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에는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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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에는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 쉰다
  • 하봉우
  • 승인 2013.01.1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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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그만큼 날씨도 추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야외활동을 줄이고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하지만 이 추위도 막아줄 듯한 위엄과 늠름함을 뽐내며 사람들에게 ‘방에만 박혀 있지 말고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곳이 있다. 임진왜란 때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일본군들을 막아냈고, 지금은 시민들에게 역사와 문화를 제공하는 ‘배움터’인 진주성이 바로 그 곳이다. 11월의 어느 화창한 주말, 기자는 진주성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부산에서 진주시 남성동과 본성동에 위치한 진주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한데, 사상 시외버스 터미널이나 동래 시외버스 매표소 앞에서 진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를 가면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진주성이 있기 때문에, 안내표지판을 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누구나 쉽게 진주성을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는 내비게이션에 진주성이라고 입력만하면 바로 찾을 수가 있고, 기차를 이용할 경우에는 진주역에서 내려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5분에서 10분 정도만 가면 진주성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은 어떤 교통시설을 이용하든 접근성이 용이하다. 기자는 부산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해 간단하게 진주성을 찾아갔다.

 

진주성에는 북문과 동문, 그리고 서문이 있는데, 기자는 동문인 촉석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동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진주성의 상징’인 촉석루(矗石樓)다. 촉석루는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남강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벼랑 위에 지어진 이 누각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 남쪽의 전쟁 지휘대로 사용돼 남장대(南將臺)로도 불린다. 촉석루 위에서 남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촉석루의 출입구 바로 앞에는 조선시대의 혼례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마침 한 노부부가 혼례복을 입고 촬영을 위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한 할아버지였는데,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사진 촬영을 해 주고 그 삯을 받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왔다. 기자는 사진 촬영 현장이 매우 흥미있어 보여 그곳에 잠시 머물렀다. 혼례복을 입은 노부부는 틈틈이 서로의 옷매무새나 자세 등을 고쳐 주었는데, 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미소짓게 했다.남편인 박길남(67) 씨는 이런 기회가 있어 매우 기분이 좋다고 말 했다. 박 씨는 “혼례복을 입고 진주성에서 사진을 찍으니 두 번 장가가는 기분입니다”라고 말하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주성하면 먼저 촉석루를 떠 올리는데, 그 이유는 바로 논개 때문이다. 임진 왜란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들이 자축의 의미로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였는데, 양반가의 부인인 논개가 기생으로 위장해 이 연회에 참석 했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논개는 촉석루 아래의 강가로 왜장 게야무라 로 구스케를 유인해, 의암바위 위에서 그를 끌어안 고 남강으로 투신했다.

 

이로 인해 논개는 진주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고, 촉석루는 논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때문에 촉석루 안에 는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義 妓祠)가 있다. 의기사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무언 가 상기되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기자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논개의 영정을 바라보면 누구나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촉석루의 뒤쪽에는 벼랑 밑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논개가 자신의 몸을 던진 의암(義巖)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가 의암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옛 진주의 양반들과 백성들이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기자는 의암바위에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혹시나 발을 헛디뎌 남강 물에 빠질까봐 겁이 나서 이내 그 생각을 포기했는데, 이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논개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촉석루의 뒤쪽에는 벼랑 밑으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논개가 자신의 몸을 던진 의암(義巖)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가 의암이라고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옛 진주의 양반들과 백성들이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해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기자는 의암바위에 한 번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혹시나 발을 헛디뎌 남강 물에 빠질까봐 겁이 나서 이내 그 생각을 포기했는데, 이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논개가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암바위 가까이 강가에는 논개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묘사한 인형들을 태운 한 척의 배가 떠 있었다. 인형이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은 논개 인형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듯했다.

 

기자는 촉석루를 나와서 길을 따라 성 안쪽으로 향했다. 길 주변에는 소규모의 다른 유적들뿐만 아 니라 잔디밭도 조성돼 있고 벤치도 많아서 화창한 날씨에 소풍을 가거나 휴식을 취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5분 정도 걸었을까, 남강이 있어 길이 없는 남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의 세 갈림길이 나타났다. 이 갈림길 중 기자는 동쪽 방향 의 갈림길에서 왔기 때문에 북쪽과 서쪽 방향의 갈 림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북문인 공북문이 시야에 들어와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내의 모든 길은 도보로만 이용이 가능하나, 자동차 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고 성곽 내 부를 따라서는 별도의 인도가 설치돼 있어서 성을 둘 러보는데 매우 편리했다. 길폭이 넓어서 ‘자전거는 당연히 이용 가능하겠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자전거는 성내로 반입이 불가능하다.

 

공북문 근처에는 진주대첩을 이끈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다. 진주대첩이란 김시민 장군이 3,800여명의 병력과 백성들을 지휘해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김시민 장군의 동상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마치 적에게 ‘꼼짝 마라!’고 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장군을 더욱 더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김시민 장군은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을 가지고 전투에서 이겼어요. 지도력이 참 대단하죠. 이런 사람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기자는 김시민 장군 동상 왼쪽에 위치한 오르 막길을 따라 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르막길 의 정상에는 영남포정사라는 옛 관청의 문이 있었 는데, 이곳에는 두 명의 포졸이 입구를 지키고 있 었다. 물론 이 포졸들은 실제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모형이었지만, 삼지창을 들고 있는 모습과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은 현재 우리 군의 철통보안을 방불케했다. 그리고 이런 포졸들의 모습이 방문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도 했지만, 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밖은 포졸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안전할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영남포정사를 통과해 오른쪽을 쳐다보면 진주 성 북쪽의 전쟁 지휘소인 북장대(北將臺)가 있다. 북장대는 남장대인 촉석루와는 달리 혼자 동떨어 져 있는 느낌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방문도 남장 대처럼 많지가 않다. 하지만 북장대 누각에 올라 서면 진주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이는 진주성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진주 시내는 딱히 높은 건물이 없어서 모든 건물 들이 한 군데에 조밀하게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 다. 마치 옛 조선시대의 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진주시 금산면에 사는 하문수(22) 씨는 촉석루는 남강을 보기에 좋은 반면, 북장대는 진주 시내를 보기에 좋다고 말했다. 하 씨는 “북장대는 다른 곳에 비해 접근하기도 쉽지 않아 사람들이 북적대지도 않아요. 그래서 깊은 생각을 한다든지 등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기자가 영남포정사를 지나 국립 진주 박물관으 로 향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어떤 미세한 움직임 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동물 한 마리 가 나무 위에 앉아있었는데, 바로 청설모였다. 몇 년 전만해도 자연경관만 조성된 곳이라면 주변에 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동물인데, 지금은 찾아보 기가 힘들다. 이런 청설모가 진주성 안에서는 먹 이를 찾아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진주성의 건 강한 생태 환경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국립 진주 박물관 앞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박물관 앞을 장식하고 있는 화차 다. 화차는 수십 개의 총을 수레 위에 장치하여 이동을 쉽게 하고 한 번에 여러 개의 총을 쏠 수 있게 만든 무기를 말한다. 이 화차는 영화 ‘신기 전’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진주성에 놀러 온 김영환(11) 군은 진주성에서 본 것 중에 화차가 가장 흥미있다고 말했다. 김 군은 “옛날에 전쟁을 할 때 이것을 진짜 썼다는 것이 신기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머리가 참 똑똑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국립 진주 박물관은 ‘진주시 역사의 보고’라 고 부를 수 있겠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의 자료 들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상황들에 대한 많은 자료들도 존재한다. 때문에 이 박물관은 평 소에 지역의 역사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대번 에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다.

 기자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기 다리고 있던 안내양이 관람 코스를 설명해 주었 다. 먼저 2층으로 올라가 2층 전시관을 관 람 후, 올라갈 때와는 다른 통로로 내려와 1층 전시관을 관람하는 것이 이 관람 코스다. 2층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갑옷, 무기, 그리고 소형화한 전함들이 전시돼 있었고, 임진왜란이 어떤 전쟁이었는지를 영상을 통해 알려주는 영상 관람실도 있었다. 또한 2층으로 올라가거나 1층으로 내려가는 통로의 벽면에는 진주시의 시대별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그림과 함께 붙어 있어 관람객들의 이해를 한층 더 돕는다. 1층에는 도자기와 그릇같은 옛 유물들에 대한 전시장과 미술관, 붓글씨 체험장, 기념품 판매소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기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미술관인데,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와 그 후의 상황들이 흑백 사진으로 전시돼 있었다. 특히, 성내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주제로 한 사진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 로움과 삶의 단결력을 기자에게 전해주었다. 산 청군 산청읍에 거주하는 박희주(53) 씨는 미술 관의 전시 작품들이 옛날의 생활상을 사실 그 대로 보여줘서 좋다고 말했다. 박 씨는 “옛날에 그린 그림같은 것들을 보면 조금씩 과장된 것들도 많잖아요. 사진은 그런 과장이 없어서 참 좋네요”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진주성에는 호국사, 창열사, 서장대 등의 다른 유적지들이 있다.

기자가 국립 진주 박물관을 나와서 가장 먼 저 본 것은 한 아버지가 어린 아이들과 손을 잡고 성내를 거니는 모습이었다. 그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매번 웃는 얼굴로 장난을 쳤고, 아 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즐거움에 겨워 소리를 지르고 웃으며 진주성에 유쾌한 분위기 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진주성에서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 는 혼자도 좋지만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역사와 자연을 느끼며 성내를 거니는 것이 더욱 큰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진주성의 개방 시간은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이며, 진주성 입장을 위해서는 각 문 앞에 있는 매표소에서 표를 사야 한다. 일반 성인은 1,000원이고 청소년은 500원, 어린이는 300원이다. 진주 시민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무료로 개방되는 시기들도 많아 때를 잘 맞춘다면 공짜로 입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매년 개천예술제와 진주논개제가 진주성과 진주성 주변 남강 일대에서 열리는데, 이 축제들이 개막하는 때를 잘 맞춰서 온다면 더욱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진주성의 매력에 워낙 깊이 빠져서 그런지, 기자는 식사도 하지 않고 돌아다녔고 그렇게 취재를 마쳤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에 대해 소개를 할 수는 없으나, 진주성 동문 앞의 민물 장어식당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나 인터넷 등의 미디어를 통해서도 진주성 앞의 민물 장어식당은 널리 알려져 있다. 기자도 이번 여름에 이 식당들 중 한 곳에서 장어를 먹어 봤는데, 그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통닭에 양념과 후라이드가 있듯이, 이 장어식당들에서는 양념 장어구이와 일반 숯불 장어구이로 나눠서 판매를 하는데, 둘 중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입 안에 넣으면 ‘사르르’하고 녹는 듯한,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민물 장어의 맛을 진주성 앞에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제1차 진주성 전투인 진주대첩에서는 승리했지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함락돼 7만 여명의 민?관?군이 순절한 안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진주성. 하지만 아직도 이곳에는 그때 그 열정이 온전히 남아있고 그때 그 함성이 구석구석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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