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그것은 금지되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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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그것은 금지되어 있느니라...
  • 발행인 정태철
  • 승인 2016.03.11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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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철 시빅뉴스 대표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1964년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The medium is the message(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말을 설파했다. 이 말에서 미디움(이는 미디어의 단수형이지만, 번역할 때는 사람들이 익숙한 복수형인 미디어라 한다)은 전달 수단이고 메시지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전달 수단인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의 말은 무슨 뜻일까?

한 소설을 책으로 읽은 사람과 소설이 각색된 영화로 본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경우, 메시지는 같으나 전달 수단이 책과 영화라는 차이가 있다. 이때 미디어가 다른 두 사람이 받은 감동이 같을까, 다를까? 어릴 적부터 책을 많이 읽은 아이와 TV를 많이 본 아이는 나중에 성장해서 가치관이나 인격은 어떤 차이를 보일까? 연인들은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말로 할 수도 있고, 종이편지로 주고받을 수도 있으며, 카톡이나 문자로 할 수도 있다. 모두 다 동일한 사랑한다는 메시지지만 전달하는 미디어는 모두 다르다. 미디어가 달라지면, 메시지는 달라지는 것인가? 그렇다. 맥루한은 달라진다고 확신했다. 그게 미디어가 메시지란 문장의 뜻이다. 애초에 말하려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미디어 때문에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게 맥루한의 주장이다.

맥루한의 이 말은 원래 문명 비판에 그 초점이 있었다. 20세기 당시 지성사회에서 원자력과 같은 테크놀로지는 한낱 물질에 불과하고 가치중립적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원자력을 이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원자력은 평화적 발전소가 될 수도 있고 파괴적 핵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적인 문명철학이었다. 그러나 맥루한은 원자력 등 인류의 테크놀로지는 내재된 독특한 속성이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을 그 테크놀로지의 속성대로 개조한다고 봤다. 그 테크놀로지의 속성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TV를 잘 보면 학습에 도움이 되고, TV를 남용하면 부정적인 인격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은 TV를 접하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TV 속성대로 인간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형성되고 만다는 게 맥루한의 문명 해석인 것이다. 즉,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게 미디어는 메시지라는 맥루한 이론의 핵심이다. 이를 기계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이라 부른다.

1960년대 이 이론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 이상 인간은 기계에 지배당할 리 없다고 사람들은 맥루한의 이론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맥루한은 얼굴을 맞대고 주고 받는 말이 미디어(잔달 수단)인 원시 시대에는 인정이 넘쳤지만, 글이 미디어인 시대에는 글자를 해독한 지배집단과 문맹인 피지배집단으로 계급이 분화됐다고 주장했다. 인류 역사는 곧 인류가 어떤 테크놀로지를 주로 사용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적 역사관이었다.

1810년대 산업혁명 시기에 기계가 인간의 직업을 뺏어 간다는 기계혐오론자들이 나타나 기계에 모래를 퍼부으며 테러를 가하는 기계 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을 러다이트(luddite)라 부른다. 나름 인간은 산업혁명 초기부터 기계 지배를 우려하고 저항했던 것이다.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는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1936년에 나온 무성영화다. 이는 대량생산의 자동화 기계에 종속된 불쌍한 인간 노동자를 묘사했다. 채플린은 가난한 기계공으로 하루종일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품들을 나사로 쉴 새 없이 조여야 했다. 일을 끝나고 집에 와도 채플린의 손은 자꾸 나사 조이는 틱장애 증세를 보여 관객에게 쓴웃음을 짓게 했다. 이들 사례는 모두 기술결정론의 예고편 같은 것이었다.

맥루한과 유사한 생각을 가졌던 괴짜 배우 우디 알랜은 1977년 자신이 감독한 영화 <애니 홀>에 맥루한을 카메오로 출연시켜 기계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학설을 직접 설명하게 했다. 영화 중에 갑자기 학자가 나타나 강의를 하니, 과연 우디 알랜다운 괴짜 연출이었다. 그 때가 아마도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이 다시 핫이슈로 재점화되던 시점인 듯하다.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은 바로 컴퓨터의 확산과 함께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인간의 손과 머리를 대신하는 컴퓨터, 인터넷, 소셜 미디어, 사물인터넷, 3D 프린터, 로봇, 드론, 무인자동차 등이 줄줄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글씨를 발로 썼냐고 친구들의 빈축을 살 정도로 악필인 나는 대학원생이던 1982년부터 모든 논문을 군대에서 배운 타자기로 쳐서 냈다. 1985년 미국 유학 가서는 ‘워드 퍼펙트’라는 컴퓨터 영문 워드 프로세서를 만나서 신나게 논문을 쳐댔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날개를 단 듯, 나는 지금도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대한민국 소년들을 설레게 한 감성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선생은 공책에 연필로 또박또박 소설을 썼다고 한다. 선생은 문장이 맘에 안 들면 연필로 지우고 다시 쓰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쓰인 황순원 선생의 주옥같은 문장과 자판을 두들기는 현대 글쟁이들의 손놀림의 차이는 지극히 초보 컴퓨터 기능에 불과한 워드 프로세서라도 인간 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음을 보여준다.

핸드폰이 막 유행하던 시기에 영국의 한 신문사가 ‘메시지가 미디어다’라는 괴상한 이름의 경연대회를 벌였다. 이는 이모티콘과 문장을 혼용해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핸드폰 문자를 애인에게 전달하는지를 다투는 이벤트였다. 이 대회 주최자와 참가자들은 당시에 신기하기만한 문자 보내기를 세련되게 하면서 핸드폰이라는 기계를 가지고 논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자 메시지가 핸드폰이라는 미디어를 십분 활용한다는 의미로 그 반대 생각을 가졌던 맥루한의 말을 거꾸로 패러디해서 대회명을 정한 듯하다. 과연 그랬을까? 엄지족들의 화려한 문자 찍기 묘기는 결국 핸드폰이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 세계가 난리가 났다. 세기의 대결이라 불린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바둑대결에서 알파고의 경지가 인간계를 능가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기계가 인간에게 졌다고 한탄하고, 어떤 사람은 구글이라는 자본이 인간의 노동을 농락한 것이라고 분개했다. 언론에서는 이세돌은 혼자고, 알파고는 1,000대가 넘는 컴퓨터의 훈수를 받고 바둑을 두는 것과 같으니, 이번 세기의 대결은 불공정 게임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알파고가 '바둑 명문 특목고'라는 우스개 소리가 소셜 미디어에 나돌고 있지만, 이세돌 선수가 두 판을 졌다는 소식은 왠지 사람들의 기분을 언짢게 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이렇게 빨리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시대가 오고 마는 것인가? 이런 걱정을 하며 2패가 결정된 날 밤에, 나는 한 상가 조문을 가게 됐다. 나는 장례식장 위치를 잘 몰라 내비게이션을 켰다. 내비게이션은 이리 가세요, 저리 가세요 하면서 쉴 세 없이 나에게 길을 안내했다. 순간,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바로 인공지능이란 점이었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내비게이션은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서 길을 안내한다. 내가 다른 길로 접어들면, 네비게이션은 그 시점에서 다시 새로운 길을 안내한다.

알파고의 공학적 알고리즘을 사회과학자인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결국 내비게이션이 하는 일과 알파고가 하는 일이 유사해 보인다. 알파고는 바둑판에서 상대보다 집 많이 짓기 위해 대리 기사(棋士)에게 바둑알을 이리 놓아라 저리 놓아라 명령하는 인공지능인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운전기사(技士)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명령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비게이션은 대한민국 도로를 샅샅이 꿰고 있고 수시로 업데이트도 하고 있다. 알파고도 수많은 기보를 수시로 입력한다. 이세돌은 전국 방방곡곡의 지리를 상당히 잘 아는 국내 최고의 베테랑 관광버스 기사와 같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전국 지리를 잘 안다고 해도 내비게이션보다 잘 알 수는 없다. 이세돌이 둔 바둑 회수와 책을 통해 배운 바둑의 수보다 알파고가 습득한 바둑의 수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무엇이고, 어디까지 발전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이냐는 것이 문제다. 사람은 꼭 목적을 가지고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최선의 선택을 안 하고 손해를 보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남에게 양보할 수도 있고, 남을 배려할 수도 있다. 이를 인간적 선택, 인간적 실수, 인간적 윤리라고 한다면, 인공지능도 그런 인간 냄새가 나도록 프로그래밍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는 종국에는 개발자의 윤리의 영역인가? 마치 인간이 신의 영역인 DNA의 비밀을 풀어서 ‘전쟁용이나 검투사용 반인반수(半人半獸)’을 만들거나,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장기이식용 살아 있는 각자의 아바타'를 만들지의 여부가 과학자의 윤리 영역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 <슈퍼맨>에서 사고로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슈퍼맨이 지구의 자전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해서 그 힘으로 지구를 반대로 돌린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죽기 전 시각으로 지구의 시각이 되돌아와, 그 사람은 죽지 않은 상태가 되어 죽음을 피한다. 그때 신의 음성이 메아리친다. “It’s forbiden, forbiden, forbiden(그것은 금지된 것이니라)”라고. 그러자 슈퍼맨은 귀를 막는다. 이 장면은 과학자가 귀를 막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신이 하지 말라고 통사정할 때까지, 일부 미래학자들 말처럼, 인류는 모두 멸망하거나 모두 영생할 때까지 인공지능을 갈 데까지 개발하고야 말 것인가? 오래 사는 것이 재앙이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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