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악의든 선의든 하루 평균 200회의 거짓말을 하는 게 인간이다. 우리는 거짓말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거짓말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떨까. 거짓말이 사라지고 사기와 위선, 가식이 없는 세상은 과연 아름다운 유토피아일까?
이 질문의 해답은 릭키 제바이스 감독의 영화 ‘거짓말의 발명’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거짓말이라는 개념 자체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본심을 숨김없이 말한다. 예를 들면, 아기를 데리고 지나가는 부모를 향해 “어머, 아이가 참 쥐새끼처럼 생겼네요”라고 한다든지 회사에 결근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요, 아픈 게 아니라 당신들 꼴 보기가 싫어서요”라고 한다든지 말이다. 심지어, 펩시콜라의 광고는 "코카콜라가 없을 때 대신 드시면 좋아요"다. 이 얼마나 가식 없는 솔직한 말들인가.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선의의 거짓말은 말 그대로 ‘좋은 뜻’으로 하는 거짓말이다.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하는 악의의 거짓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남들과 다르지 않게 나도 선의의 거짓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 앞에 대놓고 솔직하게 말을 잘 못한다. 정말 친한 친구하고는 격식 없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만약 내가 위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 친한 친구들과의 사이도 멀어져버릴 것이다. 그만큼 거짓말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선천적으로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말을 생각 없이 솔직하게 내뱉는다. 그런 사람들은 남이 자신의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는 지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나오는 대로 술술 뱉어버린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버려서 듣는 사람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은 잔인하기 때문이다. 여과 없이 내뱉는 잔인한 진실은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 기계 또한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사람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은 채 진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계에게서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앞서 예로 든 ‘거짓말의 발명’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전 세계에서 혼자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다. 기계 같은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인간다움을 가진 유일무이한 사람인 것이다. 그는 거짓말을 이용해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부와 명예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할 찬스도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택한다. 절체절명의 대 찬스를 제 손으로 버린 셈이다. 이처럼 사람이 너무 솔직하면 손해를 본다.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자신 또한 상처를 받는다. 솔직함이 무기인 시대가 아닌 남들보다 얼마나 더 기발하고 창의적인 거짓말을 하는가가 능력인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각종 거짓말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소한 일상의 대화에서부터 국회의원, 기업가, 심지어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까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인간미만큼은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언젠가는 악의의 거짓말이 모두 사라지고 선의의 거짓말만이 존재하는 진정한 유토피아가 오길 기원한다. 원래 '유토피아'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세상"이란 뜻이 담겨 있다고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