌듯하고 따뜻한 경험이 있어요. 요즘 교사 중엔 ‘내가 선생질이나 하고 있다니’라며 자괴심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아요.  자기 업에 충실하고 성심을 다한다면, 보람 찬 인생을 꾸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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