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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나의 조국 한국와의 인연: 포복졸도할 맥도날드 에피소드와 만다린 해장국의 추억[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익숙지 못한 미국 생활이 에피소드를 양산함 / 장원호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8.1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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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나는 LA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신문사에 근무하던 1968년에 골프를 시작했는데, 미주리대 교수협의회 저널리즘 팀 주장을 맡았었고, 또 1975년과 1982년에는 저널리즘 팀을 학교 리그에 출전한 24개 팀 중에서 우승하게 이끌 만큼 골프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 왼쪽 팔꿈치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는데 당시 그것을 잘못 잇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내 왼팔은 조금 구부러져 있습니다. 이런 팔 모양 때문에 내 골프 폼은 좀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나의 이런 '이상한 폼'을 두고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이론이 분분했습니다만, 폼이야 어떻든 나는 엄청난 장타를 자랑해서 덩치가 큰 서양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골프는 나같이 강의실과 연구실을 오가는 게 생활의 전부인 사람에게 확실히 좋은 운동입니다. 대단한 정신 집중이 필요한 운동인 골프는 그것을 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잊고 오로지 골프 생각만 해야 제대로 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집안 일, 학교 일을 생각하면서 골프를 쳤다간 그야말로 '롬빠'를 만들기 일쑤인 게 골프입니다. 골프를 치는 4시간여 동안에는 넓은 공간의 평화로움을 만끽하면서 다른 잡념을 다 떨쳐 버릴 수 있기에 나는 골프를 즐기게 됐습니다.

또 한 가지 골프의 매력은 그것이 '놀음'과 비슷하는 것입니다. 놀음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돈을 잃었을 때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큰 돈을 땄을 때의 일만을 생각하며 계속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골프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못쳤을 때보다는 공중으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뻗어 나가던 그 한 차례의 즐거운 기억 때문에, 우리는 골프를 치고 또 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초보 시절의 일이고, 골프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그 때부터는 '자기와의 싸움' 때문에 또 골프를 하게 됩니다. 자기와의 싸움이란 언덕과 모래밭과 호수 같은 코스 장애물을 보면서 어떻게 쳐야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통신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세계의 지리적 거리가 점점 짧아져 미국으로 연수 오는 요즘의 한국 언론인 중에는 미국을 잘 모르고 오는 경우가 거의 없고, 미국 언론인보다도 해외 여행 경험이 많은 경우도 흔합니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 유학생들이나 교포들은 미국 생활에서 문화 충격이나 언어 장애로 인한 에피소드를 상당히 많이 남겼습니다,

오랜 기자 생활을 하다가 50이 넘어서 미국으로 연수를 온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언론인 한 분이 컬럼비아에 왔습니다. 이미 중고등학교 다니는 두 딸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 등 3명의 자녀가 있는 이 기자는 컬럼비아에서 다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세 명에 부인이 다시 아기를 낳았으니, 그 고생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처럼 친척이나 가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자동차 운전도 겨우 배운 처지여서 생활하기가 여간 힘들고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집에 있는 아이들 3명이 점심에 맥도날드의 빅맥을 먹겠다고 해서 맥도날드에 가게 됐습니다. 마음이 바쁘기도 하고 급하게 말하다 보니 “Three Bic Mac”이라고 이 기자가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맥도날드 종업원은 'Thirty Bic Mac' 으로 잘못 알아듣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Thirty Big Mac을 시키는 것을 보니, 집에 배고픈 사람이 많이 있군요?”라고 확인을 했는데, 이 말을 기자는 친절한 인사로 착각하고 “Yes”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후 한참을 기다리니까, 점원이 빅맥 30개를 가지고 오더라는 것이다. 30개가 아니라 3개라고 따지기도 싫고, 또 그 정도의 돈도 가지고 있어서 그는 결국 30개의 햄버거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맥도날드 햄버거 로고. 맥도날드의 빅맥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햄버거 중 하나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후 몇날 며칠을 빅맥만 먹던 아이들은 아빠의 심각한 '사건'을 모르면서 왜 하루 세끼를 빅맥으로 때우느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시 유학생들과 언론인들은 지금도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연수 온 언론인들이 미국 식당에 가서 마음 편하게 척척 주문하고 또 주문한 음식을 즐기고 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복잡한 미국 음식 때문이기도 하고 언어 문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국 식당에서 자유롭게 미국 음식을 주문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미국 어느 도시를 가나 중국 음식점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곳 컬럼비아에도 중국집이 13개나 있고, 이중에는 대부분이 한국 출신 화교들로서 서울에서 중국집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한국 화교들이 대거 미국으로 온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이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룩한 1970년대 후반 또는 1980년대 초에 배타적인 이민 정책을 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은 외국인에 대한 부동산 취득 금지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돈을 벌어도 건물을 구입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세를 들어 음식점을 경영할 수밖에 없었던 화교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컬럼비아에는 ‘만다린’이라는 중국 음식점이 있는데 이 집은 특히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 식당은 왕 씨와 장 씨 남매 가족이 경영하는데 누나인 왕 씨 내외는 서울의 화교 학교 교사였으며, 장 씨 내외는 대구 근처에서 식당을 경영했습니다. 장 씨와 왕 씨 가족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들로서 우리말을 한국 사람들처럼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국식 중국 요리를 우리말로 주문할 수 있고, 또 음식 맛을 제대로 주인에게 전해서 우리 입에 맞는 요리를 시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만다린은 정말 한국인이 사랑하는 중식당이 됐습니다. 일부 한국 학생들은 짬봉 비슷한 매운 면요리를 해장국이라 생각하고 즐겨 찾기도 했습니다.

미국에는 어느 소도시를 가도 1개 이상의 중국 음식점이 있을 정도다. 최근에는 뷔페집도 많다. 미국 중국집 음식은 중국 본토의 음식보다 훨씬 짜서 미국화됐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이곳에는 한국 음식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라 부르던 이 음식점은 오래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한국 학생이 250여 명이나 되니 잘 될 것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식당은 도대체 수지를 못 보고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한국 유학생들이나 언론인들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한식당이 없어졌으니 어슬렁어슬렁 학교를 빠져나가 미국인들이 가는 식당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입맛이 영 달라서인지 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태리 식이나 멕시코 식 음식점에 갔다가 모두 큰 재미를 못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한국 음식에 대한 집착은 참 묘합니다. (9)-6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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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희 2017-09-21 21:02:19

    수지 맥도날드에 약 2년 전 중2 딸아이의 점퍼가 없어져 매니저에게 말했더니 무시해서 엄마인
    제게 전화해 맥도날드로 갔어요.
    제가 가서 매니저에게 cctv를 보자 했더니 경찰이 오지 않으면 공개할수 없다하여 경찰을 불렀습니다.
    막상 경찰이 오니 cctv가 옛날부터 고장이 나 있다는데 고치질 않았다는군요.전 애 점퍼땜에 간 거지만 혹 성추행이나 유괴가 있었음 어쩔 뻔 했냐고 따졌지만 매니저는 죄송하다는 사과나 얼굴빛도 안 변하고 제게 따지거나 변명하기 바빴어요ㅡ

    맥도날드 자체가 었어요.
    여전히 안 고쳐져 있을겁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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