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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 70년대 데모와 휴강 속의 한국 대학 현실을 우려함[제2부 보람 찾는 언론학 교수] 한국에서 생애 첫 학생 제자 주례 서는 경험을 갖다 / 장원호 박사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8.03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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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15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해도 한국어로 일상생활하는 데는 별로 지장이 없었으나, 한국어로 강의를 잘 해 보겠다는 욕심에 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우려 강의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던 1979년 가을, 이 시기는 한국 정치의 중대한 전환기로써 학생들의 정치 참여가 과격한 시기였기에 학부 강의는 몇 번 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그 와중에도 대학원 강의는 휴강 없이 진행됐습니다. 1979년 가을의 고려대 캠퍼스나 한국외대의 교정은 마치 전쟁터 같았고, 특히 최루탄 가스를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에게는 아주 곤욕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미국에서 3학점 짜리 한 강좌는 대개 하루에 몰아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일주일에 하루 1시간 씩 3일 3회, 총 16주 동안 42-45회 강의를 해야 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절 한 대학의 데모 모습(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가 한 학기에 1회 이상 휴강이나 결강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나도 늘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데모에다 축제라는 이름 아래 한 주일을 몽땅 놀고, 또 시험기간이라고 휴강하고, 이래저래 학부는 한 시간 단위로 봤을 때 20회의 강의도 못하고 한 학기를 끝내게 되니, 한국 대학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게 한국의 큰 문점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대학원 강의의 경우, 한국 학생들에게 미국처럼 한 주에 평균 200페이지 정도의 책을 읽으라는 과제를 내주고, 또 그 내용을 리포트로 작성해서 발표하도록 하는 강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그렇게 많은 자료가 도서관에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그만한 양의 영문 자료를 읽을 수 있는 학생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 교수, 특히 신참 조교수의 경우, 강의를 잘하는 것은 승진과 '테뉴어(tenure: 종신직)’ 심사와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미국 대학들은 매 과목마다 학기말에 학생들이 직접 교수와 교과 내용을 평가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당시 한국에는 학생이 교수를 평가하는 그런 제도가 있을 수도 없었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의 모든 대학들이 학생들의 교수 평가제도를 모두 도입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교수 평가는 무기명으로 30여 가지 강의에 대한 질문지에 학생이 표시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그 평점 결과는 표준수치로 전환되어 모든 교수들의 강의 내용, 강사의 준비 상태 또는 강의 능력을 수치화합니다. 그리고 이 수치는 교수 개개인이 전체 교수들 수치와 비교했을 때의 위치 등을 파악하게 해줍니다. 

지금은 모든 한국 대학들도 학생들의 교수 강의 평가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1979년에는 단 한 대학도 이를 실시하지 않았다. 사진은 한 미국 대학의 강의 평가 질문지 양식이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미국에서도 학생들의 교수 강의 평가 방법이 얼마나 정확하냐에 관해 이견이 많지만, 이 제도는 미국 대학 교육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지금까지도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시 나는 한국에도 이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국 교수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으나, 모든 교수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 제도가 잘못 이용되어 대학 교육에 오히려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2000년 전후해서 이 제도가 한국에 도입되었다고 들었으며, 이 제도는 현재 한국 교수들의 강의 내용을 증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조교수 시절에 아무리 열심히 강의해도 공부 열심히 안하는 몇몇 학생들이 교수가 강의를 잘 못한다거나, 특히 외국인이어서 언어를 잘 못 알아들어 문제가 있다고 뒤집어 씌운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학생들의 비판이나 불평을 받아 가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나는 강의를 잘하는 교수로 대학에서 상도 받았고, 또 학교 내 교수 사회에서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내가 원칙적으로 하고 있는 강의 기술은 ‘브리핑’ 방식입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농촌진흥청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5.16 혁명이 났는데, 농사 연구의 어려운 과정을 군인들에게 설명할 때 브리핑 차트를 수없이 만들어 그것을 설명한 경험이 많았습니다. 강의를 그런 브리핑 식으로 하면 대부분 무난했고 거기에다 교육적인 농담까지 끼워 넣으면 금상첨화였습니다.

서울에서의 강의는 미국에 비하여 쉬우면서도 어려웠습니다. 강의 내용이 좋든 나쁘든 무표정하게 고정된 학생들은 도대체 질문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강의 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해도 곤욕스러운 경우를 당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교수의 사감(私感)으로서는 편하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학생들의 그런 태도는 전통적인 스승 존경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학생들이 스승을 섬기고 어려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준비를 잘 안 해 갔을 때에도 쉽게 강의를 끝마칠 수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학생들의 그런 태도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도 참 많았습니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 필요한 참고 서적이 도서관에 없어서 학생들이 읽어야 할 자료가 부족한 때가 많았으며, 또 학생들 대부분이 열심히 사전에 강의 준비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자신이 발표할 차례인데도 억지로 잡아 끌어내야 겨우 몇 마디 하는 정도였으니 소위 학습자와 교수 간의 상호작용을 통한 교육을 이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미국 대학의 강의실 모습이다. 미국 학생들은 강의 중 질문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손을 들어 의사를 표한다. 그러면 교수가 적당한 타이밍에 강의를 중단하고 질문을 받은 다음 강의를 이어간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한편, 미국에서의 강의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교수는 학부나 대학원 강의 모두 강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며, 강의는 교육 정보를 학생들에게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프리젠테이션 기술을 활용하여 이해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하는 식으로 주입식 강의를 했다가는 강의 도중 졸고 불평하는 학생들이 나오기 마련이며, 학기말 교수 평가에서 참담한 비판을 받기 마련입니다.

특히 대학원 강의의 경우, 일주일에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내주는 과제의 분량이 평균 200여 페이지나 되니, 교수도 그 이상을 읽지 않고는 강의를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또한 미국 강의는 아무 때나 튀어 나오는 학생들의 질문 공세에 적응하기가 힘듭니다. 특히 조교수 시절 사방에서 튀어 나오는 학생들의 웅얼거리는 질문 자체를 잘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 답변도 시원하게 못 하고 지나갔다가 고생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 초년병 시절, 하라는 공부는 제대로 못한 학생들이 나의 언어 장애 때문에 잘 못 배웠다는 불평이 나올 때는 매우 가슴이 아팠습니다.       

서울에 있는 노 교수들은 제자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는 것이 상례이지만, 미국에서는 법적으로 성직자말고는 주례를 서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 교수가 주례를 선다는 것을 미국 교수들에게 설명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고대에서 같이 강의하던 이세기 박사가 김흥규 군을 소개하면서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려고 하니 도와 달라고 내게 부탁했고, 김 군을 만나보니 훌륭한 자질과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여, 미주리 대학에 전격적으로 입학시킨 뒤 내가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가는 1980년 1월에 미국으로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12월 초에 김 군은 약혼자가 있어서 12월 중에 결혼하고 유학을 가겠다고 하면서 나에게 주례를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례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다른 교수에게 부탁하라고 했지만, 결국은 내가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하객을 초빙해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고 들었을 때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수십 건씩 주례를 한다는 정대철 의원에게 이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별로 힘들 것 없다면서 아예 각본을 적어서 주례 요령을 일러 주기까지 했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을 상대로 강의는 해본 경험이 많았지만, 수백 명의 하객이 모이는 결혼식 주례는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이 젊은 신랑신부의 평생 가약을 내가 주재한다고 생각하니, 벅찬 일이라고 생각되면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지금도 자세히 기억 못할 정도로 결혼식은 긴장 속에 끝마쳤습니다. 신랑신부와 찍은 사진에서는 표시가 나지 않었지만, 그후 그 결혼식 비디오를 한 번 보자고 하면, 그들 부부가 무슨 핑계라도 대면서 안 보여 주는 것을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당시 주례사의 요점은 대개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이들이 결혼식을 마치고 곧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어 있고 또 그 기간이 5년 이상 걸릴 터인데, 그렇게 하려면 부모님들을 가까이 모시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므로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남녀 위치가 한국과는 다른 서양 문명에서 생활할 때 겪어야 하는 갈등을 서로의 이해와 사랑으로 풀어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날 주례사는 내가 살아오면서 깊게 느꼈던 인생관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주례사를 통해서 이 젊은 두 남녀에서 무슨 감명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내 밑에서 5년 동안 석박사 학위를 마칠 때까지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다 보니, 내 주례사의 뜻을 실천하는지를 옆에서 감독까지 한 셈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내가 당시 주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 교수는 학위를 끝내고 한국외대 교수가 되어 앞에서 언급한 윌리엄 스티븐슨 박사가 고안한 Q방법론 학회를 한국에서 설립하는 등 열심히 연구하고 후학을 지도하다가, 2013년 12월 본인 환갑을 바로 앞에 두고 김흥규 교수는 그만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나는 김 교수의 부고를 받고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9)-4 나의 조국 한국과의 인연에서 계속.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reporter1@civic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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