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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딜레마…양다리 걸치기와 코리아 패싱대북 제재 동참이냐, 대북 대화 주도냐 확실한 양자택일할 때 /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2005년이던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동북아균형자’론을 들고 나온 적이 있다. 강대국의 세력이 팽팽하게 맞선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이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중재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게 그 주장의 골자다. 제국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구한말 당시, 청,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세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약육강식의 제물이 돼 멋대로 찢기고, 결국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픔을 더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미-일 해양 세력 연합과 중-러 대륙 세력 끼리의 패권 다툼의 경계선에 놓여 양쪽의 압력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인 노릇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2005년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불안정한 동북아 정세에서 안정과 평화 보장의 질서를 형성하는 데 한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동북아 균형자론’을 본격 제기했던 것. 글쎄, 참여정부가 이런 주장을 꺼낸 배경이랄까, 그 선의는 지금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의심쩍은 시선을 받고, 국내 보수 세력의 집중 공격 속에서 ‘찻잔 속의 태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보수 세력들은 노 전 대통령의 정책을 전통적인 한-미 동맹을 깨는 위험한 불장난으로 보고 강력히 반발했던 터다.

진보 세력조차도 “미국의 세력이 압도적인 판국에 과연 균형자 노릇이 가능할까”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았던가.

어쨌든 노 대통령의 선의와 의욕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이 떨어진 정책이었다는 주장은 크게 틀리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했던 대로 한국이 독립적인 위치에 서서 양쪽에 휘둘리지 않고 중재자 노릇을 할 수 있으려면 경제적, 국제정치적으로 그만한 실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한 상황에서 주변 열강들이 어디 우리말을 들어주려 했을까. 특히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크게 신세지고 있는 터에 미국의 은근한 압력을 뿌리치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중화주의로 무장한 중국과 툭하면 행패 부리는 동네 소악패인 북한을 상대하는 것도 쉬운 노릇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균형자론’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길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비슷한 국면이 12년이 지난 지금 재연되고 있다. 북한의 잇따른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실험으로 국제 정세가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히 긴장돼 있다. 북한의 ICBM이 급기야 미국 본토를 위협할 지경이 되자, 미국도 긴장의 빛을 띠기 시작하고, 일본은 북한의 발사 실험이 있을 때마다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다. 그런 와중에 엄포만 놓던 미국 트럼프 정권도 뭔가 구체적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나 하고 본격적인 숙고에 들어간 모양새다. 그러니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떨어트리고 평화 무드를 구축해야 할 처지인 문재인 정권으로서도 고민이 적지 않을 수밖에.

사실 문재인 정권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환경은 노무현 정권 때보다 훨씬 더 엄혹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상대했던 부시 정권도 벅찬 상대임에 틀림없었지만 지금 트럼프 정권은 좀 더 터프하고 막무가내가 아닌가. 게다가 그 때는 김대중 정권이 열어놓은 대북 화해 국면 덕에 남북 관계가 지금보다는 훨씬 좋았던 터다. 게다가 지금은 북한의 잇따른 도발에 국제사회의 여론도 크게 악화된 마당이다.

다들 알다시피 집권 석 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보여 준 문재인 정권의 대북 정책은 ‘당근과 채찍’ 정책이랄까, ‘양다리’론이다. 핵·미사일 도발에선 미국, 일본과 공동 보조를 취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북한을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불러낸다는 게 그것이다. 그러기에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이 있을 때마다 북한을 비난하고 맞대응식 한미 군사훈련에 나서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론 베를린에서 냉전구도 해체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위한 한반도 평화구상을 제시했다. 북한에 휴전선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회담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던 터다.

문재인 정권이 이런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외자의 눈으로서도 알만 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용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임 보수 정권들처럼 무작정 문을 걸어 닫을 수도 없으니 강온 양면 대응을 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양다리 걸치기 신공(?)이 그리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비유가 좀 거칠지만 자칫하면 길짐승과 날짐승의 싸움에서 요리조리 피한 끝에 양쪽으로부터 왕따 당한 박쥐 소리를 듣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실제로 사드 배치 문제로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박쥐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하다. 우리로선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처지라 하겠지만.

그래서 요즘 다시 회자되는 게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란 소리다. 문법에도 없는 엉터리 영어라지만 어쨌거나 ‘한국 왕따론’ 아닌가. ‘저팬 패싱’이 원조이다. 미국과 중국 관계가 잘 풀릴 때 일본 언론이 ‘저팬 배싱(Japan bashing 일본 패주기)’, ‘저팬 낫씽(Japan nothing, 일본 완전 무시)’이니 해 가며 일본이 동북아의 흐름에서 소외되는 게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 때 이 국적 불명의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어쨌거나 요즘 일부 언론과 야당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외 정책이 ‘코리아 패싱’을 불러온다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새 나오고 있다. 글쎄, 정권 출범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태클을 거는가 싶기는 하다. 게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도 ‘코리아 패싱’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고 보면 약간 과장된 비난 같긴 하다. 그렇더라도 예사로 넘길 문제만은 또 아닐 터이다.

지난 6월 말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풀어갈 생각이니 운전대를 넘겨달라고 요청했고, 트럼프도 이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미국이 한국에 운전대를 넘겨주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발상. 미국으로선 문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니까, 일단 알아서 해 보라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여 줬을 뿐 적극 동의한 건 아닐 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자 최근엔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까지 시사했대서 논란이 아닌가.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이 죽는 것은 그쪽(한반도)이지 미국 본토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는 거다. 미국으로선 중국을 압박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에 나서 보고, 안 된다면 북한을 직접 상대할 심산일 거다. 그게 전쟁이 됐든, 협상이 됐든.

중국도 트럼프 정권의 대북 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중국으로선, 말 잘 안 듣는 김정은이 성가시지만 그렇다고 김정은 정권이 무너져서 압록강까지 미군부대가 밀고 올라오는 사태는 용인하기 어려울 거다. 그래서 어떤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한 김정은 정권을 무너뜨리고 핵을 폐기하는 대신 북한에 친중 정권이 수립되는 걸 묵인한다는 카드를 들고 중국과의 협상에 나설 것이란 추측도 하는 마당이다. 만약 미국과 중국(그리고 러시아와 일본까지 곁다리 끼여서)이 한반도의 그랜드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은 소외되고 통일은 요원해진다.

북한은 또 어떤가. 다들 아는 대로 김정은 정권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펑펑 쏘아대는 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목적이 아니겠는가. 핵보유국 자격을 인정받고 미국을 상대로 ‘갑’ 노릇을 하면서 수교도 하고 평화협정도 맺고 해서 체제 안정을 보장받으려는 거다. 그러니 지금 단계에선 북한은 한국이 안중에도 없다고 봐야 한다. 미국과의 협상이 풀리면 남한과의 관계 개선은 보너스로 오는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러니, 군사회담이건, 적십자회담이건 아예 ‘생 까고’ 묵살하는 것.

그러니 딱한 것은 남한 정부다. 미국이 은근히 견제하지, 사드 문제로 중국과도 사이가 벌어졌지, 그런 판국에 북한과도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는 것도 아니니 어디 등 비빌 언덕이 있어야 말이지. 그러니까 ‘코리아 패싱’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문재인 정부의 고심이 앞으로 더욱 깊어질 것 같다.

문재인 정부의 사드 대처는 아쉬움이 많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사드 문제는 차기 정권에 넘겨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던 터다. 취임 후에도 그 문제를 가지고 보수와 군부 세력에게 군기를 잡기도 했다. 그런데, 정권을 잡기만 하면 사드 배치 재검토를 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다가 결국은 임시 배치니 뭐니 구차하게 토를 달아 배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결국 미국 요구에 따를 것 같으면, 전 정권과 황교안 대행 시절 완료되도록 모르는 체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랬으면 새 정권이 짊어져야 할 부담도 훨씬 가벼워졌을 테고 미국의 불만을 사지도 않았을 거다. 반대로,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큰 소리를 친 만큼 아예 사드 배치를 백지화했으면 미국의 불만은 사더라도 중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됐을 거다. 결국 양쪽 눈치보다 두 나라로부터 욕은 욕대로 먹는 형국이니 말발이 잘 서지 않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이도 저도 아닌 양다리의 결과다.

대북 관계도 마찬가지.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은 미국 대신 평양을 먼저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보수 쪽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미국부터 다녀왔다. 미국을 먼저 다녀왔다고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려면 평양 먼저 가겠다는 둥 안 해도 될 소리는 처음부터 안 하는 게 나았을 거라는 거다. 북한 입장에선 문재인 후보의 발언을 듣고는 ‘정말로 우리와 잘 해보려는 건가’ 하고 기대했다가 ‘그러면 그렇지’하고 더 태도가 경화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북한 편을 들려는 건 결코 아니지만, 하루는 미국-일본 등의 대북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가 다음날은 대화하자고 하니 쉽게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요약하자면, 앞으로는 지키기 어려운 소리를 함부로 꺼내지 말라, 그리고 최소한의 일관성을 지키라는 거다. 이익 충돌이 첨예한 국제 관계에서 양쪽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긴 어렵다. 중국 속담에 ‘양주의 학(楊州之鶴)’이란 게 있다. 이런 이야기다. 네 사람이 모여 자기의 소원을 말하기로 했다. 첫 번째 사람은 “나는 억만금을 벌어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두 번째 사람은 “나는 양주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세 번째는 “나는 돈도 벼슬도 다 싫고 신선(神仙)이 되어 학(鶴)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싶다”고 했겠다. 그러자 마지막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십만 관의 돈을 옆구리에 차고, 학을 타고 양주자사로 부임하고 싶다." 세상에 돈도 벌고, 권력도 얻고 신선이 되는 길은 없다.

당분간 미국의 노선에 따라가든지, 아니면 미국이 좀 섭섭해 하더라도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좀 더 현실적인 제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미국, 중국, 북한 둘 다 만족 시키는 해법은 없는 거다. 눈치 보기만 하면 모두의 인심만 잃고 얻을 건 없을 성 싶다.

북한에 대한 대화 제의도 마찬가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선언’도 마찬가지였지만, 베를린에서 세계 사람 앞에 대놓고 일방적으로 북한더러 대화에 나오라고 한대서 과연 북한이 응하겠는가. 북한은 망신주기라 생각해서 오히려 더 열만 받을 뿐이다.

정말 북한과 협상하겠다면, 일단 양 당사자끼리 비밀 접촉이라도 해 보라. 그래서 마주 앉아 서로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타진하고 접점을 찾아보는 편이 생산적일 거다. 그런 비밀 접촉이야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도 한 것이니 크게 문제될 것도 없잖은가. 전쟁 중에도 적과의 비선 협상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코리아 패싱’을 당하지 않고, 한반도 문제에 대해 제대로 운전수 노릇을 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다. 북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카드는 둘밖에 없다.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 아니면 협상. 말이 그렇지 북한에 대한 선제 타격은 거의 불가능한 카드다. 그럼 결국은 북한과 협상에 나설 거다. 북핵 문제에 미국이 독박 쓰기 싫어 만들었던 기왕의 ‘북핵 6자회담’이 좌초한 마당이니 이번엔 미국-북한 양자 회담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미국과 북한의 협상이 성공한다면, 미국은 핵 프로그램 폐기(혹은 IAEA 사찰 허용을 조건으로 한 동결)에 따른 대북 경제 지원 부담은 죄다 우리에게 떠넘기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손가락 빨고 지켜보다가 우리는 아무런 결정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는 뭔가를 하려면 확실히 해야 한다. 미-일과 연합해 확실히 대북 제제에 나설 건가? 그게 아니라면 북한과 확실한 평화 협상에 나설 건가? 뭘 하든 하나를 골라 확실히 하는 게 낫다. 대북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해서라도 태도를 확실히 정해야 한다. 이쪽 저쪽 눈치 보는 양다리 걸치기 끝에 양쪽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게 바로 ‘코리아 패싱’ 아닌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편집국장 강동수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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