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 칼럼] ‘기생충’, BTS, 삼성이 쌓아 올린 한국의 국가 이미지, 코로나19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가 망치나?

국제 외교 무대와 무역 시장은 국가별 이미지 싸움 코로나19로 중국과 한국은 나중에 무너진 이미지로 고생할 듯 정치적 싸움하지 말고 과학으로 코로나 위기 극복해야

2020-03-02     정태철 편집위원

세계 사람들은 ‘아프리카’란 단어를 들으면 절망적 기근(飢饉)을 연상한다. 엄마 품에 안겨서 생명이 꺼져 가는 갓난아이의 피골이 상접한 얼굴 위로 파리가 기어 다니는 모습이 대표적인 아프리카 ‘이미지’다. 단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왜 사람들은 이런 처참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까? 그것은 미디어 뉴스, 유니세프 광고,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 때문이다. 서구 미디어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긍정적 뉴스를 내보내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이전투구 내전, 독재, 사막화, 기근 뉴스만이 시청률 높여 돈이 되는 효자 상품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구에 대한 뉴스는 밝고 환한 것 일색이다.

계속되는

이런 차별적 뉴스보도를 보고 저개발국가들은 ‘뉴스 유통(흐름)이 불공정하다’고 유네스코에서 항의하기도 했다. 그게 1980년대였다. 우리나라 이미지도 1980년대까지는 서구 미디어에서 곱게 묘사되지 않았다. ‘한국’하면 길거리 데모, 화염병, 독재 같은 검은 뉴스가 미국 공중파 방송의 단골 메뉴였다. 미국 유학시절, 나는 88올림픽을 앞두고 데모하는 한국 대학생들이 경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을 미국 TV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이에 대한 앵커 멘트가 아직도 생생하게 내 가슴을 후벼 판다. “한국 학생들이 올림픽 던지기 종목 연습하는 건가요? 하하하.”

미국 미디어의 조롱을 받던 한국과는 달리, 80년대 일본은 도요다 자동차와 소니 TV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었고, 가와사키에서 만든 오토바이 브랜드가 ‘닌자’였으며, 스즈키에서 만든 SUV 모델명이 ‘사무라이’였다. 이미 일본은 자기들 역사에 등장하는 자객 암살단 닌자의 날렵한 이미지와, 무사 집단 사무라이의 터프한 이미지를 오토바이와 SUV 브랜드로 날개 돋친 듯이 팔고 있었으며, 미국에서 스시(초밥)는 비싸고 기품 있는 고급 음식 이미지로 성공했다.

인도 본국의 이미지는 좋을 리 없지만, 미국에 사는 인도 이민자 2세들은 천재 이미지를 갖고 있다. 미국에는 매년 청소년 대상 전국 영어 단어 스펠링 맞추기 대회(National Spelling Bee)가 열리는데, 이 대회 결승전은 공중파 TV가 생중계할 만큼 위상이 높다. 영약이나 묘약이라는 뜻의 ‘elixir(엘릭서)’와 같이 발음과 스펠링이 따로 노는 고난도 단어 스펠링을 맞추는 이 대회 우승자는 백악관 초청, 3만 불 상금 등 부상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수년 간 이 대회 우승자의 90% 이상이 인도계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 인도계의 천재 이미지는 이렇게 형성된 듯하다.

사람들의 가치관, 세계관은 많이 접하는 TV와 영화 등 미디어 콘텐츠가 형성시킨다는 이론이 바로 ‘계발(啓發, cultivation) 효과 이론’이다. 특정한 사람에게 가능한 일을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논리학에서는 ‘구성의 오류’라고 한다. 한 나라의 국민성을 미디어에서 본 한두 편 영화나 뉴스로 평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분명 구성의 오류지만, 현실 국제사회에서는 한 국가에 대한 이미지로 자리 잡아 무역을 좌우하고 외교에 영향을 미친다. 한류가 주도하는 한국 제품 특수(特需) 현상도 결국 한국 이미지 덕이다. 흑인 한두 명의 범죄를 보고 모든 흑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과 같이, 국가 이미지는 구성의 오류이고, 동시에 집단적 편견이지만, 절대로 무시될 수는 없다.

80년대 나의 미국 유학시절에, 내가 만난 미국의 보통 일반인들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부터 묻곤 했다. 당시에는 북한이 미국과 미수교국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미국인들은 한국인이 일본어 아니면 중국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한국이 영어의 알파벳과 언어학적으로 동일한 음소문자인 한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면, 미국 사람 대개는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88올림픽이 지나고 1990년대가 오자, 일본은 노령화와 부동산 버블 등으로 ‘잃어버린 10년’에 빠지면서 소니의 철옹성이 침몰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한국은 전 세계 정보화를 선도하면서 삼성의 반도체와 스마트 폰으로 떴다. 세계는 한국을 똑똑하고 부지런하다는 국가 이미지로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쯤,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조카가 자기 학교에 공부를 잘 못하는 다른 한국 아이가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한국 아이가 지나가면, 미국 아이들은 “너 한국사람 맞어?”하고 놀렸단다. 어느새 미국 꼬마들마저도 한국 아이들은 공부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 한다는 이미지를 가졌던 모양이다. 우리는 학교 교육이 암기식 위주라고 한탄하지만, 과거에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교육을 공개 연설에서 칭찬했다. 실제로 한국은 OECD 학업 성취도 조사에서 항상 상위그룹에 올라 있다. 미국 정가에서는 미국에 겁 없이 대드는 약소국 북한을 우습게 보는 분위기는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도 (남한과 유전자가 같은) 코리안이니까”라는 거다. ICBM을 만들고 강대국 기밀 컴퓨터를 해킹하는 북한을 보면, 그들도 코리안이 맞긴 하다.

이렇게 기세가 등등한 한국 사람들은 5000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중국보다 잘 살게 되면서 특히 중국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인구가 많은 중국은 GDP 순위에서는 2019년 기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나 사회 인프라는 아직도 형편없다. 나는 중국의 한 대학에 초청 받아 간 적이 있었는데, 대학 건물 화장실이 아직도 쪼그리고 일을 보는 재래식이었으며, 대학 본부 사무실 대부분이 석유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학생들 기숙사에는 한국에서 60년대에나 있을 법한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옷장이 있어서 기겁을 한 적도 있다. 한번은 중국 자매대학에서 온 교수 일행을 부산 국제시장으로 안내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을 본 상인이 “돈 없는 너희들이 이런 비싼 것을 살 수 있겠느냐”는 식의 말을 해서 한국말은 못 알아들어도 눈치로 기분 나빠하는 중국 손님들을 모시고 황급히 가게를 빠져 나온 적도 있었다.

이런 한국인의 태도가 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국력이 커진 시진핑은 2018년 4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미중 정상회담 자리에서 “과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발언했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2014년 5월, 한중 정부 관계자 정기 교류 모임에서 중국 측 관리가 우리 정부 사람들에게 “조공 외교로 돌아가는 게 어떠냐”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고 해서 국내에서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과거의 동북공정은 물론, 근자에 중국이 사드 문제로 우리를 괴롭힌 것은 한국인의 노골적인 중국 무시 정서를 손본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런 중국이 코로나19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됐다. 시진핑이 미국과 2대 극강 구도를 형성하고, 중국 파워를 과시하기 위해 항공모함,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하는 등 일대일로 정책으로 세계를 헤집고 다니면서 중국몽을 외치다가, 지금 중국은 코로나 역병 사태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전 세계 TV에 비친 중국은 한마디로 ‘비문명적’이다. 중국인들이 박쥐나 천산갑이란 야생동물을 먹는다는 ‘몬도가네’ 식 혐오 먹거리가 이번에 밝혀졌고, 코로나19 사태의 진실을 고발한 의사들이 하나둘 사라질 정도로 중국이 자유가 없는 비인도적 국가란 사실도 들통 났으며,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길거리에서 공안(경찰)이 행인을 마구 구타하는 만행 장면도 전 세계 TV 뉴스를 탔다.

코로나19 중국 확진자가 7만 명을 넘자, 우한지역에는 체육관 같은 곳에 침대 수백 개를 놓고 환자, 가족, 의료진이 마구 뒤섞여 돌아다니는 장면도 보였다. 기가 찼다. 저게 나라인가란 말이 절로 나왔다. 치명적인 전염병 환자들을 저렇게 구제역 걸린 소돼지 취급할 정도로 중국 의료 수준이 엉망이고 보건 상식이 안 통하는 나라라는 사실에 측은함마저 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곧 종식된다는 우리 정부의 자화자찬이 화가 됐는지, 아니면 바이러스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무엇이 천벌이 내렸는지, 우리 대한민국이 코로나19로 갑자기 망가지고 있다. 하루 500명씩 확진자가 터지고, 전체 확진자 수는 4000명을 넘었으며, 병실이 모자라 확진자가 자택에서 대기 중 숨지는 사례도 나타났다. 마스크 사려고 수백 미터 줄을 서는 부끄러운 장면이 전 세계로 보도됐다. 영화 <기생충>과 BTS 새 앨범으로 다시 한 번 한류 신드롬을 휘날리던 찰나, 우리나라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입국이 사절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손흥민도 팔 수술 후 영국으로 귀국하면 2주간 격리된다니 우리나라 입장이 참 처량하게 됐다. 재택근무하는 회사가 늘고, 학교 개강이 불투명해졌으며, 우리도 체육관 빌려서 임시 ‘도떼기’ 병상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있다(이 점은 다행히도 정부가 1인1실 생활치료센터 운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이 중국 신세가 됐다. ‘코로나 블루’다. 정말 우울하다.

그런데 중국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인을 역공격하고 있다. 구호 물품을 500만 달러어치나 주었어도, 중국 곳곳에서 한국인 입국을 막고 있고, 우리 교포 집에 봉쇄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중국이 발원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중난산 중국공정원 원사의 주장도 나왔는데, 조만간 중국이 코로나19 발원지를 한국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징조’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국가 간 코로나19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란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한 집단이 소속감(정체성)을 강화해서 그 집단 구성원의 목표의식을 결집하고, 그래서 무언가 정치가의 휘둘림에 구성원이 쫓아오게 만드는 정치행위를 가리킨다.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했던 나치의 게르만 민족주의, 극단적 이슬람주의자의 지하드 자살 테러도 섬찟한 정체성 정치의 사례다.

3.1절이 바로 어제였지만, 작년에 주목 받았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우리의 반일 감정이 과장됐고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책의 주장 진위는 좀더 학술적으로 검증받아야하겠지만, 책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하면, 위안부 문제, 독도문제, 징용 근로자 문제에서 한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바로 정체성 정치가 될 수 있다.

로마의 화재(火災) 원인을 기독교인의 방화로 돌린 네로 황제나,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일본인이 만든 유언비어가 바로 정체성 정치였다. 코로나19는 과학과 의학의 문제다. 중국인 한국 입국이 수상쩍게 허용되고, 문재인 탄핵과 문재인 응원 청와대 청원이 클릭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신천지, 온천교회 등이 속죄양이 되는 ‘정체성 정치’처럼, 코로나19 사태는 정치적 계산, 여론 선동, 편 가르기, 덤터기 씌우기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단 10일 만에 확진자 100명이 4000명이 될 줄 우린들 짐작이나 했겠는가. 중국, 한국, 그리고 이태리와 이란은 말할 것도 없고, 조만간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코로나19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코로나19의 창궐도 종식될 것이다. 모든 게 끝이 나면, 나라별로 어느 나라가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성적표가 매겨질 것이다. 그에 따라서 나라별 이미지도 재편될 것이다. 그게 더 걱정이다. 코로나19 사태에도 여전한 국내의 정체성 정치가 <기생충>, BTS, 삼성 스마트폰이 쌓아 올린 한국 이미지를 일순간에 집어 삼킬까봐 그게 더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