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아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주대학교에서 학보사 학생 기자들과 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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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아주대학교 석좌교수: 아주대학교에서 학보사 학생 기자들과 호흡하다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9.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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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 장원호 박사

1966년 일찍이 미국 유학을 떠날 때부터 나의 목표는 학위를 마치고 조국에 돌아 와서 교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형편에 따라서 살다보니 미국 교수가 되어 30여 년을 미국 교단에서 보내게됐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은퇴했지만 아직도 꿈에 나타나는 일들은 한국보다 오래 산 미국이 아니라 여전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미국 교수를 하면서 1979년에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교환 교수로 6개월을 보냈고, 1987년에는 훌브라이트 교환 교수로 또 1년을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한국으로 교수 자리를 옮기고도 싶었지만 이미 세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다니고 있으니 감히 서울로 이직할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환갑을 지내고 보니 아이들도 모두 결혼하고 직장을 잡아서 우리 품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은퇴 후 한국에 살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처가인 대구에 아파트까지 하나를 사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해에 당시 김덕중 아주대 총장이 아주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은퇴가 임박하자 생각이 복잡해져서 내가 제일 오래 살아온 미주리 컬럼비아에 은퇴할 생각도 커졌습니다. 미국 대학도 명퇴 제도가 생겨서 일찍 은퇴하면 은퇴 시 연봉의 3년치를 목돈으로 준다고 했습니다. 학교 입장으로는 노 교수 한 사람 급료로 젊은 교수 두 명을 쓸 수 있으니 명퇴 제도가 유리했습니다. 또 30년 이상 근무한 나 같은 노 교수는 은퇴해도 재직 시 연봉과 큰 차이가 없는 연금을 받으니 학교와 노 교수 양자가 원원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명퇴 제도가 생기자, 나를 비롯해서 많은 노 교수들이 명퇴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내 나이가 63세이니 김덕중 총장의 제안대로 미주리대학을 명퇴하고 아주대학교 석좌교수로 가도 한국 정년 65세까지 2년을 더 교수직을 갖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나는 아주대학에서 강의하다 아예 한국으로 은퇴 후를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아주대학교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주리 대학 은퇴와 동시에 아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렇게 석좌교수 신분으로 아주대에서 2년을 보내니 다시 한국 정년이 되었고, 다시 1년을 연장해서 아주대에 더 있다가 2003년에 컬럼비아로 돌아가니 도합 3년을 아주대학에서 보냈습니다.

아주대학교 중앙광장(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아주대학교에는 언론학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주대는 정보통신대학을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일종의 컴퓨터 학과의 변신으로 정보통신 공학과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의 융합 학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학과에서는 애니메이션이나 각종 정보통신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 즉 콘텐츠나 프로그램 타겟 그룹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과목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나는 광고 이론과 커뮤니케이션 이론 두 과목을 강의하게 됐습니다. 서툰 한국어이기는 했지만 수업 중 한국 학생들과의 소통은 거의 문제가 없었습니다.

특히 광고 이론 과목은 간호학과와 경영학과 등 외부 학부 학생들이 들어와서 수강생이 100명이 넘었습니다. 대형 강의실에서 하는 강의가 좀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한국어로 강의하는 것은 과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제법 익숙해진 듯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학기 강의를 즐기기 시작할 무렵, 김덕중 총장이 나에게 아주대학보, 아주 방송, 그리고 아주대 잡지 주간 교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몇 번 사양했지만, 하도 강권하는 통에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떠밀려서 맡기는 했지만, 내가 아주대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주대 학보사 학생들과 뜻 밖의 친밀한 교류와 보람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김덕중 총장과 당시 내 주변에 있던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에게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학보사 주간은 대개 젊은 언론학과 교수가 맡게됩니다. 이 자리는 학교 당국과 신문사 기자 학생들의 중간에서 여러가지 어려운 중재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직책입니다. 학보에 학교 당국이 좋아 하지 않는 기사가 자주 실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학보사 기자들과 만나 자리에서, 할아버지 같은 나는 미국의 학보사 주간 교수와 똑 같은 방법으로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학보사 자문 교수는 학생들이 무슨 기사를 쓰든지 간에 사전 검열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으며, 학생들의 자문에 답하면서도, 일단 신문이 나오면 호된 평가를 한다고 학생 기자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아주대 학보사 기자들과 필자(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손자 같은 기자들과 더욱 가까워 진 것은 격주로 신문이 나오면 그날 저녁 학보사 편집장부터 모두 학교 앞 식당으로 가서 혹독한 비평 시간과 동시에 한바탕 소주 파티를 벌이면서부터였습니다. 이게 매주 제도로 정착이 되자, 우리의 단골이 된 한 식당은 신문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우리가 좋아하는 삼겹살과 별식을 준비하여 우리와 가까운 사이가 됐습니다.

저녁을 먹고는 근처의 생맥주 집에 들러서 2차를 하고, 어느 때는 3차로 노래방까지 갔는데, 나는 3차는 피하였습니다. 이렇게 1년을 보내고 보니 나는 그들의 주간 교수에서 인생 상담 교수까지 되었습니다.

내가 학생들과 가까워지면서 총장에게 사정하여 아무도 생각 못 한 기자들 미국 연수 겸 취재 여행을 실행에 옮기게 됐습니다. 나는 학생 기자들과 같이 미주리 언론대학에 가서 학교 신문 만드는 곳을 견학하고 실습도 했으며, Long Island State University, 하바드 대학.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을 취재하여 아주대 학보에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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