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성추문 확산, 알면서도 쉬쉬한 뿌리깊은 은폐가 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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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성추문 확산, 알면서도 쉬쉬한 뿌리깊은 은폐가 일 키웠다"
  • 취재기자 정혜리
  • 승인 2016.10.25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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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서 박범신, 박진성, 함영준 등 문화권력자들 잇단 고발...작가회의 사과문 발표 / 정혜리 기자
문화계와 예술계에서 성희롱 사건이 빈번했다는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위 사진은 기사와 관계 없음(사진: pixabay 무료이미지).

SNS상에서 사회 각계의 성추문 고발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유명 소설가와 중견 시인의 성추행 사실이 피해자에 의해 폭로되는가 하면, 작곡가, 만화 작가, 큐레이터 등도 SNS에서 고발되는 등  문화예술계에서도 이같은 성추행이 만연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대부분 최근의 일이 아닌 몇 달에서 몇 년까지 시간이 꽤 지난 일이다. 이들은 왜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고백하는 걸까.

이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다. 성인과 청소년 사이,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 피해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현재 고발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당시 2차 가해를 협박 받았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그 업계를 떠났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고발 운동의 시작은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단 트위터 게시물이었다. 오타쿠는 어떤 취미에 열중한 사람을 뜻하는데 코스프레, 만화,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성추행, 성희롱이 있었다는 고발이었다. 피해자가 작성한 글은 작곡가 '초록아귀'가 미성년자인 피해자 A를 불러내 성추행했다는 내용인데, A는 당시 보복이 두려워 신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저 두려웠다고 글을 썼다.

피해자 A는 지금까지 이 일이 자신의 탓인 것으로만 생각했다고. 하지만 “성추행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고 성추행을 당하고 신고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라며 가해자의 사과를 원했다.

이 해시태그는 ‘#운동권_내_성폭력’에 이어 ‘#문단_내_성폭력’ ‘#문화계_내_성폭력’으로까지 확대됐다. 문학계, 스포츠계, 미술계, 영화계, 가족 내, 대학 내, 교회 내 등 사회 곳곳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나타나 현실에서는 말할 수 없는 자신의 피해 사례를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꺼냈다.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주위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로 타인들의 시선 때문이라 말하기도 한다. 성적인 이야기는 무조건 감추려고 하면서 피해자를 감싸주지 않고 수군거리거나, 피해를 입었다고 얘기하면 들어주기는커녕 “니가 빌미를 준 거 아냐?”라고 피해자를 탓한다는 것. 분명 책임은 잘못된 행동을 한 가해자에게 있는데, 주변인은 가해자에게 이입해 피해자를 비난한다.

고발 운동이 SNS에서 폭발적으로 이뤄지게 된 것은 익명성 때문이기도 하다. SNS 사용자들은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 어떻니, 옷을 짧게 입고 다니니, 하는 편견 없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문장으로 판단했다. 피해자를 지지하고 연대의 뜻을 보낸다는 응원이 쏟아지자, 용기를 얻어 피해 사실을 밝히는 또다른 이들이 줄을 이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파문은 피해자 박모 씨가 남성 이모 씨에게 성폭력을,  웹툰 <미지의 세계>로 인기를 끈 이자혜 작가로부터 2차 가해를 받아왔다는 폭로로 시작됐다. 박 씨의 글에 의하면, 이자혜 작가는 미성년자인 박 씨에게 남성 이 씨를 소개했고 박 씨가 성폭행당한 후 이 작가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자, 이 작가는 계속해서 성관계를 종용했다는 것. 또 이 작가가 피해자 박 씨, 가해자 이 씨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만화로 그려 2차 가해를 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 글이 SNS를 통해 퍼지자, 이 작가는 “과거의 성희롱 및 욕설에 대해 사과드린다. 타인에 의해 성폭력을 모의하도록 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며 모두 제 잘못”이라고 시인했다. 하지만 돌연 다시 “저는 성폭력을 방조하거나 알선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바꿨다. 성폭행 가해자 이 씨는 뒤늦게 SNS로 자신은 합의 하에 성관계를 맺었다며 성폭행 사실을 부인했다. 이후 이 작가의 인기작품 <미지의 세계>는 웹툰 플랫폼 레진에서 서비스가 중단됐고, 독자들에게 환불 조치됐다. 출판사 유어마인드 역시 계약을 취소하고 출간 예정이던 3권은 폐기 처분한다고 밝혔다.

문학인에 대한 고발도 잇따라, 박진성 시인, 박범신 소설가 등의 이름이 SNS에 올랐다. 익명의 고발이었고 성추행 폭로가 사실로 판명 나지 않았으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출판 편집자 일을 했다며 글을 쓴 B 씨는 박범신 소설가가 술자리에서 신체 접촉과 성적 농담을 했다고 주장했다. 박범신 씨는 방송작가, 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이들을 각각 ‘늙은 은교,’ ‘젊은 은교,’ ‘어린 은교’ 등으로 부르며 희롱했지만 자신과 동석한 이들은 이름 있는 소설가와 권력관계에서 을이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영화 <은교>를 제작할 당시에 박 씨가 주연배우인 김고은에게 섹스 경험이 있냐는 질문을 했다고도 덧붙였다.

박진성 시인은 트위터, 페이스북의 여성 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 자살할 것이라며 위협하고 만남을 가졌다. 박준성 시인은 시인 지망생 여성들에게 유명 시인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성희롱 발언을 하거나 강제로 신체 접촉을 한 것이 폭로 내용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미술계에서도 추문이 터져 나왔다. 일민미술관 함영준 큐레이터가 한 여성 작가에게 욕설과 인격 모독성 비하 발언을 했다는  고발이 올라왔다.

피해자들은 문단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다거나 SNS에 글을 쓰지 말라는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SNS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사과했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불쾌하게 느낄 줄은 몰랐다"거나 "합의 하에 있었던 일"이라고 발뺌해 비난을 받고 있다.

시인 조모 씨도 최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등단 전에 어느 시인이 남성 시인 다섯 명을 콕 지명해서 이 사람들 있는 자리에는 절대 가지 마라"고 '코치'해 준 일이 있었다고 개인적인 경험담을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예술계의 성추행 사실이 잇따라 폭로되자, 해당 예술인이 가입된 단체나 동료 예술인도 크게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 

성추문에 휩싸인 문학인이 소속된 한국작가회의는 24일 입장을 발표했다. “풍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엄중한 일”이라며 “본회 정관에 ‘본 법인의 정관을 위배하거나 품위를 현저히 손상시킨 회원은 소명절차를 거쳐 이사회 결의로써’ 자격 정지 또는 제명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속하게 해당 회원들의 소명을 청취해 절차에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1990년대 문단 내 여성차별 등에 항의하는 운동을 펼쳐 왔던 노혜경 시인도 최근 일련의 사태에 대해 "문화를 이끌어야 할 문단이 이미 (문단 내부에서) 제기됐던 문제를 무시한 결과 이런 대대적인 망신을 당하게 됐다"며 "문단 내 성폭력이라고만 이름을 붙이기엔 규모가 크고 그 시작이 문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고 23일자 '머니투데이'가 보도했다.

문화연구자 오혜진 씨도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내 성폭력’ 해시태그운동이 보여주는 것은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강간문화’라고 지적했다. 또 “현재 꼬리를 무는 성폭력 고발이 보여주는 것은 성폭력이 파렴치한 특정 개인의 예외적 행위가 아니라, 해당 분야의 권력관계를 유지, 작동하게 하는 일종의 ‘문화’로서 주변인들의 묵인·방조·가십화를 통해 지속·확산돼왔다는 점”이라며 “이 어둠을 드러내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다. 그 이유가 뭔지, 그리고 그걸 기꺼이 해낸 이 극적인 ‘용기의 폭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두고두고 새겨볼 일이다”라고 최근 성추문 폭로의 의미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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