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골목, 낡은 집 다닥다닥....시간이 멈춰선 피란민촌 우암동 '소막마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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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 낡은 집 다닥다닥....시간이 멈춰선 피란민촌 우암동 '소막마을'을 가다
  • 취재기자 김연수
  • 승인 2016.10.30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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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때 이중섭 가족도 살던 곳...부산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추진 / 김연수 기자

소 축사였던 곳에 사람이 산다면 믿을 수 있을까? 믿기 힘들겠지만 부산의 한 마을이 그런 곳이다.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 189-1104번지엔 일명 ‘소막 마을’이 있다. 소막마을은 우암동 주민들에게조차 생소한 곳. 우암동에서 20년 넘게 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주민조차도 “소막마을이 여기 어딘가에 있다고는 들었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소막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부산 남구 3번 마을버스를 타고 동항성당 정류장에 내려야 한다. 길을 건너면 골목 사이로 ‘내호냉면’이란 간판이 크게 보이는데, 이 골목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면 그제야 소막마을이 나온다.

소막 마을 골목길. 좁은 골목 사이로 소막사를 개조한 집들이 촘촘히 붙어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소막 마을에는 시간이 멈춰 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만한 좁은 골목 사이로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얼마나 오래된 건물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다. 소막마을엔 아직도 많은 집이 연탄불을 때고, 공동화장실을 사용한다. 마을 입구에는 연탄과 잡동사니를 파는 가게가 있다. 간판도 없는 가게이지만 동네에서 연탄집으로 통한다. 연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채소류도 판다. 연탄집 주인 이예분(67) 할머니는 “아이고, 40년 전에 내가 이 동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북 할머니들이 많았어”라고 말했다.

소막마을은 정식 마을 이름이 아니다. 소 막사에 사람들이 들어가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막마을의 탄생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맛 있는 조선 소를 대량으로 수탈해서 배에 실어 일본으로 운반했다. 일제는 수탈한 소를 배에 싣기 전에 마지막 검역을 실시했다. 소들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최종적으로 검사한 것. 

일제는 1909년 배가 정박하기 편리한 우암동에 수출우 검역소를 설립했다. 한일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된 1910년에는 수출우 검역소를 이출우 검역소로 이름을 바꾼다. 수출은 다른 국내에서 외국으로 물건을 내보내는 것인데, 일제에게 조선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출이 아닌 그냥 국내 이동을 뜻하는 이출(移出)이었던 것이다.

소 막사는 1909년 처음 5개 동을 세웠다가 19개 동으로 점차 확장됐다. 소 막사의 크기는 폭 10m, 길이 40m 내외였다. 막사 가운데 통로를 만들고 좌우측을 칸막이로 분리해 소를 수용하는 형태였다. 좌우측 막사에 각각 50에서 60마리 내외의 소를 수용됐다. 한 건물에 소가 100마리 넘게 수용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소막사 입구가 100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도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경성대에서 부산 도시 디자인을 강의하고 있는 이정훈 교수는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소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전 일종의 검역소 및 대기 장소로 사용했던 소 막사는 부산의 주요한 역사적 자원”이라고 설명했다.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관측하는 미군 Begor호(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광복 후 소 막사가 텅 비게 되자 몇몇 일본 귀환동포들이 소 막사에 들어와 살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운집해서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은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 이후다. 흥남철수는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철수 작전이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흥남에 포위된 미군과 국군을 비롯한 피란민 10만여 명이 193척의 선박을 타고 남쪽으로 철수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들자, 부산 임시정부는 임시방편으로 시내 곳곳에 비어 있는 건물들을 활용해 피란민을 수용했다. 일제가 비워놓고 떠난 우암동 189번지 일대의 소 막사들은 그중 가장 많은 피란민을 수용했다. 당시 이 일대는 ‘적기 피란민수용소’로 불렸다. 붉은 산이란 뜻의 ‘적기(赤崎)’는 우암리의 일본식 이름이다. 일본인들이 부산진에서 바다 건너 우암리를 바라보면 붉은 색의 산이 보인다고해서 아카사끼(적기)라고 부른 것이 그 유래다.

지붕위에 작은 지붕이 하나가 더 올라가 있다. 소막사로 사용할 때 환풍구였다. 비가 새서 파란색 우레탄으로 방수작업을 해놓았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소막사 한 동에는 40가구 정도가 들어갔다. 한 가구당 허용된 공간은 4평 남짓. 마땅히 경계가 없어서 합판을 이용해 임시로 가구를 분리했다. 피란민들은 보따리 하나만 간신히 들고 내려왔고, 조금만 버티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예분 할머니는 “(흥남) 할매들은 이제 거의 돌아가시고 몇 안 계셔”라고 옛일을 회고했다.

 “그 할매들, 나무 판때기로 걸쳐놓고 이짝은 우리 집, 저짝은 너희 집, 이래 가지고 살았어. 옆에 집이 식구가 많으면 비좁아서 안 된다, 내가 이만큼 물려준다, 하고 자리를 내줬는데 그게 그만 (고향으로 못 돌아가게 되면서) 자기 집이 됐지.”

소막사 건물 내부 모습. 슈퍼마켓 천장이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소 막사에도 들어가지 못한 피란민은 건너편 산비탈 공동묘지에 터를 잡아야 했다. 6.25 전쟁 당시 11세였다는 소막마을의 한 할아버지는 “지금에야 빈집이 많지만, 전쟁 났을 때는 소막사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지. 비라도 피해야 하니까. 여기에 못 들어오면 다 맨 바닥에 노숙했어”라고 말했다.

이중섭의 1954년 작품 <흰소>(사진: 구글 무료 이미지)

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도 적기 수용소를 거쳐 갔다. 이중섭은 1950년 12월 10일,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이영진와 함께 원산항에서 배를 타고 3일 후 부산에 도착했다. 이중섭과 가족들은 적기 수용소로 보내졌다. 조카 이영진의 증언에 따라 고은 시인이 집필한 책 <화가 이중섭>에는 당시 적기 수용소의 모습을 “바닥은 시멘트였고 천정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고, 벽은 녹슨 함석으로 군데군데 때워져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중섭 가족은 1951년 4월 서귀포로 떠났다.

소막마을은 영화 <친구>의 대사에도 등장한다(사진: 영화 <친구>의 한 장면).

소막마을은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에도 언급된다. 살인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선 준석(유오성)은 본적을 말하라는 판사의 지시에 "부산시 남구 우암동 189번지"라고 대답한다. 왜 하필 우암동 189번지였을까? 곽 감독의 아버지 곽인완(82) 씨가 바로 우암동 189번지 소막마을 출신이기 때문이다.

1934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한 곽 감독의 아버지 곽 씨는 16세 나이에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와서 우암동 189번지 소막마을에 정착했다. 곽 씨는 2001년에 피란 당시 우암동의 이야기를 담은 <소의 눈물>이라는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곽 씨는 2015년 7월 17일에 보도된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적기에 내린 사람들은 성공하기도 힘들었고 성공하더라도 다 떠났으니, 참 인생도 얄궂지" 라고 말했다.

2015년 2월, 곽경택 감독과 함께 소막마을을 찾은 아버지 곽인완 씨는 “1951년부터 휴전 직전인 1953년까지 우암동에서 일어난 실제 이야기를 묶은 <우암동 189번지>라는 시나리오를 직접 집필해 아들 곽 감독에게 건네줬다”고 부산남구신문을 통해 밝혔다. 곽경택 감독 역시 다수의 매체를 통해 <우암동 189번지>의 시나리오에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서울경제의 2015년 6월 19일 인터뷰에서 곽경택 감독은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넘친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아버지가 쓴 <우암동 189번지>라는 작품”이라며 "오래 전부터 만들고 싶었는데, 캐스팅도 어렵고 미술 등 제작비가 만만찮아 계속 미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막마을을 가는 골목길에는 1952년에 개업해 같은 자리를 60년 넘게 지키고 있는 ‘내호냉면’이 있다. ‘먹방’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외식사업가 백종원이 한 TV프로그램 출연차 내호냉면집을 다녀갔다. TV에 방영된 이후로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번호표를 손에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도 소개된 내호냉면은 부산의 명물 ‘밀면’을 최초로 개발한 가게다.

내호냉면은 가게의 위치를 옮기지 말라는 정한금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64년째 같은 자리에서 영업 중이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밀면의 탄생에는 소막마을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함경에서 냉면집을 운영하던 정한금 할머니가 흥남철수 때 부산으로 피란 와 현재의 위치에 1952년에 내호냉면을 개업했다. 내호냉면이라는 상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고향의 이름인 ‘내호리’를 딴 것이다. 정한금 할머니는 냉면 면을 뽑으러면 메밀이 필요했는데 전쟁 통에 메밀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구호물자인 밀가루에 감자가루를 섞어 면을 뽑았다. 이것이 밀면의 시초다.

사진 속 할아버지는 우암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60여 년간 소막마을을 지키고 있다. 우암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기도 하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이제 소막마을엔 600여 명의 주민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 중에서도 40% 이상이 65세 이상이다. 1959년에 개교한 우암초등학교에 1회 입학한 분홍 담벼락집 할아버지는 60여 년째 소막마을을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는 갑작스런 전쟁에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동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던 맏형을 잃었다. 당시 할아버지는 열 한 살이었다. 할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장유로 거처를 옮겼다가 제대 후 다시 우암동에 돌아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할아버지는 “이제 예전 같은 활기는 찾아볼 수 없어. 빈집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소막마을은 2014년 11월 5일부로 재개발 구역에서 해제되어 낙후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2015년 1월에 ‘문화복합형 주거환경관리사업’ 사업대상지에 선정되었다. 총 사업비는 약 30억 원이다. 사업의 주된 내용은 낙후된 우암동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소 막사를 복원해서 부산의 피란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소막마을을 관광 명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부산 남구청은 원형이 남아있는 소막사를 활용하여 우암마을 커뮤니티센터 건립할 예정이다. 우암마을 커뮤니티센터는 부지 645㎡, 연면적 338.1㎡ 규모이며, 주요시설은 일제의 수탈상과 피란민들의 삶을 볼 수 있는 전시관, 복합 커뮤니센터, 회의실 등이다. 총 사업비는 20억 원으로 추정된다. 부산시 남구청 안전도시국 건축과 제정모 담당자는 “우암마을 커뮤니티센터 건립 대상건물은 소막사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건물로써 기록화 사업을 통해 소막사의 보수, 문화재 등록절차 등을 이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화 복합형 주거환경관리사업은 2015년 1월 선정된 이후, 5월부터 정비계획 수립했지만 아직까지 예산이 투입돼 추진된 사업은 없다. 남구청 주무관 제정모 씨는 “현재 주거환경관리사업에 편입되는 토지 등에 대한 보상 절차를 진행 중에 있다”고 전했다.

부산시는 연내에 ‘대한민국 피란수도 부산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사업 신청할 계획이다. 대상에 소막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부산시 도시재생과 류승훈 주무관은 “소막사의 문화재 지정 여부에 따라 잠정 목록 대상 유산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검토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남구청은 올해 내에 등록문화재 등록절차를 이행할 계획이다. 등록문화재란 보존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 선정된다. 등록문화재는 원형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한에서 내부를 현대식으로 수리할 수 있고 전시관 등으로 활용이 허용된다.

2014년 ‘189 벽화마을 사업’때 조성된 벽화들. 이탈리아 부르노 마을을 모티브로 했다. 인적은 여전히 드물다(사진: 취재기자 김연수).

경성대 이정훈 교수는 소막마을은 주거환경이 여러모로 불리해서 다양한 개선사항이 요청되는 지역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유산을 보전해야 하는 곳이라 말했다. 이 교수는 무조건적인 관광지화는 경계해야 한다면서 “쾌적한 주거지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는 상극일 수 있다. 얽힌 실타래를 풀듯이 천천히 심사숙고하면서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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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7-02-22 14:10:56
기사가 참 내용이 충실하네요~
우암동의 많은 내용들을 새로 알게되었어요

김연수 2016-11-19 11:35:04
저도 잠깐이지만 어린시절 우암동에서 살았던 기억이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사를 쓰게 됐죠..감사합니다.

이영호 2016-11-15 00:21:39
나의고향 부산 우암동 내나이42세 긴 세월은 아니지만 그리운 고향임엔 틀림없다
정말 못살고 힘든 시기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옛 어린 시절이 그립고 추억된다

신행지 2016-11-05 21:03:05
60년 가까이 부산에서 살았으나 소막마을을 알지 못 했어요. 읽을거리로 꽉 찬 기사로 많이 배웠습니다.

수영동주민 2016-11-05 17:53:46
어디든지 오래 살아도 새롭게 알게되는 동네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마치 우암동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네요.
어느 동네와 다름없이 행복한 주민들로 가득하겠지만 역사 속에 묻혀져 있는 우암동을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찾아가면서 얼마되지 않는 사람들의 말벗이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ㅎㅎ 기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