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로 고단한 삶을 살지만 문학도의 꿈을 키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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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로 고단한 삶을 살지만 문학도의 꿈을 키우고 있어요"
  • 취재기자 조수연
  • 승인 2016.12.08 16: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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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승 출신 '빅판' 김원석 씨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유전 이야기 / 조수연 기자

부산 경성대 부경대역 3번 출구 앞엔 매일 같이 빨간 조끼를 입고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빅이슈> 판매원 김원석(62) 씨다. 홈리스에게만 판매 권한을 주어 자활의 계기를 제공하는 <빅이슈>(주거취약계층 자활을 돕기 위해 창간된 대중문화잡지). <빅이슈> 판매원, 즉 '빅판'이 된 지 11개월,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를 시빅뉴스가 만나 들어봤다.

경성대 부경대역 3번 출구 앞 빅이슈 판매원 김원석(62) 씨(사진: 취재기자 조수연).

‘파란만장 인생사’

김원석 빅판은 동자승 출신이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스님으로부터 “이 아이의 명이 짧은데 불문에 출가시키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권유를 듣고 합천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시킨 것. 멋 모르고 시작된 절 생활에 김 씨는 “한 일주일 동안 울기만 했어요. 스님이 하룻밤만 자면 엄마가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적응할 수 있었다. 큰 스님이 자식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주신 것이다. “학교도 다녔어요. 해인사 인근의 한 초등학교죠. 별다른 사춘기를 겪지는 않았는데, 새벽 4시면 절의 타종 소리에 잠을 깨야 한다는 것이 좀 힘들었어요. 그래도 6학년쯤 되니까 새벽 4시를 몸이 기억 하더라구요”라며 웃음 지었다. 그는 인근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스님의 도움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곳곳에 김원석 빅판의 어린 시절이 서린 백련암이 있는 해인사의 모습(사진: 구글무료이미지).

2학년 때까지 기숙사에서 지내며 공부하다 흥미를 잃어 자퇴했다는 김 빅판은 25세 무렵부터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어 하산을 고민했다. 절로 신혼여행을 오는 젊은 부부들이 많던 그 시절, 그들을 보며 결혼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 마침내 하산을 결심했다. 

“큰스님께서 꼭 나가고 싶으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셨고, 부모님의 허락 아래 절을 나왔어요. 하산할 때 큰스님이 당분간 하산 처리를 하지 않을 테니, 생각이 있다면 다시 오라고 따뜻하게 말씀해주셨죠."

하지만 그는 절을 나온 후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으면서도 문득 절 생활이 떠올랐다. 그는 가끔 큰 스님이 그리울 때마다 절을 찾았다. 그가 힘들 때마다 큰스님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업에 여러 번 실패했을 때도 여러 조언을 주셨죠. 아직까지 아쉬운 것은 20년 전 큰스님께서 열반하셨을 때 연락이 왔었는데, 안산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찾아가보지 못한 거에요. 지금도 문득문득 큰스님 생각이 나요”라며 그리움과 아쉬움을 드러냈다.

하지만 절에서 이어진 인연은 큰스님 뿐 만이 아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그에게는 딸이 있다. 승려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절 입구에서 보자기에 싸여 있는 갓난 아기를 발견했던 것. 절에 아기를 두고 가는 일이 많았던 그 시절, 김 씨가 가장 먼저 아기를 발견해 이후 그 아이를 딸처럼 키운 것이다. 그의 하산 후에도 ‘딸’은 절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다 절을 나왔다.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서울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김 씨는 딸을 생각하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딸이 대학교에 갈 때는 사업이 잘 되고 있을 때여서 등록금도 대주고 했지만 내가 힘들다고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며 마음으로 키운 그녀는 하나 뿐인 귀한 딸이라 말했다.

사실 하산 후 그에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고향인 김해에서 양돈, 양계, 한우 관련 사업 등을 하며 실패와 재도전을 반복했다. 가축 질병이 사업 실패의 원인이었다. 8년 간의 한우 사업으로 돈을 모아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했던 김 씨는 조카와 김해에 ‘경남다방’을 차렸으나, 조카가 돈을 들고 도망을 가버렸다.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믿었던 이로부터의 배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다방이어서 남자가 있으면 장사가 안됐어요. 나는 저녁에 가게를 잠시 들르곤 했었는데, 한 날은 직원에게 조카가 어디 갔는지 물었어요. 직원은 조카가 점심 먹고 나가더니 안 온다고 해서,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돈이 들어있던 서랍을 열었더니 안에 있던 통장과 돈이 하나도 없었죠. 그 때는 정말 화가 나고 원망스러운 마음만 들었어요. 지금도 연락은 안 하긴 하지만,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라고 했다. 이후 전 국제상사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사업을 벌였으나 다시 실패하고, 경기도 안산을 거쳐 2015년 11월 부산 <빅이슈>의 문을 두드린다.

인생 제 2막

작년 11월, 그는 빅판이었던 지인이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사무실로 찾아간 그는 하단에서 빅판 활동을 시작한 이후 올해 4월 1일부터 경성대•부경대역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빅판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를 묻자, 그는 “나이가 들어 직장 구하기도 힘든 데다 원래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성격이 못 됐어요. 지금도 지고 사는 성격은 아니지만, <빅이슈>는 자립을 돕고 ‘내 일은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하면 임대주택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옛날엔 항상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빅판 활동을 시작하면서 <빅이슈>를 구매해 주시는 독자들과의 소통이 즐겁다는 것을 느꼈다”며 빅이슈를 통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처음 판매에 나섰을 때는 부끄러워 고개도 못들고 홍보 구호도 외치지 못했다. 자신이 홈리스임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외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자 점차 나아져 현재는 부산 6개의 판매처 가운데 1등을 달리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김 빅판은 요즘 오후 2시부터 8시까지의 <빅이슈> 판매 시간을 끝내면 집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고 있다. 2012년 부산 금정구 서동에 위치한 복지관에서 생활했던 그는 부모님과 가족이 너무 그리웠다. 한 날은 꿈에 증조 할아버지가 나타나 “이놈아, 가족 생각만 하지말고 가족이란 글을 써봐라. 너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해주셨다. 다음 날부터 쓴 시를 본 복지관 원장의 권유로 문화재청에 제출했는데, 이후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부탁받았다. 그의 재능은 <빅이슈>에서도 빛을 발했다. 서울 <빅이슈> 본사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내년이면 김 빅판의 글을 빅이슈에서 만나볼 수도 있을 것같다.

“절에 있을 때도 글을 많이 썼고, 내 인생에 대해 써내려 가는 것이기에 어려울 것도 없어요. 다른 사람이 듣기에 힘들어 보이는 과거였을지라도 현재는 즐겁게 살고 있기에 글 쓰는 게 힘들지 않다”며 빅판이자 집필자로서의 색다른 면모도 보였다.

김 빅판은 6개월 이상 활동한 빅판에게 주어지는 기회인 임대주택을 신청해놓은 상태. 단기적으로는 임대주택에 입주하는 것이 목표이다. “많이 판매해 많은 돈을 저축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독자와 친절하게 대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지금은 그냥 욕심 없이, 먹고 살만큼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목표입니다”라고 그의 꿈을 말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독자에게 내용을 소개해주기 위해 홍보용 빅이슈를 읽어보곤 한다(사진: 취재기자 조수연).

홈리스는 날 때부터 정해져 있지 않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누구라도 보금자리를 잃고 길거리로 내몰릴 수 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그를 보며 딱딱한 세상을 살아가는 용기를 나눠가지면 어떨까.  그를 만나는 내내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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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림 2017-02-12 05:01:53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즐겁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빅판 김원석씨 응원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용기 북돋아 줄 수 있는 건강하고 생생한 글 계속 열심히 써나가시기를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