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없는 음악은 노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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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없는 음악은 노래가 아니다
  • 부산광역시 권민정
  • 승인 2013.01.2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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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곡이 태반이었던 7,80년대,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와 가사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노래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기계음으로 가득 차있는 음악과 하얗고 앳된 얼굴들 뿐 이다. 젊은이들이 이 노래를 들으며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즐거움만을 위해서 노래를 듣는 것일까.

70년대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양희은의 ‘아침이슬’은 그 시대의 상징이었다. 부모세대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자랐고 이 노래를 들으며 당신들의 옛날을 회상한다. 노래가 단지 노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희은의 아침이슬의 경우, 노래 속 어디에서도 정치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금지곡이 되면서 많은 청년들의 시위노래가 되기도 했다. 독재시절을 겪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우리는 노래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힘들었던 그 시절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며 가난을 잊고, 사회에 나가 맞섰던 것을 추억하며 슬며시 미소 띄울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지금의 ‘음악’들은 어떤가. 지금의 금지곡 사유를 살펴보면 가당치도 않다. 선정성과 비속어 사용, 수준미달 등의 이유들로 요즘 시대의 음악들은 방송매체를 탈 수 없다. 예전같이 노래가 불려지는 것만으로는 단속이 힘드니, 고작해야 방송에 내보내지 못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기성세대가 지금의 행태를 보면 혀를 찰 일이다. 이제 이 시대에서 음악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으로 전락하여, 그때의 정신은 사라지고 노랫말 속에 담긴 시대적 메시지도 사라졌다.

7, 80년대의 노래를 ‘노래’라 칭하고 지금의 음악을 ‘음악’이라고 칭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시대 노래 속 가사는 그저 생각 없이 불리어 지는 어떤 것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반사회적 행위로 여겨지고 재제를 당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음악들은 어떤가. 그저 무의미한 사랑노래가 지금 나오는 노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또한 누군가 사회비판을 담은 노래를 만든다 해도 누구하나 관심 가져 주지 않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하지만 90년대 초, 사회비판과 함께 흥행에도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가 하나 있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갈 시기, 아직 ‘아이돌’이라는 상업그룹이 등장하기 전 그야말로 ‘혜성같이’ 등장한 가수였다. 지금의 인지도는 예전만 못하지만, 일명 ‘빠순이’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종착역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일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일명 ‘전설’이 된 가수 중 하나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이들이 그 당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발라드와 트로트가 대부분이었던 ‘심심’했던 음악시장에 새로운 물결이 인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음악의 시도로만 끝났다면 그들의 행적이 지금까지 회자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회비판을 아주 적나라하게 한 그들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교실 이데아’를 부르며 그 시대의 학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그렇게 불려진 노래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한 같은 앨범에 담긴 ‘발해를 꿈꾸며’는 교과서에 실리며 서태지와 아이들이 갖는 대중성과 그들이 갖는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아이돌 1세대로 불려지는 H.O.T가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을 노래를 불렀었다. 그들의 노래가 크게 성공하기는 했으나, 누구하나 그들이 부른 노래가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중은 더 이상 그들의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TV에 비춰지는 그들의 외모와 현란한 몸동작을 보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노래를 듣는다기 보다는 노래를 이미지화 시켜 상상한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기에 퍼포먼스가 없는 음악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이런 이유로 음악을 파는 입장에서는 음악의 질적 수준 이전에 퍼포먼스가 어느 정도로 주목을 끌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노래를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선정적인 댄스와 주목받을 수 있는 얼굴을 가졌다면 즉, 대중에게 주목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지는 것이다.

SES를 시작으로 소녀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이돌 가수가 나왔다. 또한 지금도 계속 새로운 아이돌 가수들이 나오고 있다. 아이돌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 음악시장에서 더 이상 ‘노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아이돌 과도기를 겪고 이제 우리는 인디밴드와 통기타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장기하와 얼굴들이 그렇고, 나는 가수다를 통해 아이돌가수가 아닌 노래를 부르는 진정한 가수들이 주목받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음악시장은 아직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변화지만, 이 상태를 유지하고 계속해서 음악과 노래가 진화되어 간다면 아마도 진정한 노래가 주류로 설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할 것이다. 쎄시봉이 다시금 부활하고 그들의 음악이 호평을 받을 수 있는 지금, 옛 시절의 감성을 똑같이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우리는 다시 기대한다. 지금의 음악시장이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기를. 아니 적어도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더 나아질 수 있는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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