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 대구의 문화지형을 바꾸고 도시의 소프트파워를 높일 대구간송미술관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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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 대구의 문화지형을 바꾸고 도시의 소프트파워를 높일 대구간송미술관이 부럽다
  • 편집국장 송문석
  • 승인 2024.09.2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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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덕산(603.7m) 기슭에 자리 잡은 대구간송미술관. 미술관에 다가가면서 눈길을 맨 처음 사로잡는 건 거대한 슬라브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늘씬한 기둥들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열주 같지만 일렬로 늘어선 것이 아니라 불규칙하게 세워져 있어 그런 것 같지도 않다. 훤칠하고 시원한 모습이 울진 금강송같다.

간송미술관
대구간송미술관 전경. 열한 개의 기둥이 큰 슬라브 지붕을 떠 받치고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하나 둘 셋 넷……열하나. 미끈한 기둥은 모두 열한 개다. 두세 번 세어봐도 열두 개가 아니고 열한 개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동양적 사고에서는 ‘우주의 질서’이고 ‘완전한 주기’를 상징한다. 12간지에 맞춰 하루를 열두 시간으로 나누었고, 1년을 열두 달로 정했다. 서양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신화 속 올림포스 산의 신과 예수의 제자도 열두 명이고, 하늘을 열두 구간으로 나눠 ‘황도십이궁’ 개념을 만든 것도 서양인들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12라는 숫자는 ‘완벽함’과 ‘우주질서’를 상징한다.

그런데 왜 대구간송미술관 건물 입구의 나무 기둥은 열한 개일까.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평생의 스승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산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살라며 지어준 전형필의 아호 간송(澗松). 열두 번째 기둥은 오늘의 간송미술관을 있게 한 전형필의 아호 안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땅 위로 보이는 열한 개의 소나무 기둥과 미술관 전체에 간송 전형필의 ‘문화보국(文化保國)’의 혼이 스며들어 있는 소나무 한 그루. 그렇게 해서 완벽한 열두 그루 소나무가 완성된 것은 아닐까. 건축가인 최문규 교수도 그래서인지 미술관 곳곳에 아름다운 소나무를 심었으며, 안동서원에서 모티프를 얻어 자연스러운 지형과 공간을 연출했다고 한다.

대구간송미술관 개관기념 국보 보물전 ‘여세동보(與世同寶)’. 지난 9월 3일 문을 열어 오는 12월 1일까지 열리는 ‘세상 함께 보배 삼아’라는 뜻의 ‘여세동보’ 국보 보물전은 연일 전국에서 몰려든 관람객들로 성황이다. 전인건 대구간송미술관장은 “빼어난 문화유산을 지키는 문화보국의 일에 동참해주는 관람객”을 열두 번째 기둥이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어쩌면 간송 전형필의 뜻을 좇아 미술관을 에워싼 관람객이 간송과 함께 열두 번째 기둥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간송미술관의 수장품을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서울 간송미술관은 봄, 가을 두 차례 2주간만 반짝 전시를 할 뿐이다. 이마저도 지방에서 때맞춰 올라가 본다는 건 힘든 일이다.

간송
대구간송미술관 개관기념 국보 보물전 '여세동보'를 보기위해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전을 연다는 소식은 더없이 반가웠다. 게다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와 보물 40건, 97점을 볼 기회다. 그러나 예매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결국 개관시간 1시간 전 대구간송미술관에 무작정 찾아가 현장 매표소에서 어렵사리 입장권을 구했다. 추석 연휴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과 출입구는 관람 열기로 후끈거렸다.

한글의 원리와 사용 설명, 용례를 상세하게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이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끔찍이 간직한 소장품이다. 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 소장자가 1000원(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에 책을 내놓았단 말을 듣고 거간에게 감사의 뜻으로 소개료 1000원을 주고, 책값으로는 1만 원을 선뜻 내놓았다. 부르는 값의 11배인 1만1000원에 훈민정음을 거둔 것이다. 간송은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거금을 내놓고 품에 안은 것이다. 전형필은 한국전쟁 당시 훈민정음을 품속에 넣고 다니고, 잘 때는 베게 속에 넣어 한시도 몸에서 때놓지 않았다.

청자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구름 사이를 오르내리는 학을 상감기법으로 가득 담아 신비스러운 느낌을 준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역시 간송의 문화보국 정신이 없었으면 이 나라에 존재하지 못했을 국보이다. 일본인 도굴범에 의해 강화도 무덤에서 도굴된 이 청자는 서울(당시 경성)의 고려청자 거간꾼에게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에 넘겨졌다. 이틀 후 청자는 다시 다른 일본인 거간에게 1500원에 되팔렸고, 다음에는 대구의 조선인 치과의사 신창재(愼昌宰)에게 4000원에 넘어갔다. 신창재는 자금난이 닥치자 청자를 들고 서울에 올라와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 6000원에 팔아버렸다. 마에다는 이 청자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2만 원에 팔겠다고 소문을 냈다. 1만 원을 제시한 조선총독부의 제의도 거절한 그였다. 간송 전형필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처음 보는 자리에서 현금 2만 원을 내놓고 곧바로 거둬들였다. 한 푼도 깎지 않았다. 조선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라면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인수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완벽한 형태미와 S자형 곡선, 청초한 옥색, 몸통에는 구름과 학을 상감기법으로 새겨넣었다. 특이한 것은 흑백으로 상감한 원 안에 있는 학은 구름 사이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원 밖의 학과 구름은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다. 원 안의 42마리를 포함해 모두 69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를 헤치며 위아래로 날고 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천 마리의 학이 노니는 듯 하다면 ‘천학매병’이라고 불렀다.

뒷날 일본의 수집가 무라카미(村上)가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 탐이 나 간송에게 팔기를 애원한 일화는 흥미롭다. 무라카미가 간송에게 산 값의 두 배인 4만 원을 청자값으로 제시하자 간송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께서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청자를 주신다면 시세대로 제가 사겠으며, 천학매병은 제가 치른 값에 드리겠다.” 나이 오십 세의 무라카미는 서른 살의 청년 전형필의 배포와 기백에 고개를 숙이고 '조선 제일의 대수장가'가 되라고 덕담을 했다고 한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서화를 수집한 사람 중에는 서양인도 있다. 일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존 개스비(John Gadsby)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고려청자에 미쳐 있었다. 20년 가까이 그가 수집한 고려청자는 그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들이었다. 개스비는 귀국하게 되면서 그의 소장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밀고 당기는 가격 협상과 결렬 위기 끝에 간송은 개스비 컬렉션을 40만 원, 서울 기와집 400채 값을 치르고 거둬들였다. 간송은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주의 논 1만 마지기를 내놨다. 간송은 개스비 청자 20점을 가져오기 위해 비행기를 전세 냈다. 직접 도쿄로 가서 오동나무 상자에 한 점씩 포장해 비행기 화물칸이 아닌 기내석에 묶어 들여왔다. 청자 원숭이형 연적, 청자 기린형 향로, 청자 오리형 연적,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등이 그것이다.

원숭이
청자 모자 원숭이형 연적. 아기 원숭이가 엄마 원숭이 뺨을 만지며 칭얼거리는 모습이 귀엽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간송 전형필은 서울 배오개에서 큰 상권을 가진 전창엽의 손자로 태어났으나 무관 출신으로 종2품 가선대부를 지낸 작은 할아버지 전창렬이 후손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간송은 친부와 양부를 포함해 잇따라 집안에 줄초상이 겹치면서 친가와 양가 재산 모두를 물려받는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와세다 대학 법과대학을 마친 스물다섯 청년 전형필 앞에 던져진 가문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에 퍼져 있는 논만 해도 800만 평(4만 마지기)이 넘었다. 한 해 수확이 쌀 4만 가마니(2만 석)라고 추정하면 매년 서울 기와집 150~200채를 살 수 있는 재산이었다. 당시 조선 사람 중 농지 소유만 따졌을 때 40대 부자에 들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에 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유지 관리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간송을 ‘민족의 혼이자 얼’인 옛 그림과 글씨, 책, 도자기 수집의 길로 이끈 사람은 위창 오세창이다. 문화재가 헐값에 일본으로 유출되는 모습을 보고 위창 자신도 이를 막기위해 수집에 나섰지만 거액의 돈이 들어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위창은 언젠가는 독립이 됐을 때 문화가 살아있다면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간송이 국내 최초의 사설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짓고 수장품을 보관 전시 연구한 것도 ‘문화보국’ 정신의 발로였다.

파노라마
간송미술관 수장품을 38m에 이르는 대형 스크린에 담아 8분17초 동안 보여주는 '흐름'은 관람객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대구간송미술관에서 간송의 수장품을 본 감동은 뜨거웠다. 무엇보다 이러한 국보와 보물을 한곳에서 전시하고 있는 대구간송미술관을 품에 안은 대구가 부러웠다. 간송과 간송미술관이 대구와 어떤 인연이 있어 대구에 대구간송미술관이 들어서게 됐는지 궁금했다.

“대구시가 간송미술관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걸로 압니다. 특히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보국 정신과 맞닿는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에 간송미술관측도 공감하고 동의했다고 들었습니다.”

대구간송미술관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뛰어난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나 박물관 하나가 도시를 바꾸는 세상이다. 대구는 대구간송미술관이 있어 한 차원 높은 도시품격을 유지하게 됐다. 퐁피두센터 부산분관 유치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는 부산의 여론을 보면 마치 딴나라 세상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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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VIC뉴스 2024-09-30 12: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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