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2 네바다 도박장의 아르바이트 학생 / 장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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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2 네바다 도박장의 아르바이트 학생 / 장원호
  • 미주리대 명예교수 장원호 박사
  • 승인 2017.07.1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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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고학하는 유학생]아내의 합류로 힘을 얻고 두고온 아이들 걱정 속에서 석사 과정에 입학하다

[⑤-1 네바다 도박장의 아르바이트 학생에서 계속] 어느 날 새벽 2시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부자처럼 보이는 중년 사나이가 내가 일하는 바에 와서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걸어왔습니다. 그는 호수 북쪽에 고급 별장을 가지고 있는데 엉터리 정원사가 잔디를 다 죽여 놓고 도망 가는 바람에 속이 상해서 술 한 잔 했다는 팔자 좋은 사나이였습니다.

미국에 오기 전 내가 UN에서 담당한 업무는 토양 비옥도를 조사하는 유엔 기금 사업이었습니다. 나는 비록 행정요원이었지만 토양의 성격이 어떻고 비료의 3요소인 NPK(질소, 인, 칼륨)를 어떤 비율로 배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상당한 기술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상식만 믿고 농산물에 비료를 주듯 잔디에도 비료를 주어 가며 키우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생전 생각도 해보지 않은 잔디 키우는 일이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고, 며칠 후 그 별장을 찾아 가겠다고 그 부자 손님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잘난 체하고 나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날 밤부터 나는 타호 호수 주변을 속속들이 찾아서 잔디 키우는 책을 구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을 갖고 약속한 날 그를 찾아갔습니다.

네바다 주 타하 호수 주변에는 고급 별장들이 들어서 있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호수가에 바로 위치해 있으면서 고급 배가 정박해 있는 그 별장의 잔디는 정말 엉망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전문가라도 되는 듯이 며칠 동안 책에서 배운 실력으로 잔디 키우는 강의를 주인에게 하자, 주인은 집 잔디를 나에게 맡기기로 결정하고 재료비까지 선불로 주었습니다.

4000m가 넘는 고원 지대에서 잔디를 키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을 찾아다니다 그곳 잔디를 잘 아는 정원 관리 상점을 찾았고, 그쪽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잔디 씨를 구해 그 집에 뿌렸습니다(한국 잔디 종은 잔디 일부를 심어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키우지만, 미국 잔디 종은 대개 씨를 심어 키운다). 7월의 더운 여름에 산 밑은 39도가 넘는 날씨가 계속되었지만, 로키 산맥 속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길가에 눈을 볼 수 있었고 아침 저녁으로는 스웨터를 입어야 할 정도로 날씨가 차가웠으며, 새 잔디 씨가 자라는 데는 10여 일이 걸렸습니다.

땅이 넓은 미국의 집들은 사진처럼 마당도 넓다. 그래서 해마다 드넓은 잔디를 관리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사진: 무글 무료 이미지)

아침저녁으로 틈 있을 때마다 물을 주고 잔디가 좀 자라 오르자, 전문가가 시킨 대로 NPK 복합비료를 주었더니, 처음 씨를 뿌린 지 2 주 만에 훌륭한 잔디 밭이 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은행의 중역으로 나중에 신분을 알게 된 주인이 10여 일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는 아주 다른 잔디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은행 중역으로부터 상당히 후한 보상을 받은 것 이외에 근처 동네에 잔디 전문가란 소문이 나서 몇 군데 더 의뢰가 들어온 집의 잔디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8월초에 네바다에서 학교로 돌아온 뒤에도 그곳 부자 주민들로부터 연락이 와서 다음 여름에도 와서 또 손봐 달라고 했지만, 그후 10년이 지난 1976년에 그곳에 놀러 가기까지 나는 다시 그곳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도박장에서 일하면서 노름에 손대는 것은 금물로 되어 있습니다. 유학생들은 1년 동안 쓸 학비를 번다는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일했으며, 도박장의 간부들로부터 노름하지 말라는 부탁을 몇 번이고 들었고, 대부분 유학생들은 도박장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석 달 동안 도박도시 카지노 타운에 머무는 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그 지역 다른 카지노에 놀러 가서 딱 한 번 해 장난 삼아 해보고 미리 표를 사 놓은 쇼를 보고 돌아온 것이 전부였습니다.

미국의 한 도박장 내부(구글 무료 이미지)

7월말 어느 날, 잘 아는 C 형과 M 형이 대형 사고를 낸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3000달러 가량 힘들여 모은 돈을 하룻저녁에 도박으로 날려버렸고, 이것을 안 지배인이 비행기 표를 사주어 돌아 가라 했는데, 두 분은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전자 회사에 취직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크리스마스 때면 서로 카드를 주고 받아서 안부를 알고 있는 이 두 분은 지금도 그 당시의 사고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타호 호수에 온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서울에서 처가 수속을 마치고 8월 초에 오게 되었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나는 장가 가는 날의 흥분과도 같은 설렘으로 단번에 차를 몰아 8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타고 오기로 한 BOAC편  비행기가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알아보니 그 비행기 운행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아내를 1년반 만에 만나게 되는 온갖 기대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4시간을 차를 몰아 타호 호수로 돌아오는 길은 처량하기만 했습니다. 국제전화가 해저 케이블을 사용할 때였기 때문에, 서울 통화를 하려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했고, 연결이 되었다 해도 선로 상태가 나빠 서로 알아듣기 힘든 때여서 다시 전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나는 3일 후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샌프란시스코 비행장에 갔습니다.

이번에는 비행기가 제 시간에 도착했으며, 1년반 만에 만나는 아내와의 반가움도 잠시였습니다. 곧이어 아내와 나는 대구 외할머니에게 맡겨 놓고 온 큰 딸 혜경이와 큰 아들 철준이 걱정으로 침통해졌습니다.

서울에서 송금해오는 돈도 없었고, 둘이서만 빠듯하게 사는 형편이어서, 아이 둘을 데리고 유학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공부를 빨리 끝내고 돌아가거나 이곳의 형편이 나아지는 대로 아이들을 데려 온다는 막연한 생각에, 아내만 미국으로 들어오게 하고 나니, 아이들한테 대한 미안스러움이 천근만근이 되어 가슴을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타호 호수로 돌아 온 우리 내외는 카지노 알바 일을 대략 정리하고, 학교로 돌아가기 전 1주일 동안 타호 호수가의 여러 군데를 마치 신혼여행 온 부부처럼 돌아 다녔고, 서울에서 가지고 온 인삼주를 유학생들과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꿈같은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혜경이와 철준이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을 학기에 가족이 온다고 학교에 얘기하고 미리 기혼자 용 아파트를 신청해 놓았던지라, 우리 내외는 유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기혼자 아파트로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침실이 두 개인 이 아파트는 약 30평쯤 되었고, 물값을 포함해서 월세가 40달러였으며, 요즘 같으면 약 1000달러쯤 될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 석 달 동안 고생한 탓에, 나는 자동차도 새로 샀고, 현금도 3000달러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부자가 된 듯한 기분에 아내에게 남편으로 생색을 한껏 냈습니다. 그리고 형편이 좋아졌으니 그 힘든 청소부일은 이제 좀 안 해도 될 듯 싶었어서 그만 두고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언론학의 실기 과목 중에 제일 힘든 것은 편집 과목이었습니다. 주어진 기사를 지시에 따라서 줄이고 늘려야 했으며, 제일 힘든 것은 기사에 제목을 붙이는 일인데, 한정된 지면 공간에 알파벳의 넓이가 다른 속성(M과 L은 활자 넓이가 다름)을 잘 이해해야 지면에 맞는 제목을 적어야 했으며, 미국 생활에 맞는 속어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제목을 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문 사진도 아무리 열심히 쫓아다니며 찍어도 사진 잘 찍었다는 평을 한 번도 못 들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를 견디며 받아 든 언론학 학사 학위는 사실 그렇게 달가 운 것이 못 되었습니다.

컴퓨터로 조판하기 전 미국 신문의 제목이 들어갈 자리에 꼭 들어 맞는 제목을 넣으려면 M, W, I N 등 알파벳마다 다른 활자의 넓이를 잘 이해해야 가능하다(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오레곤 대학교의 언론학과(journalism school)는 석사 과정까지 있어서, 나는 학부를 마치자마자 바로 석사 과정에 입학했습니다. 아내는 어찌 그리 빨리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지 믿지 못할 정도로 악착같이 생활했습니다. 아내는 미국 생활을 시작하자마다 곧바로 아이 봐 주는 일(babysitting)을 맡아 번 돈을 살림에 보탰으며, 아이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꾹 참고 그리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말해봤자 속만 상하지 지금은 데려올 형편이 못 되잖아요” 하는 아내의 다부진 말이 내게는 왜 그렇게 애처롭게 들렸던지 몰랐고, 아내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없이 할 일만을 했습니다. 자기 딴에는 내 곁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부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싶었나봅니다. 아내는 한 사람 몫을 단단히 하려고 작심하고 온 사람인 듯했습니다. 그런 아내가 고마웠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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