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봐야 뽕을 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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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봐야 뽕을 따지!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6.05.0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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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빅뉴스 대표 정태철

1985년 1월은 나의 미국 유학시절 ‘제1과 제1장’이 시작된 때였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던 미국 대학의 석사과정 수업을 힘겹게 따라가고 있던 나는 어느 날 한 미국인을 우연히 만났다. 그날, 나는 학생회관에서 일찍 저녁 식사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야간 수업 예습 중이었다. 그때 어느 중년의 미국인이 “지금 몇 시입니까?” 하고 서툰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 분은 팻 도노반 박사였다. 그가 내게 붙인 한국말은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어 문장 중 하나였다. 그는 17세 때 한국전에 참전했다. 조크를 즐겼던 낙천가인 그는 수시로 “내가 너(필자)보다 한국 땅을 먼저 밟은 사람이야”라면서 내 앞에서 유세를 부렸다. 그는 한국전 때 경험한 한국 사람들의 깊은 정과 묵은 김치 맛을 못 잊어 했다. 그 영향인지, 그는 사막에 물병 하나 달랑 들고 던져진 신세 같은 한국 유학생인 나를 1989년 박사학위 받고 귀국할 때까지 극진히 돌봐줬다. 그는 나에게 미국 문화의 안내자였으며 학생인 나의 멘토였다. 그는 한국전 때 맛 봤던 김치 맛이 그리울 때마다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 대가는 아니었겠지만, 그는 수시로 나의 영어 리포트와 석박사 학위논문을 유학 시절 5년간 순전히 우정으로 무료 교정해 주었다. 그는 내 유학생활의 은인이었다.

그는 미국 메릴랜드 대학 영국 런던 분교의 사회학과 교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무용가였던 아내가 있었고,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어느 날 아내가 마약에 빠져 중독자가 됐고, 마약 값을 조달하기 위해 아내가 남편 몰래 예금에 손을 댄 게 드러나면서, 그는 아내와 이혼하게 됐고, 가진 것을 다 잃게 됐다. 무언가 인생의 전기가 필요했던 그는 대책 없이 그가 대학 시절을 보냈던 미국 미주리 주립대학이 있는 컬럼비아 시로 돌아와 교수직을 알아보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나와 정확하게 20년 차이인 50세였다.

그는 여러 면에서 나와 대화가 잘 통했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는 아내와의 뼈아픈 이혼 트라우마 때문에 결혼을 아예 생각지도 않는 미국의 전형적인 싱글이었고, 나는 힘든 미국 유학 중임에도 갓 결혼해서 아내와 같이 달콤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국은 독신이 희귀한 때였다. 그런 나에게 미국 독신주의자 팻은 매우 신기한 ‘문화쇼크’였다.

팻으로부터 내가 목격한 미국 싱글의 전모(全貌)는 자유 그 자체였다. 그의 집 거실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책들이 여기저기 산더미처럼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고, 그 책 더미 사이사이로 재떨이가 무려 10개가 넘게 거실 구석구석에 널려 있었다. 애연가였던 그는 이리 누워도 재떨이가 있고 저리 누워도 재떨이가 있는 ‘재떨이 유비쿼터스(편재: 遍在)’ 거실을 만들어 놓았다. 싱크대에 음식 찌꺼기가 묻은 접시가 수북이 쌓여 있어도, 그는 도무지 설거지할 뜻이 없었다. 손님에게 과일이라도 대접할 상황이 오면, 그는 싱크대에서 음식 묻은 접시 하나를 집어서 뒤집은 다음, 그 접시 뒷면을 물로 씻은 후, 그 위에 과일을 올려서 가져 왔다. 그래도 그 누구 하나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사람도 없고 간섭할 사람도 없었다. 그의 삶은 결혼이란 가족제도의 질곡으로부터 완벽하게 초월한 듯해서 일면 내 눈에는 ‘위대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애인, 말하자면 섹스 파트너가 항상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가 가진 독신자들에 대한 금욕적 이미지와 미국 싱글 라이프는 거리가 멀었다. 팻은 미국에는 싱글들만 모이는 싱글바가 지천이라고 말했다. 싱글바에는 같은 목적을 가진 남녀가 모이게 마련이므로, ‘원나잇 스탠드’는 언제든지 ‘어베일러블(available)’하다고 그는 의기양양했다. 요즘은 한국도 싱글이나 ‘돌싱’들이 넘쳐나니까, 대도시 유흥지 어디엔가는 이런 신인류들을 상대로 돈 벌려는 비즈니스 맨들이 싱글바를 이미 스타트업(창업)했지 않았을까? 그의 말로는 미국 싱글들은 결혼한 사람들보다 더 왕성한 성생활을 즐긴다는 과학적 통계도 있다는 거였다.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 싱글들도 사람인지라 하룻밤 사랑에 정이 들면, 둘의 관계가 며칠 혹은 몇 달 이상으로 이어지면서 진짜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팻도 나와 같이 했던 5년 간, 애인이 없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팻과 그의 여자 친구는 각자의 처소를 오가며 부부처럼 지냈지만 절대로 결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헤어지고 다른 애인으로 바뀌고 하는 일이 반복됐다. 내가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결혼하지 왜 헤어지냐고. 그의 대답은 “구속은 싫어!” 딱 이 말 한 마디였다. 그는 미국 싱글들이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서 오래 동거하다가도, 어느 하나가 결혼하자고 하고 다른 하나가 결혼을 원치 않으면, 그게 동거의 종말이라고 했다.

'수잔'이라는 심리학과 박사과정 여성이 내 기억에는 가장 오랜 기간 팻의 애인이었다. 나하고 셋이 만나 맥주도 가끔 한 잔 했고, 우리 집에 둘이 놀러 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대판 싸웠고, 수잔은 짐을 싸서 거처를 옮기고 말았다. 수잔은 결혼을 원했으며, 팻은 ‘당연히’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남이 됐다. 

▲ 유학 시절, 팻 도노반과 그의 친구 재즈 기타리스트 라일 해리스가 우리 집을 방문해서 조촐한 한식 파티를 가졌다. 왼쪽이 나와 아내이고, 오른쪽 두 사람 중 벽 쪽이 팻이고 앞 쪽 흰 수염을 가진 이가 라일이다. 라일은 그 마을 최고 유명 재즈 음악가였고, 역시 싱글이었으며, Murry's라는 재즈바에서 주말마다 재즈 기타를 연주했다. 물론 나와 팻은 그의 음악을 들으러 자주 머리스에 갔다. 라일은 괄괄한 팻과 달리 참 점잖은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몇 년 전 암으로 숨졌다.

1989년 5월, 나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됐다. 미국 출국 날, 나는 팻에게 전화해서 공항으로 곧 출발한다고 하자, 팻이 쏜살같이 차를 몰아 내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옆에 있던 아내도 같이 울었다. 한 10분 이상을 그렇게 셋이 울었나 보다. 그래도 그의 울음이 멈추지 않았고, 그는 잘 가라는 말 한마디도 내게 하지 못한 채, 우리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나중에 귀국 후, 왜 당신은 그날 그렇게 이별의 말도 못하고 울었냐고 편지로 물었다. 그는 내가 떠난 후에 밀려올 ‘외로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일생에 두 번 다시 나를 못 만날 것 같은 ‘안타까움’에 말이 안 나왔다고 했다. 자유 천국을 구가하던 천하의 미국 싱글이 외롭다는 말을 하다니. 그리고 내가 그의 친자식이었다면, 그가 과연 나를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안타까움에 울었다는 말을 했을까? 이후로 나는 결혼이란 것은 결국 죽는 날까지 곁에 있어 외롭지 않을 배우자와, 못 만날까 애태우지 않는 자식이라는 ‘영원한 동반자’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2002년, 나는 안식년을 맞아 가족을 이끌고 다시 컬럼비아에서 방문교수로 1년을 체류하게 됐다. 도착 즉시, 나는 팻과 감격의 해후를 했고 유학시절 이 세상에 없었던 중학교 2학년인 큰 아이와 초등학교 4학년인 작은 아이를 팻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팻은 유독 내 아이들을 예뻐했으며, 나는 그 연유를 알기에 흐뭇하면서도 씁쓸했다. 그때 내 나이가 47세,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어느새 모든 손발 마디가 쑤시는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노인네가 되어 있었다. 애인도 다 떨어져 나가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류머티즘 관절염 소식을 안식년 출국 전에 듣고, 나는 친구 한의사로부터 한약 스무 첩을 한국에서 정성스레 지어서 미국 도착 후 팻에게 복용시켰다. 초기에 차도가 조금 있는 듯했으나, 퉁퉁 부어오른 그의 손발 마디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해 비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나와 팻은 비 탓인지 조금 감상적인 분위기에 싸여 인생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때, 그는 나에게 깜짝 고백을 했다. 그는 펜실바니아 주의 가난한 탄광촌에서 나고 자랐는데, 17세 때인 한국전 참전 직전에 사랑하던 소녀가 있었고, 그 소녀가 임신한지도 모른 채 한국으로 떠나게 됐단다. 그후 귀국해서 고향을 등지고 미주리 주에 살면서 대학을 다니다가 자신의 딸이 펜실바니아에서 자라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1960년대는 미국 대학가에서 반전, 반핵, 반제도, 히피, 프리섹스 등의 반문화 분위기가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반항의 시기였고, 그도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가족을 이루기를 원하는 그의 딸과 옛 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2000년 즈음해서 고향 친구와 연락이 닿아 알게 된 딸의 주소로 50세가 된 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그간의 자기 잘못을 사죄하고 만나자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딸이 더 이상 부녀 인연을 거론하지 말라며 자신을 부정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대목에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그는 자녀들의 웃음소리가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스위트 홈'으로 퇴근한 경험이 자기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고, 자기 집의 벨을 누르면 아이들이 “아빠!” 하고 달려 나와 반기는 퇴근 경험도 역시 자기 일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대신 그의 퇴근길을 맞은 것은 집안의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그는 그 점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금 81세다. 최근 전화해보니, 조크를 즐기는 낙천적 성격은 여전했으나,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듯했다. 젊은 시절의 자유와 싱글의 화려함도 이제는 다 갔고, 여생을 정리할 일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 참전 용사인 그를 위해, 다행히도 미국의 국가유공자 노후 보장 정책에 따라서, 미국 정부가 훗날 그가 걷지 못하면 노인병원에 입원시켜주고 죽으면 장례까지 치러준다고 한다. 내 어머니는 2011년에 89세를 일기로, 그리고 내 아버지는 2015년에 94세를 일기로 각각 내 손을 꼬옥 잡은 채 눈을 감으셨다. 그러나 팻의 장례식에는 아내도, 자식도 없을 것이다. 먼저 이 세상을 떴거나 건강이 안 좋아 친구들도 주위에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죽는다면 나라도 그의 장례식에 가고싶지만, 한국과 미국이 이역만리니, 그 순간이 올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5월은 가정을 만드는 결혼 시즌이기도 하다. 최근 제자들 결혼 주례 요청이 부쩍 늘었다. 나는 주례사를 통해서 이들을 애국자라고 칭찬하면서, 팻과 나와의 긴 인연을 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팻과의 인연으로부터 내가 느낀 바대로 부부는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그나마 자기 짝을 만나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됐지만, 전국적으로 우리나라 결혼 연령이 높아졌고, 1인 가구 싱글족이 늘고 있으며, 이혼율과 함께 ‘돌싱’도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1980년대에 이혼율의 정점을 찍은 후 지금은 하락세에 있다. 이는 에이즈가 창궐하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신보수주의자 레이건이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싱글주의자가 줄고 가족을 중시하는 경향이 증가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우리 이혼율과 싱글족 수는 여전히 증가일로다. 사회구조가 젊은이들의 결혼을 포기하게 한다는 ‘삼포세대’와 같은 슬픈 뉴스도 있다. 이 기세가 언제 꺾일 것이지... 초고령화 사회로 치닫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20, 30대는 100세 평균 수명을 누릴 것이다. 길어질 인생에서 가족이란 상대적 고독을 불식시켜줄 ‘쉘터(shelter, 쉼터)’이며, 배우자는 죽는 날까지 내 곁을 지켜줄 ‘최후의 친구’이고, 자식은 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챙겨줄 ‘상주(喪主)’이며, 그후 기일마다 나를 추모할 나의 '흔적'이다.

임을 봐야 뽕을 딴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늘을 봐야 별도 딸 것이다. 남녀 젊은이들이 서로 사랑에 빠져서 가족을 이루고 영원한 반려자를 곁에 두도록, 사회가 그런 분위기와 구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오늘따라, 박용재 시인의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는 시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채우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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