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중국 언론기관 방문: 1980년대 중국 상하이 여행...중국 언론 기관들과 에드가 스노우 프로그램 활성화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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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중국 언론기관 방문: 1980년대 중국 상하이 여행...중국 언론 기관들과 에드가 스노우 프로그램 활성화 논의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8.15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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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중국 개방을 이끈 중국 언론인들을 교육시키다 / 장원호 박사

1977년부터 외국 언론인 연수를 위하여 세워진 석사 과정의 'Plan C' 프로그램 주임 교수를 맡은 이래, 나의 가장 큰 임무는 새로 생긴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프로그램으로 미주리 저널리름 스쿨에 오는 중국 언론인 교육을 관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정상화된 미중 국교를 바탕으로 미국 경제인들의 중국 진출이 활발해졌습니다. 이에 당시 중국 외교부장 황화는 서방인들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중국의 언론인들을 미국에 교육시키는 방법을 찾게 됐고, 그의 친지이며 미주리 저널리즘 출신인 에드가 스노우의 모교인 미주리대학에 도움을 청하게 된 것입니다. 에드가 스노우는 미주리 출신으로 1930년대 미국 언론 특파원으로서 중국에서 활약했고, 특히 마오쩌둥과 조우언라이 등을 만나서 친분을 맺었고 이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중국 상황을 서방에 소개한 <중국의 붉은 별>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에드가 스노우가 모택동을 만나고 있다. 중국인들은 에드가 스노우를 모택동의 친구로 존경한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에드가 스노우의 <북경의 붉은별> 저서 표지. 무수한 판본 중 하나(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황화는 자신이 주도하는 3S협회(Snow, Smedly and Stone)가 중심이 되어 1980년 여름에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 학장인 로이 피셔(Roy Fisher)를 북경으로 초청했습니다. 북경에 도착한 피셔 학장을 맞은 사람은 1942년에 미주리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북경회보(Beijing Review) 부편집장으로 있던 풍석량(馮錫良)이었습니다.

풍석량은 중국의 개방을 위하여 중국일보 창간 준비를 맞고 있었으며 중국 언론인의 서방 세계에 대흔 교육을 위해 미주리 대학과 공통으로 에드가 스노우 프로그램을 창설한 것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신화사에서 3명, 라디오북경에서 3명, 그리고 북경회보를 발간하는 외국어 간행물 기관에서  3명 등 모두 9명이 2년에 한 번씩 미주리 대학으로 유학 와서 2년 내에 석사학위를 받도록 교육시키는 정식 학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온 중국 언론인들은 학비 전액 면제에다 월 100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중국 정부로부터 받았고, 자신의 중국 근무처에서도 약 300달러 정도의 학비를 지원받았습니다. 당시 그들의 월급이 40달러 정도였으니, 이들이 받는 월 400달러는 중국 형편으로 서는 거금이었지만, 미국의 아파트 월세도 빠듯한 금액이었습니다.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 건물 통로에 중국에서 기증 받은 사자 석등 두개가 마주 보고 서있다. 중국과 미주리 저널리즘 스쿨의 우호적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1980년 에드가 스노우 프로그램의 1차 유학생으로 신화사에서는 뉴욕 지사장을 거쳐 본사의 스포츠 총책을 하다 은퇴한 유기중(劉其中) 외에 오월휘(吳月輝)와 유화영(劉火榮)이 왔고, 라디오북경에서는 당시 부총리겸 외교부장이던 오학겸(吳學兼)의 아들 오황용(吳晄鏞), 그 외에 조학임(曹學任)과 진덕룡(陳德龍)이 선발되었으며, 북경주보의 유유원(劉有源)과 진병강(陳炳剛), 중화화보의 서세민(徐世敏) 등이 왔습니다. 이들 첫 9명은 중국에서 뽑혀온 수재들로서 영어에 능통했고 석사과정 중에도 우수한 성적을 받았습니다.

1980년 가을 학기에는 미주리 저널리즘에 대만에서 유학 온 많은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당시 대만 국부군 현역 대령인 장경운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온 언론인들과 대만에서 온 유학생들 간에 무슨 갈등이라도 있을까봐 크게 걱정했는데, 의외로 서로 돕고 지내는데 무척 놀랐습니다.

당시 대만 출신 교수들이 미주리 대학 전체에 몇 명 있었지만, 모두 자연 계열 교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주리 대학 대만 유학생회의 회장이 저널리즘 학생이었고, 또 처음으로 중국 본토 유학생회가 형성되면서 그 회장이 또 저널리즘 학생이 되자, 이들의 주임교수로 있는 필자가 이 두 유학생회의 지도교수로 추대되어 양쪽에 공정하게 보이려고 특별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10월 1일에는 중국 국경일 행사에 가야했고, 10월 10일에는 대만 국경 행사에도 가야 했습니다. 덕분에 양쪽 행사에 참석하느라 무척 바빴습니다. 에드가 스노우 프로그램의 1차 9명이 1982년에 모두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중국 언론 및 정부 각 분야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에드가 스노우 프로그램의 2차 유학생으로 1982년에 또 9명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는 본인의 영어 실력이나 각 기관의 근무 성적보다는 정치적 배경이 좋은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2차에는 5명이 석사 과정 후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주저앉았으며,  84년의 3차, 그리고 86년의 4차, 88년의 5차가 지속되면서, 중국 언론인 연수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1989년의 천안문 사태로 중국이 어수선 해지면서부터 이 프로그램이 점차 본래의 뜻과 같이 되지 않았고, 또 중국 정부도 더 이상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스노우 펠로우십으로 미주리대를 다녀간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신화사: 오월휘(吳月煇), 유기중(劉其中), 유화영(劉火榮), 진신민(秦新民), 범송구(范頌九), 진문병(陳文炳),  하수지(何守智), 오강(吳强), 양자적(楊子迪), 육유보(陸幼甫), 수량군(隋兩君), 왕수추(王樹秋), 조풍원(曹風元), 혁요명(赫曉鳴), 장지년(張芝年). 

라디오 북경: 조학임(曹學任), 진덕룡(陳德龍),  이평(李萍), 가평(賀平), 우학검(于學儉), 하지훤(夏之宣), 오효용(吳曉鏞), 당효(黨曉), 양심평(楊諶萍). 

北京週報: 유유원(劉有源), 양건(楊健), 진병강(陳炳剛).

이 프로그램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나는 1986년 봄에 신화사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 신화사, 라디오 북경 등 여러 언론기관 관계자들을 만나서 중국 언론인 교육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미주리에서 석사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기관의 중책을 맡은 제자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두 주간의 북경 출장 업무를 대략 마치고 상해로 내려가서 푸단(復旦) 대학교에 일주일 간 강의를 하면서 옛날의 상해를 살펴 볼 기회도 가졌습니다. 1986년 상해는 마치 1960년대 서울과 같았고, 우선 비행장이 1960년대 김포공항과 비슷했습니다. 우리가 타고 간 비행기는 1949년형 구 소련 일루시온 폭격기를 개조한 비행기로 예약 시스템도 없었고, 좌석 배정도 없이 버스 타듯 줄을 서고 들어가는 순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했습니다.

푸단대학을 방문했을 당시 제자와 같이 찍은 사진(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예정된 대로 푸단대학교 간부들과 몇 차래 만나서 대화를 나눴고, 또 특강도 몇 번 했습니다. 푸단대학교는 1905년 청나라 멸망 전에 세워진 학교로 중국의 명문 대학이며, 중국 국제화에 크게 기여했고, 나중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다녀간 곳입니다. 중국이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학생들과 교수들은 모두 어떻게 해야 미국에 갈 기회를 잡을까 하는 것이 제일 큰 관심사였습니다.

당시 비행장은 서쪽 상하이에, 푸단 대학은 동쪽 상하이에 있었고, 비행장에서 푸단대학으로 가는 길은 포장이 망가진 1930년대의 도로였습니다.

푸단대학교 외국인용 아파트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려고 물을 트니, 녹 쓴 물이 나와 기절할 뻔했습니다. 물론 샤워도 못했고 수돗물은 마실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상하이는 서울이나 뉴욕의 맨해튼보다 더 좋은 시설을 가진 곳도 있습니다.

최근 베이징의 friendship store. 북경 우의 상점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당시 상하이에는 외국인 전용 'Friendship Store'가 있어서 음료수에서부터 필요한 생활용품을 살 수 있었으나, 중국인들에게는 가겪이 너무 비쌌습니다. 1986년 상하이에서 제일 유명하고 전통이 있는 평화호텔은 1929년에 캐세이 호텔(Cathay Hotel)로 건립되어 1949년까지 있다가 1956년부터는 외국인 전용 평화 호텔로 영업했습니다.

이 호텔 라운지에서는 악단의 연주에 맞춰 볼룸 댄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재즈 악단은 1949년 중화인민 해방군이 점령할 당시 멤버들이 다시 와서 나팔을 부는 진기한 곳이라며 중국 언론인들이 우리를 이곳으로 초대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 역사적인 왈츠 춤을 추었고, 당시 상하이에서 춘 왈츠는 우리 부부가 오래오래 간직하는 귀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 내외가 만리정성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사진: 장원호 박사 제공)

지금은 상하이 동쪽 '푸동'이 더 크게 개발됐지만, 당시는 상하이 황포강 서쪽 '푸시' 지역이 원래 번창하던 곳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황포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며 중국 해군의 군함과 강변 중국인들의 어려운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상하이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연변지역으로 이동해서 7일 간 그곳을 여행할 계획이 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아내는 바로 서울로 갔고, 나 혼자서 장춘을 거쳐 연변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타려고 상하이 비행장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장춘으로 가는 비행기는 취소가 되었고, 그 안내 방송을 중국어로만 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안내 게시판도 없었으니, 나는 비행장에 혼자 남아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비행장 관리자의 도움으로 관리인들 숙직실에서 그날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장춘 가는 비행기가 없다며, 그 공항 관리자는 나를 옛날 봉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태워 주었습니다. 봉천에서 도착하니, 장춘 가는 비행기가 또 바로 없어서, 나는 기차로 봉천에서 장춘을 거쳐 연변의 연길까지 가야했습니다. 그 과정의 고생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얼마 전 중국을 다시 가 보니 그 발전하는 속도가 한국의 고도 성장기보다 더 빠른 듯했습니다. 그 이유는 1986년의 중국을 너무 생생하게 잘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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