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나의 천직, 가르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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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나의 천직, 가르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 취재기자 이승주
  • 승인 2016.12.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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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아동센터 비정규직 교사로 다시 교단에 선 해직교사 김옥희 씨의 '거위의 꿈' / 이승주 기자

지역아동센터란 저소득층·소외 계층 아이들에게 지자체들이 공부시켜 주고 급식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동복지교사는 적은 임금에다 1년마다 모집에 응해야 하는 비정규직이다.  아이들을 주 5일 동안 5시간씩 가르치며 시급 7,000원 정도에 일하려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데 사실상 자원봉사에 가까운 이 일을 고임금을 포기하면서까지 10년 동안 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김옥희(54) 씨다.

김 교사는 1963년 9월 30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러나 5세 때 아버지가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던 중 오른손을 다쳐 손을 못 쓰게 된 후 부산으로 내려왔고, 아버지의 막노동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어려운 집안 형편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언니는 초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산업전선에 뛰어 들었다. 셋째인 오빠와 막내인 자신만 언니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김 교사는 “저랑 아홉 살,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들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학교도 못 다니고 평생 배울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언니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그는 부전초등(국민)학교, 광무여중, 부산진여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첫째 언니, 오빠와 함께 찍은 사진, 언니는 김옥희 씨에게 항상 고마운 존재였다(사진: 김옥희 씨 제공).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에겐 꿈이 생겼다. 바로 교사였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친구들이 동생을 가진 것이 부러웠던 그는 평소 동생이 있는 친구 집에 많이 놀러가 어울려 놀거나  맞벌이 나간 이웃집 동생들을 돌봐주는 것이 좋았다. 그는 아이들과 공감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그의 앞에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장벽이 있었다.

1982년 고등학교 졸업한 그는 대학 학력고사를 잠시 미루고 학비를 벌기로 했다. 낮에는 한 달에 8만~10만 원을 받으며 사무실에서 장부정리, 옷 가게 점원 등으로 학비를 벌었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결국 1년 뒤 신라대학교 사범학부 국어교육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힘든 것도 모르고 내 꿈을 위해 달려갔지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책값을 벌기 위해 고무공장에 취업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남편도 만날 수 없었을 거예요”라고 덧붙이며 미소를 지었다.

대학 시절도 험난했다. 4년 내내 알바와 근로장학생으로 어렵게 공부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 대로 야간 중학교 아이들에게 국어 과목을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하면서 교사의 꿈을 계속 지펴 나갔다. 그리고 1987년 2월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그녀는 사하구 신평에 있는 주야간 산업체 고등학교 국어 정교사로 임용되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된 것. 1987년 취업해 한 달 70만~80만 원이라는 당시로선 많은 임금을 받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이 실현된 것에 감사한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1990년 전교조에 가입했던 김 교사는 이사장의 부정부패를 항의하는 양심선언에 가담해 학교 측에 미움을 받게 됐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이유이지만, 기혼자라는 억지 명분으로 강제 퇴직당했던 것.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결혼식을 12월에 올리고 바로 다음 해 2월에 잘렸을 때 충격이 컸죠.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라며 아픈 기억을 회상했다. 이후 그녀는 보습학원 교사로 2~3년간 근무했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아예 학원도 그만두고 살림에 전념했다.

고등학교 교사시절 학생들과 함께 시화전을 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사진: 김옥희 씨 제공)

집에서 살림하던 김 교사는 몇 년 후 강제 퇴직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교직 복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복귀하지 않았다. 자신의 꿈은 아이들과 공감하고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교사였는데, 부조리가 만연한 그 사립 학교로 되돌아 가는 건 자신의 꿈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욕구는 버릴 수 없었다. “내 꿈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늦은 나이일지 몰라도 다시 도전해 보고 싶었죠.”

그는 당시 초등학교 교원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교육대학에 다시 입학하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입시학원에도 다닐 수 없었고 애들도 돌봐야 했던 처지라 입시에 실패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잘 할 수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후 한우리 독서논술클럽이라는 회사의 독서논술지도사가 됐다.

그는 2001년부터 집에서 과외 방식으로 초, 중, 고 학생을 대상으로 독서논술지도를 했다. 가르치는 데 필요해서 한자자격증을 2급을 따내기도 했다. 수입도 크게 늘었다. 한달 평균 400만~500만 원을 벌었던 것.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집에서 늦게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일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는 “일과 가정이 분리되어야 하는데 같이 하니까 가족들에게 미안했어요. 또 노안이 오면서 책을 집중해서 볼 수가 없었죠. 터닝포인트가 필요했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살리며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지역아동센터의 아동복지교사란 제도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동복지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사회복지사 공부를 시작했다. 낮에는 독서논술지도사로, 밤에는 사이버대학 사회복지사 과정을 공부했다. 그는 “나도 어려운 가정에서 힘들게 공부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년의 공부 끝에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임금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2006년 독서논술지도사를 그만둔 뒤 2007년, 그녀는 모든 자격을 갖추고 지역아동센터 아동복지교사로 임용됐다. 월 80만 원의 저임금에 1년마다 재계약해야 하는 비정규직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살아오면서 공부한 것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뿌듯하죠.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라며 웃었다. 그렇게 그는 10년 동안 꾸준히 아동복지교사를 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는 그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소외계층이나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도 그와 함께 있을 땐 밝은 표정이었다.  아이들은 김 씨를 어머니 같이 따르고 좋아했다. 한 아이는 “선생님 내년에도 우리랑 같이 있어요” 하고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단순히 공부만 가르치기는 게 아니라 부모처럼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또 다른 아이는 “저도 김 선생님처럼 나중에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에요”라고 외쳤다.

해운대구 좌동에 위치한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이 웃으며 뛰놀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이승주).
아이들을 지도하는 김옥희 씨의 모습. 김씨와 함께라면 아이들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사진: 취재기자 이승주).

김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직 제 인생의 절반밖에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남은 반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아동복지교사는 꾸준히 하고 싶어요.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묻고 따지지 않고 응원해  준 가족들에게도 감사해요."

생각해 보면, 김 씨를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보내게 하는 힘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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