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 일정계획없이 마음이 가고 발이 가는 곳으로 흐르는 여행을 한다. 다만 한 두 개 정도의 사소한 목적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목적 달성보다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의 우연한 여정을 즐긴다. 이번 호주 여행에서 하나의 목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요 녀석을 보는 것이었다. 비록 사정상 실제로 태즈매니아에서 살고 있다는 녀석을 보지 못했으니 목적 달성에는 100% 실패했다. 하지만 요렇게 캔버라에 있는 호주국립박물관에서 박제품을 보았으니 절반은 성공했다. 요 녀석은 오리너구리platypus다. 오리 주둥이와 물갈퀴를 가진 너구리다. 몸길이 30∼45㎝, 몸무게 1∼1.8kg이며 호주의 동남부 및 남쪽의 큰 섬 태즈메이니아에 서식한다. 물 밑에 사는 가재, 조개 등을 먹고 산다. 멸종위기에 놓였단다.
학명은 Ornithorhynchus anatinus다. 진핵생물역-동물계-척삭동물문-포유강-단공목-오리너구리과에 속한다. 생명체에 대해 이렇게 확실한 학명을 붙이며 이렇게 역域Domain-계界Kingdom-문門Phylum-강綱Class-목目Order-과科Family-속屬Genus-종種Species으로 정확하게 분류하는 일은 스웨덴의 린네Carl von Linne, 1707~1778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생물분류학의 창시자다. 생물분류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린네 덕분에 생명체를 분류하는 기본적인 방향과 방법이 마련되었고 이후로 린네의 후예들에 의해 생물분류는 더욱 정교해졌다. 마침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완벽하게 분류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아마도 1788년에 호주로 들어가기 시작한 영국의 백인들은 오리너구리를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박제를 하여 영국으로 가서 자연과학회 회원들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박제사를 사기꾼으로 몰아 부쳤다. 오리 입과 물갈퀴, 그리고 두더쥐나 너구리 몸체를 가지고 합성해서 만든 박제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교하며 과학적인 동물분류 체계상 이런 동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굳게 확신했다. 하지만 곧 이 오리너구리의 실체를 알고 경악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포유류는 꼭 새끼를 낳아야 했다. 그런데 오리너구리는 조류인 닭처럼 알을 낳아 새끼를 부화시킨다. 부화되어 태어난 새끼에게 젖을 먹여 키운다. 포유류 암컷에게는 젖을 먹일 젖가슴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냥 어미의 피부에서 젖이 스며 나와 새끼는 여기저기 엄마의 몸을 핥아 먹는다. 포유류는 자라면서 이빨이 자라는데 오리너구리는 자라면서 이빨이 빠진다. 도대체 저 괴상망측한 기형의 동물을 어찌 분류해야 할 것인가? 동물 과학자들에게 척추동물은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조류 다섯 가지로 분류해야만 했다. 일단 확실한 것은 물고기 어류는 아니다. 젖을 먹이니 조류도 아니고 알을 낳으니 포유류도 아니다. 부리가 있고 이빨과 젖가슴이 없으니 포유류도 아니다. 발이 없고 물갈퀴가 있으니 조류인가? 날개가 없으니 조류가 아니다. 물에서도 뭍에서도 양쪽으로 사니 양서류兩棲類인가? 물칼퀴가 악어처럼 생겼으니 파충류인가? 복잡하다. 어지럽다. 헷갈린다. 오리너구리를 어느 하나로 분류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여러 논란 끝에 오리너구리를 어정쩡하게 포유강(포유류)으로 분류하기까지는 백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오리너구리는 하나의 단單일한 구멍孔으로 배설을 하며 알도 그 구멍으로 낳기에 단공목單孔目이라고 포유류 밑으로 분류했다.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이 하나의 구멍인 것이니 궁색해도 정확한 분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 포유류로 분류한 것은 어중간하며 어정쩡하게 분류된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할 수 없이 포유류에 속한다고 대충 분류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코Umberto Eco 1932~2016는 이러한 인간의 어정쩡함에 대해 그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책을 썼다. 책 제목이 『칸트와 오리너구리』다. 아마도 대표적 철학자로 가장 유명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를 제목에 올려 인간이 가지는 철학의 한계를 명쾌하면서도 유쾌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철학자라고 해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과학자라고 해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다만 아는 한계 안에서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을 뿐이다. 에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우리 인간의 부족한 능력일 것이다. 인간이 사는 방식인 문화도 그런 능력 안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져 왔고 앞으로도 이루어져 갈 것이다. 완전완벽하지 못한 부족한 인간의 인식 및 분석 한계를 알아야겠다. 그래야만 인간은 우리를 잘 알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