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과 함께 한 80평생... "구공탄으로 온돌 덥히는 서민 아직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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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과 함께 한 80평생... "구공탄으로 온돌 덥히는 서민 아직 있으니까"
  • 취재기자 한유선
  • 승인 2017.03.24 13:0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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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수영 왕표 연탄집 조홍복 선생 이야기...민속놀음 '수영야류 영감 문화재'이기도 / 한유선 기자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군가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 10대, 20대들에게는 진짜 연탄보다는 이 시가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십 년 전만해도 연탄은 우리네 가정의 겨울밤을 지펴주고 따뜻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1973년 유류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한 가구당 5장씩 정해놓고 당국이 배급할 정도로 연탄은 서민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던 생필품이었다.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에는 5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연탄 가게가 있다. 수영사적공원 뒤 쪽 골목길로 걸어가면 기와가 허름한 창고 하나가 나타난다. 안쪽은 연탄이 묻어 온통 까맣다. 그 곳이 바로 왕표 연탄집이다. 옛날에는 수영동에 13곳의 연탄집이 있었지만 이제는 왕표 연탄집이 유일하다.

수영사적공원 뒤쪽 골목길을 가다보면 기와지붕의 작은 창고가 보인다. 그 곳이 바로 왕표 연탄집이다(사진: 취재기자 한유선)

이 연탄집은 수영에서 나고 자란 조홍복(84) 선생이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건물이 빽빽이 들어차 있지만 예전에는 이 일대가 온통 논밭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집으로 돌아온 조 선생은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땅을 팔아 연탄 가게를 열었다.

50여 년간 자리를 지킨 왕표연탄집. 수영에서 유일한 연탄 가게다(사진: 취재기자 한유선).

조홍복 선생은 연탄 장사를 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뱄다. 연탄 배달을 하려면 자연스럽게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고 아침과 점심 식사도 제 시간에 해야 했다는 것. 그는 “그 때 그렇게 살아서인지 81세가 되던 해 병원에 간 적이 있지만 그 외에는 잔병도 없이 건강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연탄 장사를 하면서 돈을 떼인 경우도 많았다. 연탄은 한 달 치를 미리 배달해준 뒤 그 다음달에 돈을 받는다. 그런데 연탄값을 받으러 고객의 월급날에 맞춰 찾아가면 옆집에 남은 연탄을 되팔아 넘긴 뒤 도망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게 돈을 떼먹은 집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 때 조 선생은 연탄 장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 월급이 안 나왔으니 하루만 기다려달라'고 하기에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더니 다음날 가보면 없는 경우가 많았다”며 “이런 일을 당하고 나면 연탄 장사를 그만둬야 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조홍복 선생이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 둬야겠다‘고 마음먹었던 1973년 12월, 유류파동이 일어나면서 조 선생의 연탄가게로 밀렸던 외상값이 한 번에 들어왔다. 유류파동으로 연탄을 사려는 사람들이 급증하자, 동네 청년 대여섯명 이 돌아가며 일을 거들고 나섰다. 연탄 공급이 달리는 바람에 청년들이 알아서 1인당 5장씩만 팔고 연탄이 다 떨어지면 다음날 오라고 해줬다. 그게 고마웠던 조 선생이 연탄을 더 얹어주려고 해도 청년들이 극구 사양했다. 조홍복 선생은 “그렇게 40년 전에 그만두려고 했던 연탄장사를 지금까지 하게 됐다“며 ”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연탄장사를 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비교적 여유로웠다. 그 빈 시간을 수영야류가 채워주었다. 한 번은 친구 형님이 찾아와 “동생, 너는 여기 수영에서 살고 있는 수영사람이니 우리 민속보존회에 들어와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조 선생은 수영야류와 인연을 맺었다. 여름밤에 연습하면서 맡은 역할은 수영야류 ‘영감’ 역이었다. 당시 수영야류에서 영감 역을 하던 박남수 선생이 좌수영어방놀이 보유자가 됐다. 조홍복 선생이 맡은 역은 영감 역.

조홍복 선생이 수영야류에 나오는 범의 탈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한유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조 선생은 2000년 2월 5일 수영야류 영감 역 문화보유자가 됐다. 그는 수영야류 얘기를 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기자에게 춤사위를 보여줬다. 짦은 동작이었지만 놀음 특유의 흥겨움이 담겨 있었다. 조 선생은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선조들이 2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즐기던 것이 수영야류”라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영화나 양춤이 없었기 때문에 수영야류와 같은 놀음이 제일이었다는 것.

조홍복 선생은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많은 걱정을 했다. 조 선생은 “기억력이 떨어져 말을 잘못할까봐 걱정 된다“며 ”예전에 연탄 배달할 때는 250세대 정도 되는 집을 다 기억하고, 몇 시에 어디에 배달이 있다는 걸 다 외우고 다녔는데, 이제는 늙어서 다 까먹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조홍복 선생은 1966년부터 지금까지도 왕표연탄집을 운영하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한유선).

조홍복 선생은 5년 전부터 연탄 배달을 중단했지만 여전히 왕표 연탄집은 열려 있다. 아직도 수영에는 서너장 씩 연탄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장사를 접지 않고 있다.

연탄을 팔아 손에 쥐는 돈은 월평균 2만~3만 원. 전기요금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지만 아직 연탄을 찾는 사람들이 있어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조 선생은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지만 연탄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고 있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연탄 장사를 계속할 작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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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슈 2017-03-29 08:42:59
시빅에 올라온 기사중에 제일 감동적이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