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Small, Slim Korean Wed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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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mall, Slim Korean Wedding
  • 정태철 시빅뉴스 대표
  • 승인 2013.06.1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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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꽃피는 봄과 함께 시작된 또 한 해의 결혼 시즌이 초여름이 다가고 한여름에 접어들어도 끊이질 않고 있다. 챙겨야 할 지인들의 혼사로, 주말에 쉬기도 바쁜 한국 사람들은 차 막히는 예식장 주변을 헤매다 지친다. 나는 고향이 대전인 관계로 수시로 부산에서 대전으로, 또 서울로 하객 원정을 가게 되니, 축의금에 ‘물류’ 경비까지 감당하기가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나는 잠시 내 인생에서 결혼식과 무슨 인연들이 있었는지 역사적 고찰을 하고 싶어졌다. 대충, 나의 결혼식 역사는 3기로 시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결혼식 역사 1기는 20대에 친구들의 결혼식에 관여하면서 시작되어 내가 결혼할 즈음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 남자들은 함을 팔고, 여자들은 꽃값을 챙기며, 한 친구 결혼하는데 주변 친구들은 대략 1, 2주일은 족히 왁자지껄한다. 이 시기에 나는 신방과 출신이란 타이틀 덕분에 곧잘 먼저 장가간 친구들의 결혼식 단골 사회자였다. 나는 서른에 장가를 갔는데, 대개 30을 안 넘기고 결혼하던 1980년대에는 그게 만혼이었다.

그러던 내가 대학 선생이 된 까닭에 43세 청춘에 주례가 되어 나의 결혼식 역사 2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첫 주례 부탁을 받고 검은 머리가 대부분이었던 내가 중압감에 빠지자, 원로 교수 한 분이 이혼 경력 없고 아들 낳았으면 교수로서 주례는 제자에 대한 거절할 수 없는 ‘애프터 서비스’라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겁 없이 주례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나는 졸지에 주례사를 연구해야 했다. 대개 대학 교수 주례사는 ‘첫째,’ ‘둘째’를 들먹이는 강의식이었다. 반면, 국회의원 주례사는 ‘국민 여러분,’ ‘오늘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맞아’ 같은 거창한 단어로 시작됐고, 심지어는 자신의 의정 보고를 겸하는 정치 선전이 되기 일쑤였다.

내가 직접 참석해 들은 희대의 주례사는 신라 향가를 해독한 ‘자칭 국보’ 고(故) 양주동 박사의 것이었다. 주례 말씀 내내 하객들은 웬만한 개그보다 더 웃기는 주례사 때문에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던 해학 그 자체였다. 한국의 석학 이어령 박사의 주례사를 직접 들을 기회도 있었는데, 위트와 지성이 넘치는 주례사의 백미였다.

그런데 진작 결혼식 주례사의 문제는 들어야할 당사자 신랑신부는 경청할 경황이 없고, 대부분 나이 들고 기혼자인 하객들은 진부한 주례사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게 되는 제자들에게 주례사다운 주례사를 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큰 방향 전환을 했다. 나는 주례를 요청한 제자 예비부부를 꼭 연구실로 불러 장장 한 시간도 넘게 스승이 주고 싶은 결혼의 교훈을 말해준다. 그리고 축의금 접수와 혼주에게 눈도장 찍는 것이 주목적인 하객들에게는 신랑신부가 만나서 결혼하게 된 연애 스토리를 들려주고,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기억하여 부디 잘 살게 도와 달라고 하객들에게 ‘엄중’ 부탁하는 형식의 주례사를 하게 되었다. 그래야 신랑 친구들이 “신부는 신혼 때 길들여야 한다”며 신랑을 술자리에 밤늦도록 붙잡고 집에 안 들여 보내는 철없는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자기가 간 결혼식이 지인의 딸 혼사인지 아들 혼사인지는 기억할 것이 아닌가.

이제 결혼하는 제자들을 맘껏 축하해주면서 주례를 즐기는 경지에 오르자, 나에게 결혼식 역사 3기가 다가왔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지인들의 자녀 결혼식이 잦아진 것이다.

10년 넘게 연락 한 번 안 하던 고향 친구가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안부를 묻고 반갑게 통화하면, 1주일 후 그 친구의 자녀 혼사 청첩장이 날아들었다. 동창회 모임에 잘 나오지 않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 참석자 전원에게 청첩장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속 보이는 이들의 청첩을 어찌해야 할까?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축의금은 내야하나, 무시해야 하나? 가르치고, 연구하고, 학생들 취직시키느라 등골이 쑤시는 나는 밀려오는 다양한 연유의 청첩장을 놓고 골머리를 싸매게 되었다.

그게 나뿐일까? 나는 최근에 애인이 생겼다는 내 아이 소식을 접하자 아직 1, 2년 내의 문제는 아니지만 점점 커가는 내 자식의 장래 혼사 문제를 진지하게 아내와 상의하게 되었다.

누구에게 청첩장을 보낼 것인가? 결혼식장은 어느 수준으로 잡을 것인가? 혼수는? 예단은? 끝없이 솟아나는 결혼식 문제에 대하여, 우리 부부는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단호하게 간소한 결혼식으로 가고 아이들의 행복만 생각하자고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술 더 떠서 청첩장은 아예 돌릴 생각도 하지 말자고 화답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서로 합창하듯 지금까지 우리가 낸 축의금은 다 잊자고 했다. 올해가 우리 결혼 28주년인데, 이렇게 우리 부부의 뜻이 통한 적이 있을까 서로 놀랄 정도로 쉽게 우리 부부의 의기가 투합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 근본적인 난관이 있었다. 결혼은 상대가 있기 마련이고, 장차 생길 사돈의 의사가 우리와 전혀 다르다면 어쩌나? 괜히 부모의 고집이 자식의 혼사를 망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철학이 지배하니, 부차적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다음과 같은 자녀 혼사 결의안에 일사철리로 합의했다.

-청첩장은 돌리지 않는다.
-우리 형제, 친척 어른, 아이들 지인 등 ‘결혼식 사진 촬영’에 문제가 없는 선에서 제한적으로 초대한다.
-우리 손님 식대는 우리가 부담한다. 모든 축의금은 사양한다.
-우리의 간소한 결혼식 제의에도 불구하고 호화 결혼식을 고집하는 사돈을 만나면 어찌할까? 자기 손님은 자기가 알아서 부르면 된다. 신랑 측, 신부 측 손님수는 어차피 동수일 수 없고, 많은 쪽이 적은 쪽으로 가서 앉게 되면, 결국 ‘피아’ 구분은 안될 테니까. 그리고 음식값, 식장 비용은 손님수 비율대로 각자 부담하면 되리라.
-혼수와 예단은 하객과 예식장 문제가 아니라 혼주 간의 문제이므로 혼주끼리 협의하는 대로 따르면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는 앞으로 꼭 인사해야 할 결혼식만 엄별하여 참석할 것이고 축의금도 가려 낼 것이다. 그리고 축의금에 관한 나의 대차대조표는 꾹 참고 만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맘 통하는 사돈’을 만나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깊이깊이 희망하고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바로 지난 주말에도 나는 선배의 자식 혼사로 대전에 다녀왔다. 식사 자리에 동석한 친구들에게 나의 결심을 밝혔다. 특히 내 친구들조차 초대 받지 못할 손님이 된다는 대목에서, 찬반이 분분했다. 그게 그날 최대의 식사 반찬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우리가 언제 서로 친구 자식의 삶을 샅샅이 챙겼냐고. 그리고 가끔 만나 자식 얘기가 나오면, “응, 그 애 대학 갔어,” “응, 걔 취직 했어.” 그런 게 다 아니었던가. 그럼 친구들에게 안 알리고 아들 장가를 보낸들 나중에 친구들끼리 나누는 얘기는 “응, 걔 장가보냈어,” “응, 나 손주 봤어.” 이게 다 아닐까?

실제 상황에 부닥치면, 결심대로 잘 될지는 나도 모른다. 아직도 한국적 결혼식 풍경이 대세인데 뭘 이런 것을 공개적으로 칼럼에 적느냐는 주변의 비판적 여론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결혼식을 둘러싼 만인의 ‘불편한 고민’은 언젠가 끊어야 한다는 생각만은 확고하다.

2002년에 ‘나의 그리스 식 웨딩(My Big, Fat Greek Wedding)’이란 영화가 있었다. 그리스 이민 2세 신부 가족과 미국 신랑 가족의 옥신각신하는 결혼 스토리가 친구, 친지가 모여 먹고, 마시고, 춤추며 하루 종일 결혼식을 축하하는 그리스 식 축제로 해피엔딩하는 영화였다. 많이 모였으면서도 서로가 해피하지 않은 ‘한국식 웨딩’은 ‘My Small, Slim Korean Wedding’으로 변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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