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노벨문학상, 그리고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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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노벨문학상, 그리고 한국문학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6.10.16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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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팝가수 밥 딜런이 선정됐다는 스웨덴 한림원의 발표를 접한 세계 문학계의 충격이 만만찮은 듯하다. 선정위원회는 “그의 노랫말은 귀로 듣는 시이며, 위대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는 선정 이유를 내놓았지만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문학의 지평을 넓힌 참신한 발상’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의 권위를 스스로 깎아내린 경솔한 결정’이라고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밥 딜런의 수상 소식은 지구촌 주민 모두에게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특히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에겐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충격적이라기보다는 당혹스럽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겠다. 이런 말을 할 주제는 아니지만, 세계문학의 변방인 한국 땅의 귀퉁이에서 간신히 소설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수상 소식을 전한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는 “어!”하는 외마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 다음엔 ‘이래도 되나…’하는 당혹감, 그리고 ‘밥 딜런이 세계 대중음악계에 미친 영향이 아무리 크다손 쳐도 노래가사에 노벨 문학상이 돌아가다니…’ 하는 씁쓸함이 차례로 찾아들었다.

이런 느낌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던지 환영하고 기뻐하는 반응을 보임직한 수상자의 나라인 미국의 <뉴욕타임스>조차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피니언란에 실린 ‘밥 딜런이 수상하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고문 내용은 이렇다. “밥 딜런은 유능한 작사가다. 그의 가사를 시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딜런의 가사는 그의 음악과 떨어질 수 없다. 딜런은 작가가 아닌 음악가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벨상 위원회가 ‘작가’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은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선택이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역시 밥 딜런의 수상을 비판하며 “이건 ‘스웨덴즈 갓 탤런트’(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이라고 일갈했다.

작가들 역시 비판과 당혹감이 뒤섞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쌍둥이별(2004)> 등 10권 이상의 책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은 미국 작가 조디 피콜트는 “밥 딜런의 수상을 축하한다. 그럼 이젠 내가 그래미 상(미국 레코드업계에서 선발하는 우수 음반 상)을 받을 차례인가”라고 비꼬았다던가. 영국 작가 하리 쿤즈루는 트위터에 “오바마에게 부시와 다르다고 노벨평화상을 준 이래로 가장 믿기 힘든 노벨상 수상”이라는 소감을 남겼다고 한다.

밥 딜런의 수상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블룸버그 통신 칼럼에서 밥 딜런이 시집 <풀잎>으로 유명한 미국의 19세기 시인 월트 휘트먼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그리스 신화의 음유시인 오르페우스 이후 노래와 시는 밀접했다. 딜런은 그런 음유시인 전통의 훌륭한 계승자”라고 말했다.

이런 엇갈린 반응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문학인과 독자들이 SNS를 통해 찬반양론을 쏟아내고 있다.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이번 노벨상 선정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이목을 끌기 위해 사고(?)를 쳤다는 느낌을 감추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얼마나 먼 길을 헤매야 아이들은 어른 되나/ 얼마나 먼 바다 건너야 흰 비둘기는 모래 위에 잠들 수 있나/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전쟁을 해야 사람들은 영원한 자유 얻나/ 오 내 친구여 묻지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중략)/ 얼마나 여러 번 올려봐야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나/ 얼마나 큰 소리로 외쳐야 사람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죽음의 뜻을 아나/ 오 내 친구여 묻지 마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너무나 유명한 밥 딜런의 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의 가사다. 이런 가사도 있다.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Knockin' On Heaven's Door)>의 한 구절.

엄마 이 총을 땅에 꽂아 주세요./ 나는 더 이상 총을 쏠 수 없어요./ 거대한 검은 구름이 나를 따라오고 있어요./ 천국의 문을 나는 두드리고 있어요.

단언컨대 10대 후반과 20대 전반, 내 헐벗은 청춘을 위무해 준 것들의 목록에는 밥 딜런의 노래가 포함돼 있다. ‘포크송’을 대표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세계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고, 전쟁과 살육, 인종차별이란 우리 시대의 야만을 비판하는 그의 목소리엔 울림이 있다. 젊은 시절, 나는 밥 딜런과 그의 연인이자 반전가수였던 존 바에즈의 노래에 위안을 받으며 포악한 유신과 5공 시대를 넘어 왔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랫말을 시로 분류하겠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아가 노벨상 수상작에 값하는 문학적 가치를 가졌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글쎄, 나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그의 노래가사를 타고르, 예이츠, 파블로 네루다 같은 역대 노벨상 수상 시인들의 주옥같은 작품과 동렬에 올려놓지는 못하겠다.

편견 때문에 밥 딜런의 성취를 폄훼하는 건 아니다. 서정성이 풍부한 그의 노랫말은 사회성이 강하고 때로는 영성적이다. 그러기에 지난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불려오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밥 딜런의 가사가 아름답고 서정적이란 것은 그가 만든 멜로디, 애수 띤 그의 목소리에 실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의 노랫말은 노래의 일부이고, 따라서 음악의 일부란 이야기다. 미국작가 조디 피콜트 말마따나 밥 딜런은 그래미상에 어울리지 노벨문학상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따지면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를 부른 ‘사이먼과 가펑클’의 그 서정적이고 예지적인 가사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비틀즈’는? 왜 하필 밥 딜런인가.

정작 밥 딜런은 아직까지 노벨상 수상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니 스웨덴 한림원이 좀 머쓱해지긴 했다. 어쨌거나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이렇게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수상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내 심상과는 별개로, 가수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현대 문학에 몇 개의 화두를 던진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무엇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예술에서의 장르 구분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것. 많은 문학인들이 밥 딜런의 수상에 심리적 저항감을 느꼈던 건 어쩌면 자신들이 ‘문학의 전문가’라는, ‘분업화 시대의 전문가적 권위’에 손상을 입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말한다면 자칫 고답적이고 권위주의적이란 비난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포드 시스템’이 도입된 이래 20세기에 정착된 사회구조를 ‘분업화’로 명명할 수 있다면, 21세기는 다시 ‘융합의 시대’라고 불러야 할 터이다. 지금은 분절적으로 독립된 각 영역이 병렬적으로 집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화학적 결합으로 나아가는 시대다. 그건 예술 영역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언필칭 종합예술이라는 영화나 뮤지컬이 각광받고 있지 않나. 문학, 미술, 음악 등등으로 나뉘는 전통적 장르개념이 무너져 가는 판이다. 그렇게 보면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런 시대적 추세를 가장 극적으로 공표한 사건인 셈이다.

사실, 노벨문학상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해 수상자인 벨라루스의 기자 출신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작품들도 전통적인 시나 소설이 아닌, 체르노빌 원전의 후유증을 겪었거나 전쟁의 참상에 노출된 여성들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앞으로도 노벨상위원회의 ‘장르 파괴’는 계속되지 않을까.

이번 노벨문학상 발표가 던진 또 하나의 화두는 ‘예술과 대중’이라는 주제이겠다. 예술계의 해묵은 논쟁 중의 하나가 ‘순수-대중예술’ 논쟁이다. 기왕에도 대중소설, 팝아트, 대중가요의 가치를 놓고 이따금 격렬한 시비가 벌어지기도 했던 터였지만, 팝가수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고도 산업시대에서의 대중성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만드는 것. 이미 우리는 대중문화인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급격히 커지는 경향을 목도하고 있지 않나. 이를테면 사드 문제라거나 병영문화 등등의 정치적·사회적 현안에서조차도 젊은 방송인 김제동의 발언이 그 어떤 학자나 전문가의 주장보다 훨씬 큰 파급력과 호소력, 나아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거다.

문학이나 음악, 미술 장르에서의 ‘클래식’ 전문가들은 비록 대중적 영향력이나 파급력은 떨어진다 해도 자신들이 인류의 고귀한 지적 자산을 생산해 내고 있고, 그래서 더 ‘고급’하고 더 ‘세련’된 일에 종사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텨왔던 터다. 그런 마당에 그 ‘고급’예술의 최고봉인 노벨문학상마저 ‘대중예술’에 점령당했으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긴 하겠다.

글쎄, 노벨상 위원회의 이번 이벤트(?)가 문화 예술의 ‘하향평준화’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지, 아니면 ‘문화와 예술의 민주화·평등화의 촉매제’가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문화예술인들에게 대중이라는 ‘괴물’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밥 딜런의 수상에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넓혔다‘는 찬사가 나오는 판이니 그러잖아도 잘 팔리지도 않는 시와 소설을 쓴답시고 끙끙거리는 소설가와 시인들은 ‘문학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 하는 화두 앞에 새삼스럽게 골치를 썩여야 할 판이다.

그건 그렇고 한국 문학은 올해도 물을 먹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은근히 기대했던 일본은 그래도 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내 체면치레 했다고 담담해 하는 분위기이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예측 속에서도 행여나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던 우리는 다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흔히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가 미흡하고 제대로 된 번역이 없어서라고 하지만, 이젠 좀 본질적인 원인을 짚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식민지 경험, 6·25전쟁, 남북분단, 그리고 숨 가쁜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을 달려온, 그래서 문학적으로 수많은 소재의 보고를 가지고 있는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사에 남을 만한 기념비적인 작품 하나 가지지 못했다는 게 오히려 기이한 일이 아닐까. 거대 서사가 사라진 공간에서 단편 위주로 오목조목 예쁜 문체를 다듬거나 독서 훈련이 모자란 젊은 세대의 감수성에 영합하는 데 골몰해 온 한국문학의 풍토부터 내남없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기야 문학인들만 나무랄 일도 아니겠다. 일본만 해도 문학상 2명을 포함해 각 분야에서 벌써 25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터다. 인구나 경제 규모로 따지자면 우리도 적어도 예닐곱 명쯤은 냈어야 하건만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상 하나가 고작이다. 그 동안 남의 것을 베끼는 데 골몰하느라고 과학이건 예술이건 우리의 기초 체력을 키우는데 소홀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노벨상을 받으려고 예술이나 학문을 하는 건 아니다. 노벨상을 받지 못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노벨상은 한 나라의 문화와 학문 수준을 가늠하는 간접적인 잣대는 된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소식에 공연히 울적해져서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게 되는 어느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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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2016-10-17 18:42:03
폭넓은 식견과 설득력 있는 논리에 공감하고 갑니다. 아무리 주는 사람 마음이라지만, 왜 하필 밥 딜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