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성 선각자 최영숙의 불꽃 같은 삶, 소설로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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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 선각자 최영숙의 불꽃 같은 삶, 소설로 재조명
  • 취재기자 정혜리
  • 승인 2017.03.02 05: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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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수 장편소설 <검은 땅에 빛나는> 출간...최초의 스웨덴 유학생 최영숙의 비극적인 삶 그려 / 정혜리 기자
(사진: 소설 <검은 땅에 빛나는> 표지)

폴란드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있다면, 조선에는 최영숙이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해 분투했지만 역사 속에선 잊혀진 젊은 선각자 최영숙. 아시아 최초의 스웨덴 유학생이다. 90여년 전인 1926년, 그는 인습의 굴레에 얽매인 조선 여성의 해방을 위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할 각오로 스무 살의 나이에 단신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스웨덴으로 간다.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의 명문 스톡홀름 대학에 입학해 5년간 수학 끝에 경제학사 학위를 얻고 조국에 돌아오지만, 가부장적 조선사회는 이 여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잊혀진 근대 여성 선각자 최영숙이 강동수 작가를 찾아와 그의 붓을 빌려 불꽃 같았던 자신의 삶과 내면을 펼쳐 보여준다.

1920년대 실존인물 최영숙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검은 땅에 빛나는>(도서출판 해성)이 새로 나왔다. 소설가 강 씨가 <제국익문사>(실천문학사)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장편 소설이다. 우연한 계기로 90년 전 최영숙의 행적을 알게 된 강 소설가는 최영숙의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을 소설로 옮겼다. 강 씨는 도서관을 찾아 90년 전 신문과 잡지를 뒤적여 최영숙의 행적과 그가 남긴 글을 찾아냈다. 실제 조선일보, 동아일보, 삼천리 등 옛 신문과 잡지에 실린 최영숙은 외국 남자의 아이를 낳다 사망한 비련의 여인으로 기록돼 있다. 강 소설가는 “최영숙의 삶과 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양풍 든 바람난 여성' 쯤으로 흥미 위주로 바라본 당대의 관점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도 이 소설을 쓰게 된 까닭의 하나”라고 말했다.

류관순의 한 해 후배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최영숙은 안창호의 흥사단에 들어가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된다. 그리고 스웨덴 여성학자 엘렌 케이의 저서를 탐독하며 조선에서 여성 노동운동을 펼치겠다는 꿈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여에 걸쳐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타고 스웨덴에 도착한 최영숙은 스톡홀름 대학 최초의 아시아 여성 유학생이 된다.

스웨덴인들에게 손수 수놓은 조선 자수품을 팔며 힘겹게 고학하던 그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웨덴어, 독일어 등 5개 국어의 구사 능력을 인정받아 스웨덴 왕실도서관 동양학 보조연구원으로 채용된다. 그리고 동양 문화에 관심이 있던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의 신임을 받는다. 대학을 졸업하자 황태자는 그에게 스웨덴에 남을 것을 권유하지만 최영숙은 조선에서 여성운동을 펼치겠다며 귀국길에 오른다. 

최영숙은 선편으로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 등지를 돌아 귀국하던 중 인도인 청년 실업가 젠나를 선상에서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선상 결혼을 한 그는 남편을 따라 인도 뭄바이에서 하선해 마하트마 간디 등 당대 인도의 유명인사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최영숙은 인도에서 살자는 젠나의 권유를 뿌리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5개 국어에 능통하고 당시로선 희귀한 유럽 명문대 학위를 가진 당대 조선의 최고 엘리트였지만, 그는 총독부의 방해로 교직을 얻지 못했고, 신문사 입사를 희망했지만 가부장적 편견에 좌절한다. 최영숙은 스톡홀름대 경제학사 출신임에도 빈한한 집안의 가장으로 콩나물 장수가 된다.

콩나물장수가 됐지만 최영숙은 구멍가게를 통해 조선 최초의 소비자 조합을 만들었고 그를 유학길에 오르게 했던 꿈, 여성 노동운동을 펼치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그는 영양실조와 임신 중독증으로 귀국한 지 5개월 만에 출산 중 사망하고 만다.

강동수 소설가는 이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나라 잃은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 독립의 길을 찾기 위해 외국 유학을 떠났지만, 최영숙처럼 비극적인 인물은 없었다. 최영숙의 행적이 당대 식민지 치하의 조선 지식인의 삶과 내면을 엿볼 수 있는 독특한 통로였기 때문에 그의 삶에 주목했다"고 답했다. 강 씨는 "만약 최영숙이 그토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우리 근대사의 숲을 지키는 한 그루의 무성한 나무가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강 소설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특별한 허구를 억지로 덧붙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최영숙의 삶 자체가 너무나 소설적이어서 픽션을 덧붙이는 것이 사족처럼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의 삶이 작가적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아 오히려 소설화를 망설이기까지 했다"는 게 강 씨의 이야기다. 강 씨는 "소설이 따라가는 최영숙의 동선은 대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소설 속의 구체적인 에피소드, 이를테면 최영숙과 구스타프 황태자 사이의 아련한 러브 스토리 등등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라며 웃었다. 

90년 전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간 용기있는 여성 최영숙은 희망 없는 조선 땅에서 뜻을 채 펴지 못하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90년 후 다시 소설 속에서 부활해 우리 삶의 안일함에 자극을 준다.

1961년 마산에서 출생해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작가는 소설집 <몽유시인을 위한 변명>(문학과지성), <금발의 제니>(실천문학), 장편소설 <제국익문사 1, 2>(실천문학) 등과 산문집 <가납사니의 따따부따>(국제신문) 등을 펴냈으며, 제5회 교산허균문학상, 제18회 오영수문학상, 제29회 요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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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맘bin 2017-03-02 10:03:17
여성으로서 훌륭하신 삶을 사신거에 너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