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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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유토피아
  • 신병률 시빅뉴스 편집위원
  • 승인 2013.04.22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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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중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영어 격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쯤은 누구나 이 한마디에 가슴 설렜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야망은 그렇게 우리의 가슴을 달뜨게 만들고 가만히 엉덩이 붙이고 앉았지 못하고 그것에 도전하도록 우리를 채근한다. 장담컨대 실패와 좌절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모험했던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가 태곳적 원시의 삶으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경을 딛고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진시켰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숱하게 들어왔다. 제국을 건설하고, 대양을 건너고, 최고봉을 오르고, 거대 기업을 일구고, 신기술을 발명하고, 혹은 다른 어떤 유익한 행위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 말이다. 비단 교과서나 위인전 속의 대단한 영웅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오늘날에는 공을 잘 차고 던지거나 춤과 노래를 잘해서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인물들의 이야기까지도 포함되겠다. 그들의 삶은 학교나 미디어 등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의 역할모형으로 장려되고 우리는 그들을 동경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동경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소위 ‘자기계발’류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석권하고 한 회 수백 혹은 수천만 원의 강연료를 받고 ‘꿈꾸고 도전하라!’는 말을 들려주는 스타강사들이 득세하는 현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성공신화’와 ‘당신도 도전하라’는 메시지가 제도권 교육과 미디어를 통해 유례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대량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한편에서는 ‘도전하려는 젊은이들이 없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흘러나오고 있다.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치솟고, 벤처창업이 시들해지고, 이공계가 홀대받고, 중소기업이 인력난에 허덕이고, 인문학이 쇠락했다며 한탄하는 소리들 말이다. 오늘날 청춘들이 모험을 회피하고 좀 더 안정된 길을 선택하려 한다는 우려가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들을 책망하거나 비난한다면 그것에는 차마 동의할 수 없다.

  누군들 야망을 갖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들 모험하고 도전하고 그리하여 쟁취하고 성공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들이 그러지 못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기실 영웅이 되는 자는 극소수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자는 그보다 조금 많을 뿐 역시 소수일 수밖에 없고 대부분은 그 두 부류에 속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모두가 영웅이라면 그 누구도 영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확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그 두 부류에 속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불어 부나 학력 등과 같은 개인 능력의 대물림이 고착화되면서 계층 간 이동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더욱 그렇다. 사실이 이런 데도 모두에게 열심히 도전하기만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거나 더 열심히 끝까지 노력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거나 약았거나 멍청한 것 아닌가 말이다.

  죄수의 딜레마로 대표되는 게임이론에서도 상대가 어떤 결정을 할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인생을 결말을 알 수 없는 게임이라 본다면 모험보다 안전을 선택하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성공하리라는 결말을 알고 있다면 누군들 모험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나 인생에서는 그런 성공이 보장된 결말이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대개는 안전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 테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드라마나 영화 혹은 게임 속 캐릭터를 통해 모험과 도전을 가상 체험하는 안전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대리 충족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엽게도 말이다.

  지금 나는 청춘들에게 모험하지 말고 대충 안전하게 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처럼 도전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너무 주눅 들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도전을 가로막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유약함에도 이유가 없지 않겠으나 그것보다는 도전을 주저하게 하는 여러 사회적 장애들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류담론은 ‘성공신화’를 팔아먹고 보통의 우리는 그것을 소비한다. 그 과정에서 성공한 자들의 선택과 우리의 선택을 비교하면서 때로 동기를 부여받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열패감, 열등감, 자괴감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객관적 수치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나는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작심삼일의 쓴 맛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든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 그런 열패감은 한 개인을 심리적으로 황폐화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결국 사회 전체에 다양하고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사회악들의 근원이 출구가 없는 개인의 좌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열패감에서 비롯된 부작용의 가능성을 줄이려는 사회적 노력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곳곳에 ‘성공신화’만 난무한다. 아마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성공하야고 마는 그들의 성공스토리가 우리를 매혹하기 때문일 것이다. ‘적극적인 도전과 응전’이 ‘소극적인 안정추구’보다는 언제나 훨씬 흥미진진하기 마련이다. 거기다가 결국 주인공이 성공을 쟁취하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니 더욱 매력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구질구질하게 고생만하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면 과연 우리가 그들에게 이처럼 열광할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공부는 뒤로하고 클럽에서 춤만 추던 양현석이 그냥 춤만 추다 그렇게 무명으로 인생을 끝냈다면 우리는 그를 지금처럼 동경했을까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동경하는 결정적 이유는 그들의 도전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들이 이룬 성과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성공한 이후에야 그 도전이 비로소 빛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열패감을 부추기는 ‘성공신화’의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결과로서 성공 여부를 평가하는 우리의 ‘성과지상주의’ ‘결과지상주의’ 잣대부터 내다버리는 용기와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도전하는 과정 그 자체를 매력적이고 아름답게 바라보고, 실패한 자에게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너그러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런 인식의 전환은 한 두 번의 캠페인이나 누군가의 절규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촘촘하게 잘 짜인 사회적 안전망이 확보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즉 실패해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과 다시 도전할 기회를 우리 사회가 개개인에게 보장해 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건 현재로서는 꿈만 같은 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그런 꿈같은 세상이 온다면 누가 다그치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각자의 빛깔에 맞는 모험과 도전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장관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존에 대한 불안, 자신의 존엄이 훼손되거나 상실되리라는 불안이 없다면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능력이 많든 적든 간에, 잘났던 못났던 간에 각자에게 어울리는 크고 작은 야망을 품고 도전하는 삶을 멋지게 살다갈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결승선을 향해 힘들어 죽을 지경이지만 기꺼이 즐겁게 달리는 아마추어 마라토너처럼 모두가 그렇게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그런 희망을 담아 앞의 격언을 이렇게 고쳐 써 본다.

  'Let Boys Be Ambitious!' ‘소년에게 야망을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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