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내가 주선한 어느 이산가족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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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내가 주선한 어느 이산가족 해후
  • 정태철 시빅뉴스 대표
  • 승인 2013.08.1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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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광복절이 되면, 흐린 날 무릎이 아파오는 신경통 환자처럼, 내 마음 한 구석에 아련한 기억 한 조각이 주기적으로 자리 잡는다. 내 영혼에 새겨진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1983년 여름은 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으로 전 국민이 연일 눈물과 탄식으로 밤을 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석사 논문을 쓰고 있던 대학원생이었다. 가끔 밤늦게 학과 사무실에서 논문 작업을 하다가 집에 갈 차편을 놓치면, 나는 곧잘 같은 과 학부생인 고향 후배의 학교 부근 제기동 하숙집으로 기어들어 가 하룻밤 신세를 지곤 했다.

  한국인 남편 찾는 일본인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에 가슴 뭉클

후배 하숙집은 고향이 제주도여서 ‘제주도 할머니’라 불리는 주인 할머니가 남자 대학생과 직장인 10여명을 건사하는 전형적인 전문 하숙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찬모 역할을 하는 또 다른 할머니가 한 분 있었다. 한국말을 잘 못하고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할머니였다. 그래서 하숙생들은 그분을 ‘일본 할머니’라 불렀다. 제주도 할머니는 70대, 일본 할머니는 60대 정도였다고 기억된다.

요새 같은 글로벌 시대도 아닌 1983년에 한국말도 어눌한 할머니가 한국에서 하숙집 가정부를 하고 있는 사연은 무엇일까? 서툰 한국말로 일본 할머니가 간간히 전한 사연은 바로 이랬다.

얼굴이 제법 곱상한 일본 할머니는 1945년 해방 한두 해 전에 요코하마에서 타이피스트로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살고 있던 한 조선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원수지간인 두 나라의 국경을 뛰어 넘는 위험한 사랑에 빠진 셈인데, 그 사랑이 결실을 맺어, 결혼까지 하고 딸을 하나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해방 이듬해, 둘은 한국으로 넘어와 전라도 어느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원수 나라 사람인 일본 새댁은 시댁 식구들의 심한 구박을 받아가며 살던 중, 남편은 서울로 볼일 보러 가서 집에 없을 때, 시댁 식구들은 “네 남편은 서울에서 일하다 죽었으니, 너는 네 나라 일본으로 돌아가라”며 딸아이를 업히고 집밖으로 일본 할머니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일본 할머니는 일본이 패전했고 남편도 죽었다고 들은 상태에서, 일본 사람인 자기를 시댁 식구들이 매몰차게 내쫓은 거라고 당시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한국말도 잘 못하고, 돈도 없고, 지리도 모르는 일본 할머니는 그때부터 한국 땅을 이리저리 헤매며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갈 방법도 몰랐고 차비도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일본 할머니는 껌팔이, 가정부 일도 했고, 한국전쟁도 겪게 되었으며, 때론 식당일을 거들어 주고 식당에서 새우잠을 자며 목숨을 어렵게 연명했다고 한다. 어렸던 딸은 집에서 쫓겨나온 후 먹이질 못해 영양실조로 곧 사망했고, 알뜰히 돈을 모은 때도 있었으나, 접근하던 남자에게 번 돈을 모두 도둑질 당하는 배반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37년 가까이 온갖 풍상 속에서 죽지 못해 삶을 영위하던 할머니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희망 없는 한국 하늘 아래서 더 이상 살 의욕이 없어 다리 밑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하다가, 다행이 길가던 사람들 눈에 띄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우르르 몰려 든 동네 사람들 속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제주도 할머니가 일본 할머니 손을 이끌며 “서로 외로운 처지에 하숙집 일을 도우며 평생을 같이 살자”고 제안했고, 이후로 일본 할머니는 그 하숙집 식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본 할머니가 1983년 7월 어느 날 몸져 눕게 되고, “일본으로 보내줘”를 간신히 되내이는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하숙생들은 급히 돈을 모아 링거를 놓아드렸고,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을 구해서, 일본 할머니 고향을 알아내고, 일본 친척을 찾아서 일본으로 보내드리자고 뜻을 합쳤다.

   강진 군청, 일 대사관등 수소문.. 37년만에 극적인 상봉

후배가 나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어디 일본어 잘 하는 사람 없냐고 묻자, 나는 즉시 일본 대사관에 근무하는 선배 한 분을 떠올리고 도움을 청했다. 곧 그 선배의 주선으로 일본 대사관 사람과 일본 할머니와의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 우리는 줄줄 일본말로 대화하는 할머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 할머니는 한국말을 잘 못하기도 했지만, 말수 자체가 없어서 거의 벙어리처럼 지냈던 것이다. 일본 대사관은 할머니로부터 일본 본적지 주소를 알아냈고, 며칠 뒤, 일본 대사관 선배는 할머니의 일본 호적에는 할머니가 해방 직전 한국 사람과 결혼해서 전라도 강진군으로 호적을 옮겨갔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나에게 알려 왔다.

나는 즉시 일본 대사관 선배가 알려준 주소지인 강진군청으로 할머니의 호적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문의했다. 당시 전국은 이산가족 찾기 열풍에 쌓여 있었기 때문에 관청의 협조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강진군청은 며칠 뒤 한 통의 서류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것은 일본 할머니의 호적등본이었다. 거기에는 죽었다고 알고 있던 일본 할머니의 남편이 ‘김봉(金鳳)’이란 이름으로 살아 있는 것으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 일본 할머니 역시 일본 이름 그대로를 한글로 표현한 ‘후지이’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시 살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현 거주지가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1동으로 적혀 있었다. 일본 할머니는 믿을 수 없는 이 소식을 듣고 기적처럼 링거 바늘을 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37년 동안 남편이 죽고 자기를 도울 단 한 사람도 없는 한국 땅에서 모진 고생을 끝내고자 자살까지 감행했던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원기를 회복했다. 그리고 일본 할머니는 남편을 찾아 달라고 우리에게 애원했다. 우리는 즉시 모두가 힘을 합쳐 일본 할머니 남편 찾기에 나섰다.

일본 할머니 호적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죽은 딸 기록은 없었다. 아마도 출생 신고를 안 한 듯했다.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호적에는 아버지 김봉과 어머니 후지이 사이에 또 다른 두 딸이 그후(1955년 경으로 기억함)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와 후배는 홍제1동 동사무소를 향하기 전, 그 호적등본의 기록을 놓고 일말의 퍼즐을 풀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일본 할머니의 남편은 다른 한국 여자와 살았을 것이고 그 두 사람 사이에 딸 둘을 낳지 않았을까? 단지, 일본 할머니가 호적상 부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부인이 정식 부인으로 호적에 올라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럼 왜 일본 할머니는 아직도 호적에 그냥 그대로 남아 있을까? 우리의 추측은 대략 이 정도에서 한계에 부딪고 말았다.

홍제1동 동사무소를 찾은 나와 후배는 산더미 같은 전입전출대장을 일일이 뒤졌다. 다행히 역시 우호적인 동사무소의 협조로 우리는 김 씨 할아버지가 거의 6개월 단위로 홍제1동에서 홍제2동으로, 다시 홍제3동을 거쳐 홍제4동으로 이사 다닌 기록을 동사무소들을 전전하며 찾아냈다. 잦은 이사 경력으로 보아, 우리는 아마도 할아버지의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가 홍제4동에서 경기도 어느 군으로 전출한 사실을 확인하고 그날 추적을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본 할머니의 남편 재회는 다음날로 미뤄지게 되었다.

다음날, 시외버스를 타고 경기도 어느 군청을 찾은 우리는 다시 할아버지가 서울 면목4동으로 전출 갔음을 확인했다. 군청 앞에서 서울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나와 후배는 장탄식을 했다. 면목4동으로 가면 그 다음은 또 어디로 이사갔을 것인가 하고. 김 씨 할아버지 찾아 나선지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면목4동 사무소를 찾았다. 할아버지의 전출 기록은 다행이도 거기서 멈춰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현재 면목4동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현 주소지로 막 찾아 가려다, 잠시 통장집을 먼저 찾았다. 혹시 할아버지가 호적에 오른 두 딸의 어머니인 한국 부인과 같이 살고 있다면, 일본 부인의 생존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가 고민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은 곧 해결되었다. 통장은 김봉 할아버지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어느날 이 동네로 홀로 이사 온 할아버지는 사명감이 투철했던 통장의 눈에 북에서 온 간첩 같다는 의심을 샀고, 그 이유로 통장은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며, 차차 그 오해는 풀렸다고 한다. 통장의 말에 의하면, 김봉 할아버지는 혼자 단칸방에서 살고 있으며, 부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가끔 딸들이 들여다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통장은 이어서 지금은 할아버지가 정부가 제공하는 취로사업 일을 나갔고 저녁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온다고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드디어 일본 할머니의 남편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화로 하숙집에 전해 놓고, 나와 후배는 저녁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저녁이 지나고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귀가했다. 우리는 잽싸게 할아버지 문간방을 두드렸다. 머릿속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준수한 외모를 지닌 할아버지 한 분이 좁은 방 가운데 앉아 있었고, 우리는 대뜸 후지이란 일본 할머니를 아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학생들이 어찌 그 사람 이름을 아느냐? 그 사람이 살아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우리는 일본 할머니의 생존을 알렸다. 할아버지는 “딸이 있었는데, 딸 소식도 아는가?”라고 즉시 되물었다. 우리는 딸은 집을 나온 후 바로 죽었다고 말했더니, 할아버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부인과 더불어 첫 딸도 37년 동안 못잊어 한 듯했다.

김봉 할아버지는 자신이 서울에 볼일 보러 갔다가 일을 마치고 강진군 집으로 오자, 부인과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은 일본 부인이 스스로 제 발로 걸어서 자기 나라 일본으로 간다고 집을 나갔다고 할아버지에게 딱 잘라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마도 가족의 반일 감정이 일본 며느리를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고, 그래도 시댁 식구들과 한동안 같이 살았다는 사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 쓴 오로지 남편의 사랑 때문에 가능했을 듯했다. 아무튼 그 뒤로 할아버지는 일본 부인의 일본 친척들에게 연락하여 부인 소식을 물었으나 그들마저도 깜깜무소식이었고, 한국 어디에 있지 않을까 하여 틈만 나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일본 부인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 와중에 지금의 한국 부인을 만났지만, 후지이라는 일본 부인의 호적을 어딘가 살아 있을 거란 희망으로 정리하지 않았고, 행방불명 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부인과 사이에 딸 둘을 낳고 어머니를 일본 부인으로 해서 딸들을 호적에 올렸어도 할아버지가 일본 부인의 호적을 정리하지 않은 것이 노상 불화의 원인이 되어, 딸들이 결혼하여 출가하자, 한국 부인은 곧바로 딸네 집으로 거처를 옮겨 별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할머니의 호적에 관한 퍼즐은 여기서 모든 게 풀렸다. 할아버지의 일본 부인에 대한 사랑이 이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중했고 애틋했다는 증거가 바로 37년간 지우지 않고 언젠가는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남겨두었던 ‘호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즉시 할아버지를 만난 사실을 하숙집에 알리고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제기동 하숙집으로 내달렸다. 내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드디어 하숙집에 도착했다. 한옥인 하숙집은 마당이 있었는데, 하숙집 식구들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네 사람들로 마당이 꽉 차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의 안내로 마루로 직행했고, 방금 전까지 마루에 서 있었다는 일본 할머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를 외쳤다. 순간 안방 문이 열리면서 평소에 안 입었던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일본 할머니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할아버지 옆으로 걸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37년 만에 보는 남편에게 일본식 절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안녕 하시무니까?” 할아버지는 똑바로 일본 아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허! 한국말 잘 하네”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시간이 멎은 듯했다. 아니 역사가 멎은 듯했다. 그 침묵을 깬 건 제주도 할머니였다. “할머니, 뭐하고 있어. 어서 들어가서 짐 싸서 나와! 서방님 따라 가야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본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짐 보따리를 안고 나왔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나란히 집 마당을 나섰다. 누군가 재빨리 지나던 택시를 세웠다. 할머니가 먼저 타고 할아버지가 그 뒤를 이어 택시 뒷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택시는 미끄러지듯 큰길로 나갔다. 두 사람의 뒤태가 택시 뒷자리에서 보였다. 움직임이 없어 보였다. 그 때 누군가가 박수를 쳤고, 이어서 모두가 힘껏 박수를 쳤다. 만세를 부르는 이도 있었다. 우리는 곧 막걸리 파티를 벌였다. 두 분이 도대체 오늘 밤 무슨 얘기를 나눌까? 잘못 끼어진 인생의 단추를 밤새 도로 맞추며, 두 사람은 어긋난 37년 세월을 단 하룻밤의 대화로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밤 새워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 날부터 나는 논문 작업에 복귀했고, 후배는 할머니 집을 두어 번 방문했다고 내게 전했다. 후배는 그때마다 김치찌개와 소주 대접을 잘 받았다고 했다. 두 분은 신혼부부처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소문을 듣고 동장과 구청장이 두 분 쪽방을 방문하여 쌀도 주고 금일봉도 주었다는 소식도 들은 듯하다. 경향신문은 1983년 8월 12일 사회면 톱기사로 두 분의 기구한 사랑과 기적 같은 해후를 ‘한일 부부, 37년만에 재회’란 제목으로 전 국민들에게 소개했다.

그후 나는 유학을 떠났고, 후배는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에 다녔다. 나는 유학 후 귀국하여 후배를 만나 그때 일본 할머니 부부가 어찌 되었냐고 물었지만, 후배도 대학 졸업 후 더 이상 그분들을 챙기지 못했고, 나중엔 연락마저 끊겼다고 했다. 지금 두 분이 살아 계시다면 90이 넘었을 텐데. 정말 살아 계실까? 돌아 가셨어도 못 나눈 37년 사랑의 공백을 두 분은 행복하게 채우셨을까?

  광복절만 되면 가슴 한구석에서 아릿한 통증

매년 광복절 때마다 가슴 아린 추억을 되살렸던 나는 올해가 KBS 이산가족찾기 30주년이라는 특집방송을 보자, 불현듯 일본 할머니와 김 씨 할아버지의 생사가 궁금해졌다. 관계 요로를 통해 알아보니,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1991년에, 그리고 할아버지는 2년 뒤인 1993년에 각각 세상을 뜨셨다고 한다. 두 분은 37년을 생이별했다가 8년을 해로한 셈이었다. 그 8년이 두 분의 애절한 사랑을 보상하기에 충분했을까? 그렇고도 남았으리라. 그분들은 재회 후 하루를 10년처럼 뜨겁게 사랑했을 거라 나는 믿는다. 그래도 못다한 사랑이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마저 꽃피웠으리라. 두 분을 만나도록 나와 여러 거리를 헤맸던 나의 후배 정헌찬 군도 작년에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등졌다. 하늘나라에 가서 두 분의 재회를 빨리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진정, 두 분을 만나게 해 준 일은 내 인생에서 내가 한 일 중 가장 아름다운 일인 듯하다!  

▲ 두분의 사연이 소개된 1983년 8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이 기사에 소개된 두분의 사연과 내가 들은 사연은 약간 차이가 있다. 아마도 한국말이 어눌한 할머니를 통해 들은 것이어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기사에 내 이름은 없다. 당시 논문 작업 중이던 나는 호랑이 같은 교수님이 혹시 이 기사를 보고 공부 안하고 싸돌아 다닌다고 혼내지 않을까를 염려해서 그냥 빼달라고 했다(사진: 경향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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