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데가지즘'과 '유승민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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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데가지즘'과 '유승민 현상'
  • 강성보 논설주간
  • 승인 2017.05.0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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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보 논설주간
강성보 논설주간

장미대선이 실시되기 이틀 전인 이달 7일 지구의 반대편 프랑스에서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지난달 23일 대선 1차 투표에서 각각 1, 2위를 차지한 신생 중도정당 ‘앙마르슈(En Marche: 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 후보와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간의 결선투표다. 둘 중 누가 승리하든 간에 이번 대선은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출범 이래 사상 최초로 현 의석이 0석과 1석인 비주류 정당 출신 아웃사이더가 대권을 움켜쥔다는 중요한 정치사적 의미를 갖는다.

이 현상과 관련, 언론에는 ‘데가지즘(Degagisme)’이라는 낯선 용어가 등장했다. “구체제나 옛 인물의 청산”을 의미하는 프랑스 말이다.

평론가들은 지난 30여년 간 계속된 저성장과 고실업, 또 프랑스의 대외적 영향력과 위상 약화 속에 ‘데가지즘’ 선풍이 몰아치고 있다면서 이 사조는 유럽과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진단했다.

파리의 패션처럼, 근대사에서 프랑스의 정치적 사건은 세계의 사상적 트렌드를 선도해온 측면이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1968년 이른바 ‘6.8혁명’이 그랬다. 프랑스 혁명은 유럽에서 ‘앙시앙레짐(구체제)’ 붕괴의 도미노 현상을 유발했고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에게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혁명의 모멘텀을 제공했다. 드골 정권의 독재와 실정에 분노한 젊은 세대들이 일으킨 ‘6.8혁명’ 역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유행병처럼 퍼뜨린 계기가 됐다.

20여 년 전 신문사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시절, ‘프랑스 혁명과 한반도’를 주제로 한 재일사학자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기억이 어슴프레하지만 그 요지를 더듬어 보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다. 프랑스의 청홍백 삼색 국기는 이 이념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인류 보편의 이념 ‘박애’를 제외한 ‘자유’와 ‘평등’의 두 이념은 각각 진로를 달리해 퍼져나간다. ‘자유’는 서진(西進, 서쪽으로 진행), 영국, 미국, 일본을 거쳐 한국에 진출했고, ‘평등’은 동진(東進), 러시아, 중국을 거쳐 현재 북한에 머물러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한반도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그 두 이념이 치열하게 맞부딪쳐 있는 형국이다. 이 분단의 모순이 해결되고 한민족이 하나가 될 때 인류사에 길이 남을 찬란한 이데올로기가 창출될 것이다. 아니, 전혀 새로운 그 제3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한민족은 통일의 과업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정치사상사의 복잡다기한 흐름을 지나치게 단선화(單線化)했고, 다소 민족주의적 쇼비니즘 색채를 띠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날 그 사학자의 강연은 만장한 청중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가 터져나왔고, 나의 뇌리 속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재 진행 중인 프랑스 ‘데가지즘’ 대선을 보면서 그 사학자 강연의 기억을 떠올린 것은 마침 우리에게도 구체제와 적폐청산의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SNS 시대를 맞아 프랑스를 진원지로 한 정치파동의 물결이 이번에는 중간지대를 거치지 않고 지구촌 반대편 한반도까지 광속으로 단숨에 전파된 것인가 하는 싱거운 생각도 들었다.

물론 상황은 전혀 다르다. 한국에선 15명의 후보가 나왔지만 의석수 0석~1석을 가진 비주류 정당의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지금까지 나온 여론 조사결과가 맞다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거나 아니면 그다음 다수 의석을 가진 정당의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높다. 누가 돼도 주류 정당의 주류 정치인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다.

후보들이 내세운 이념적 색채도 프랑스의 ‘데가지즘’과는 차이가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가 적폐청산을 주창한다고 하지만 촛불 민심에 힘입은 정치적 구호일 뿐 데가지즘처럼 저항적, 체제 비판적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오히려 한 후보는 구체제의 온존과 전 정권의 옹호를 공세적으로 앞세우면서 극우 보수 민심을 획득하려는 퇴행적 행태까지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대선의 유력 후보들 중에는 39세 마크롱이나 48세 르펜 같은 젊고 신선한 인물이 없다. 대부분이 50~60대의 낡고 오래됐으며, 유권자에게 늘 익숙한 기성 정치인들 뿐이다. 앞으로 남은 일주일 어떤 정국이 만들어질지 알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이번 대선 역시 과거와 같이 유권자 표심의 51%를 얻고자 하는 보수와 진보 양대 진영의 대결로 압축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필자 개인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점은 바른 정당 유승민 후보가 5% 안팎의 지지율 박스권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보수를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점이 긍정적이고, 정책도 그런대로 반듯하고, TV 토론에서도 다른 후보들에 비해 한 단계 높은 수준과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는데 왜 그렇게 지지율이 안 오르는지 알 수가 없다. 반면에 걸핏하면 욕설에 가까운 막말을 쏟아내고 건전한 상식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과거 행적으로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 하는 의구심까지 불러일으키는 후보가 보수의 대표로, 막판에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필자는 바른정당 지지자가 아니다. 9일 투표장에서 유승민 후보 이름 옆에 도장을 찍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유승민과 같은 건전한 보수세력의 대표주자가 진보세력 후보와 한판 승부를 벌였으면 하는 바람은 갖고 있다. 비록 이번 대선에선 당선을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이런 건전한 보수세력이 진보 진영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그럴 확률이 높다)에서  40% 안팎의 지지율을 바탕으로 견제와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만일 유승민의 득표율이 실제로 미미한 것으로 나타나고 바른정당이 영락한다면(벌써 그럴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어찌될 것인가. 또 진보 인사들을 “좌파 친북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XX 같은 놈”이라는 쌍욕까지 서슴치 않는 마초같은 우익후보가 그의 호언장담대로 당선권에 육박할 정도의 득표에 성공한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 태극기 친박세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활의 몸짓을 하게 되고 대한민국 정치판은 극우보수가 진보정권의 발목을 사사건건 잡는 아수라장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고 이영희 선생의 지론대로 사회는 보수와 진보, 두 개의 튼튼한 날개가 있어야 제대로 날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으로 우리나라 보수의 날개는 거의 회복불능의 상황으로 상처를 입었다. 최소한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보였다. 유승민은 부러진 오른쪽 날개 대신 새로운 보수의 날개를 만들어 가겠다고 주창하면서 대선에 임했다. 그러나 새로운 보수의 새살이 돋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듯하다. 기존의 부러진, 낡은 보수 우익의 날개가 여전히 힘을 과시하며 새 날개의 성장을 억압하는 모양새다. 그 부러진 날개의 날개 짓은 진보세력의 왼쪽 날개와 엇박자를 만들어낼 것이 분명하다. 그런 좌우 날개의 비정상적인 날개짓으로 대한민국이 경제와 외교, 안보 등 최대 위기 국면을 제대로 극복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인지 걱정스럽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공개 격려대로 유승민이 남은 선거운동 기간 힘을 내서 오는 9일 자정쯤 당선은 아니더라도 유의미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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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ㄴ 2017-05-02 08:49:20
왜 유승민 후보 지지율이 안오르는지 모르겠다고요?? 사람들이 당신처럼 유승민이 능력있는 대통령 후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지지하는 사람은 다른사람이기때문이겠죠.

승리 2017-05-02 08:39:10
기적에 기적을 낳고 기적을 일으킬까요!
승리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