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 꽃보다 멋진 재단사 여용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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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 꽃보다 멋진 재단사 여용기 씨
  • 취재기자 안승하
  • 승인 2016.12.08 16:4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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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에 입문해 이순 넘겨서도 현업...'기성복 바람' 뚫고 젊은 유행 선도해 SNS 스타로 / 안승하 기자

부산시 중구 남포동에 있는 한 양복점. 하얀 수염에 머리카락이 희끗한 노신사가 양 손에 줄자를 들고 정장을 맞추러 온 손님의 치수를 잰다. 곧이어 그는 커다란 테이블에 양복감을 깔고 바늘과 실을 무기 삼아 작업에 나선다. 깔끔하게 차려 입은 캐주얼한 정장이 잘 어울린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멋이 흐르는 이 노신사가 여용기(64) 씨다.

편집숍 ‘에르디토(Eredito)’의 마스터 테일러 여용기 씨(사진: 취재기자 안승하).

‘남포동의 닉 우스터’라고 불릴 만큼 옷 잘 입는 할아버지로 소문난 여 씨는 편집숍 ‘에르디토(Eredito)’의 마스터 테일러(재단사)다. 19세부터 광복동에서 당시 의류 패턴 전문가인 김범두 선생 밑에서 재단을 배운 그는 24세에 한 양복점에서 재단사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29세에 광복동에 ‘모모양복점’을 개업해 어엿한 양복점 사장이 됐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양복을 좋아했고, 양복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는 “그때 하루에 양복을 다섯 벌이나 만들었다”며 “내가 만든 양복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여 씨의 양복점은 1980년대 중반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기성복이 양복 시장의 대세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맞춤옷에 비해 값이 쌀 뿐 아니라 그 자리에서 입고 나설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맞춤 양복점이 사양길을 걷게 된 것. 손님들은 더 이상 그의 가게를 찾지 않자 결국 그는 가게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밀려오는 기성복 시장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며 “옷이 안 팔린다면 새로운 시도를 했어야 했는데 미숙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양복점 문을 닫고 29년 동안 건설업, 주차요원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지인이자 마스터 테일러인 양창선 씨로부터 재단 일을 다시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양 씨는 재단사 일을 하며 오랫동안 여 씨와 친하게 지냈고, 여 씨의 ‘모모양복점’ 옆에 ‘코코양복점’을 나란히 개업하기도 한 사이. 그는 마음을 다잡고 재단사로 복귀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좋아하던 바늘과 실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용기 씨가 테일러로 있는 편집숍 ‘에르디토(Eredito)’ 가게 안에는 그의 감각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사진: 취재기자 안승하).
여용기 씨가 테일러로 있는 편집숍 ‘에르디토(Eredito)’ 가게 안에 전시된 맞춤 양복들(사진: 취재기자 안승하).

다시 시작한 재단사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겉옷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옷들을 입고 다니고, 바지는 기장이 짧았다”며 “이런 옷을 입으려고 양복점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우선 길거리의 젊은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를 살폈다. 젊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잡지도 찾아봤다. 그는 “옷 시장의 흐름를 살펴보고 유행하거나 새로운 옷은 직접 입어보기도 했다”고 밝혔다.

여용기 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안승하).

고집을 버리고 새롭게 변화한 여 씨는 젊은 감각의 맞춤 정장을 선보이는 편집숍 ‘에르디토’에서 일하고 있다. 그가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상에서도 단정하고 감각적인 옷을 입는다. 언제나 옷에 구김이 가지 않게 매무새를 다듬는 게 습관이 됐다. 그는 “내가 옷을 만드니까 더욱 옷을 잘 입어야 한다”며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또한, 멋진 옷을 입으려면 몸매 관리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구덕산을 2시간 동안 오르내린다. 그는 “오빠와 아저씨는 한 끗 차이”라며 웃었다. 

여용기 씨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사진: 여용기 씨 인스타그램 캡쳐).

이제 이 노신사는 젊은 사람들의 유행을 이끌고 있다. ‘옷 잘 입는 할아버지’로 인기를 끈 그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4만이 넘는 SNS 스타다. 그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 옷 정보를 묻는 연락이 자주 온다. SNS를 통해 그를 알게 된 젊은이들의 방문도 늘었다. 최근에는 강원도에서 옷을 맞추기 위해 내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는 “딸이 아버지의 옷을 맞춘다고 나란히 손을 잡고 왔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용기 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안승하).

누구나 변화를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지금의 안정된 생활에 안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여용기 씨는 달랐다.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며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단지 ‘옷 잘 입는 할아버지’가 아닌 옷 하나에 테일러의 땀과 노력이 깃든 ‘멋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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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주맘 2016-12-24 21:29:37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에요.
정말 진정한 멋쟁이중의 멋쟁이인것같아요. 앞으로도 이런모습 기대할게요.

삼공주맘 2016-12-20 20:40:26
여용기님 너무 멋져요.인터뷰 기사로 더 가까이 뵐수 있어서 반갑네요.끝없는 변화의 노력과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이 귀감이 됩니다인터뷰 잘 써주셔서 감사해요.수고 많으셨습니다.

쭈긍 2016-12-20 10:28:38
헐,, 여용기 할아버지 너무 멋있어서 인스타그램 팔로우까지 하고 항상 지켜봤어용 >_< 인터뷰 기사 넘넘 잘봤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