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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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선물
  • 칼럼니스트 정영선
  • 승인 2017.06.1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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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정영선
칼럼니스트 정영선

대학교는 곧 방학이다. 주변 사람들이 방학 때 무얼 할 거냐고 묻는다. 어떤 사람은 방학 때 여행 계획은 없냐고 묻기도 한다. 가까운 곳으로 바람을 쐬러 갈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아직 아무 것도 정해진 건 없다. 어쩌면 여행을 갈까 말까 고민하다 방학을 보낼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일은 모르겠지만 여행은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설렌다.

작년 봄엔 진짜 어디론가 가고 싶었다. 이미 벚꽃은 지고 없었는데 큐슈의 우레시노에 벚꽃 보러가자고 동료 소설가들을 꼬였다. 봄밤에 취에 있던 소설가들이 두말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중 일본말을 아는 사람도 우레시노에 가본 사람도 없었으니 좀 무모한 계획이긴 했는데 일본에서 몇 년 산 젊은 소설가가 동참하면서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자동차도 빌렸으니 출발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구마모토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위험하니 다음으로 미루자는 의견도 있고 마음을 냈으니 위험해도 가보자는 소설가도 있었다, 결국 각자의 판단에 맡겼는데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공항에 나타났다. 우레시노와 구마모토와의 거리, 지진의 진행 방향에 대해 알아보고 결정한 일이겠지만 텅 빈 공항과 비행기를 보니 겁부터 나는지 다들 별 말이 없었다.

우레시노도 몇 명의 관광객들 뿐 조용했다. 다행히 음식점은 대부분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없는 편이라 자리가 없어 돌아서는 일은 없었다. 맥주를 어느 정도 먹으면 무한 리필이라는 천 간판을 보고 들어간 술집에서 일행 중 한두 명이 무한 리필에 도전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 위의 전등이 흔들렸다. 모두 눈이 마주쳤다. 지진이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겨우 참고 식당주인을 쳐다보았는데 주인은 흔들리는 전등을 힐끔 보면서 주방 앞에 앉은 손님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가보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우리는 술잔을 들어 무한 리필을 기원했다. 그러고는 식당 문이 닫힐 때까지 그 흔들림에 대해서, 꼭 그걸 느끼기 위해 온 것처럼 떠들어댔다. 다음 날 일정은 우레시노 올레길을 걷고 나가사키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때 같이 여행을 했던 Y 작가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일각고래의 뿔>이 얼마 전 해양문학상 우수상으로 뽑혔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어스름 녘에 닿았던 나가사키 거리와 만화책이 높이 쌓여있던 라멘집이 떠올랐다. 우리는 대부분 짜고 양이 많은 라멘을 먹지 못하고 혼자 와서 만화책을 보며 라멘을 먹는 일본 사람들의 저녁 풍경만 보고 나왔다. 다음 날 개항기 일본의 모습을 재현한 데지마 상관에 들렀는데 Y작자가 아이 팔처럼 길었던 고래 이빨 앞에 꽤 오래 머물러 있어 몇 번 돌아본 기억이 난다.

그 여행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 본 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었다.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교복치마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여학생과 여성 직장인들, 일흔은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어디론가 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어쩐지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나의 삶이 조금 시시해보였고 자전거가 일상화된 사회가 부러웠다, 어쨌든 나는 돌아오자마자 자전거를 배웠다. 운동신경이 둔해서 몇 번이나 넘어지고 긁혀서 다리가 성한 데가 없었지만 자전거를 타던 일본 여성들을 떠올리며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자전거를 타고 달맞이 언덕을 넘기도 하고 구포 둑으로 가기도 한다.

Y 작가의 수상 소식을 듣고 작년 봄 어린 여학생과 할머니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고 했던 복잡한 생각들이 생각났다. 자전거 타는 걸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자전거와 같은 간단한 것도 남성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여성의 삶을 스스로 위축시킨 나 자신에 대한 실망도 있었던 것 같고 자동차와 걷기로 양분화된 속도와 공간에 익숙해진 내게 자전거가 주는 속도가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빨리 변하는 사회,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낙오하는 세상이다. 속도에 밀려 사라지는 많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뒤처진다는 불안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자전거를 보는 순간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 느린 것과 빠른 것의 공존, 다양성의 인정, 이런 당연한 것들이 자본의 속도에 묻혀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긴 했다. 아무리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겨우 자전거 하나 겨우 배워놓고 푸는 ‘썰’치고는 좀 거창한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그 짧은 여행은 나의 삶에 작지 않은 변화를 준 건 사실이다.

요즘은 모임에 가면 절반 넘게 여행 이야기를 듣고 온다. 미술관과 문학관 순례, 걷기, 그저 푹 쉬는 여행. 충동적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고, 야무지고 꼼꼼하고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보든 어떻게 가든 떠나서 돌아오는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번 여행의 나는 지난 여행의 나와 달라져 있다. 일행과 목적지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변화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난 여행 때의 고민과 갈등과 쓸쓸함이 떠오르면 길게 늘어선 검색대의 줄도 지겹지 않다. 이처럼, 변화가 필요해서 떠나지만 변화를 확인하는 것도 여행이 주는 선물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나의 변화는 지난 여행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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