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열심히 살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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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열심히 살지 않아야겠다"
  • 칼럼니스트, 방송인 유인경
  • 승인 2016.11.10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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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부지런해서 나라 망친 최순실과 대선 실패한 힐러리의 역설 / 칼럼니스트, 방송인 유인경

 

칼럼니스트 유인경

나는 최근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남은 내 인생의 좌우명을 ‘열심히 살지 말자’로 정한 것이다. 이런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최순실과 힐러리 클린턴이다. (존칭은 생략하겠다.)

최순실은 대한민국의 권력 서열 1위로 인정받을만큼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며 국민들을 ‘순실의 시대’에 산다는 자괴감과 허망함을 느끼게 한 최순실은 박근혜 대통령의 액세서리 선정부터 대북문제까지 간여하며 국정농단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오만방자하다’는 평을 듣는 태도, 혹은 재산에 대한 놀라움보다 그의 경이적인 부지런함, 문어발처럼 펼친 다채로운 사업 등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동안 언론에 드러난 행적만 봐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나게 많은 일을 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점검하고(그러기 위해 거의 모든 일정과 자료를 검토해야 했을 게다), 옷과 구두도 직접 디자인하고 코디네이트로 해 주고(자기는 천만 원이 넘는 에르메스 핸드백과 백만 원대의 명품 구두를 수십 켤레 갖고 있으면서 정작 대통령은 싸구려 옷과 헝겊지갑을 들게 하는 차별화도 보였다), 고영태·차인택 등과 함께 미르재단이나 문화사업 등을 기획하며 수시로 회의를 하고 청와대에 압력을 넣어 기업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고 지인들을 곳곳에 취업시켰다. 언니 조카와 함께 사우나와 병원 등을 다니며 외모 가꾸기와 건강도 챙겼고 호스트바도 드나들고 계모임도 하며 사적인(?) 교류의 즐거움도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딸에게 성악과 승마를 시키고 대회 성적에 불만을 품으면 고발도 하고 대통령에게 하소연도 하고 학교마다 찾아가 선생이나 교수를 윽박지르고 딸이 사귀는 남자친구를 떨어뜨려달라며 조폭까지 찾아갔다. 독일에 머물 때도 10여개의 회사를 만들고 호텔을 비롯한 집들을 사들이고 딸 부부와 손주, 개 10마리와 고양이 5마리, 말까지 데리고 옮겨다녀 ‘브레멘의 음악대’가 아닌 ‘브레멘의 악동들’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최순실이 조금만 덜 부지런하고 덜 열심이었어도 대한민국도, 그 자신도 덜 불행해지지 않았을까.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패배한 요인도 그의 탐욕보다는 지나친 열정과 부지런함이다. 선거 직전에 FBI가 공개한 그의 이메일 관련 자료를 보면 힐러리는 정말 미친 듯이 일했고 너무나 성실하게 대통령이 될 준비를 했다. 영부인 시절에도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논했고 국무장관 시절에도 하루에 2개 대륙을 누비기도 하고 하룻밤에 저녁식사만 3번을 먹기도 하고 새벽 3시에도 측근들에게 업무 관련 지시를 내리거나 메일을 보냈다. 이번 선거기간에도 너무 많은 유세를 다녀 스스로를 혹사시켜 건강이상설까지 나왔다. 힐러리가 조금만 더 느긋하고 여유를 갖고 잠도 푹 자고 편안한 분위기를 보였다면 그녀의 정적들로부터 ‘탐욕의 화신’이란 오명을 얻지도 않았을 게다. 트럼프도 당선 소감을 통해 “힐러리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부시와 엘 고어의 대결에서 부시가 승리했을 때 “왜 미국인은 똑똑한 고어가 아닌 멍청한 부시를 선택했냐”는 내 질문에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한 후배는 이렇게 답했다.

“고어는 유능하고 집안도 좋고 외모도 근사하고 정책도 훌륭하다. 그래서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거리감이 느껴진다. 선거운동 때도 하루에 10개 이상의 스케줄을 소화해 따라다니는 기자들도 나중에 지치고 짜증났다. 반면 부시는 흠결이 많고 약점도 많지만 만나며 어깨를 툭 치면서 맥주라도 한 잔하고 싶은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선거운동 때도 하루에 2, 3개 정도의 일정으로 편안하게 자녀, 기자들과 농담도 주고받아 호의적으로 기사를 쓰게 만들었다.”

성실하게 사는 것과 지나치게 열심히, 바지런하게 사는 것은 다르다. 최순실과 힐러리는 차원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최순실이나 오랜 경험으로 국가를 개조하겠다는 열정에 넘친 힐러리나 결국 지나치게 열심히 살아서 자신의 욕망의 그릇을 깨뜨렸고 한국과 미국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곰곰 살펴보니 나라나 세상을 망친 이들은 지나치게 부지런한게 탈이었다. 너무 많은 잔머리를 굴리고 하염없이 나쁜 범죄를 저지른 이들 말이다.

그들과 달리 평범한 보통 시민인데다 평소에도 대충대충 살고 있긴 하지만, 나는 앞으로 더더욱 열심히 살지 않을 생각이다. 아둥바둥하지도 않고 연연해하지도 않고 남의 흉도 덜 보고 식탐도 줄이고 노후 걱정도 너무 열심히 하지 않겠다. 더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더 여유만만해지겠다. 나와 내 주변의 평화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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