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닷가 언덕 위의 놀라운 예술공간, ‘루이지애나 근대미술관’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서 북쪽으로 약 35km 가량 떨어진 작은 기차역 훔레벡(Humlebaek). 우리나라의 한적한 간이역 같은 소박한 역에 기차가 멈출 때마다 백여 명의 승객들이 서둘러 내린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이정표만을 따라 걸어간다. 루이지애나 근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훔레벡 역에서 15분 가량 걸어 루이지애나 미술관 입구에 도착하면 당혹감이 밀려온다. 20여 평이나 될까 말까 한 매표소 앞 마당과 밖에서 보는 미술관 본관 건물은 전혀 미술관스럽지가 않다. 마치 개인 주택같다. 훔레벡 역에서 미술관까지 걸어오면서 본 마을 풍경이 오히려 놀랍도록 아름다워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매표소와 기념품 가게가 들어선 본관 건물을 지나 미술관 안뜰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 풍경은 180도 달라진다. 푸른 잔디밭에 하늘을 찌를 듯한 고목들,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조각 작품,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짙푸른 바다. 전시실 곳곳에서 만나는 세계적인 그림들과 조각품, 건너편의 스웨덴과 맞닿아 있는 외레순드 해협의 푸른 바닷가를 배경으로 관람객의 동선이 이어지면서 미술관의 모든 것, 그 자체가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어디에 있건 마음을 내려놓고 미술의 바다에 푹 젖어든다.
드높고 푸른 하늘과 파란 잔디밭, 그리고 지평선과 수평을 이루는 외레순드 해협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알렉산더 칼더의 모바일 작품과 헨리 무어의 조각품, 그리고 한가롭게 이들 작품을 감상하며 거니는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미술의 숲을 거닐다가 지치면 미술관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나와 아무 곳에나 앉아 머리를 쉬어도 된다.
여러 개의 건물로 이뤄진 전시실에도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리히텐슈타인 등 세계적인 현대 작가의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그 중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은 특별하다.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은 한쪽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된 전시실에 설치돼 있으며, 투명한 유리 너머 호수 숲을 배경으로 어디론가 걷고 있다.
루이지애나 미술관은 세계적인 여행작가 패트리샤 슐츠가 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1000곳’에 상위 10%에 드는 곳으로 소개돼 있을 만큼 북유럽의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마크 어빙, 피터 세인트 존이 지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건축 1001’에는 미술 소장품을 떠나 루이지애나 미술관 자체가 건축 예술작품으로 소개돼 있을 만큼 자연과 건축이 조화롭게 연결돼 있다.
이곳은 원래 덴마크 왕실 소속 장교인 알렉산더 브룬이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는 그가 인연을 맺은 세 명의 아내 이름이 모두 우연찮게 루이스(Louise)라는 데서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후 미술관 창립자인 크누드 옌센이 1956년 이 곳을 매입해 건축가 요르겐 보, 빌헬름 워럴트에게 의뢰해 건축을 맡겼다. 두 건축가는 30여 년에 걸쳐 바다를 끼고 있는 이곳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본관과 분관들을 복도와 유리로 서로 연결해 독특한 건축물을 완성했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이런 세심한 노력 덕분에 미술관은 자연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으며 야외와 실내에 전시된 작품들은 마치 본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스며들어 있다.
#2. ‘빌바오 효과’라는 신조어를 낳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주도 빌바오 시. 스페인 여행자라면 수도 마드리드나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비야, 그라나다, 말라가를 갈지언정 특별한 업무가 없는 한 마드리드에서 고속열차로 5시간이나 걸리는 빌바오를 굳이 여행지 리스트에 넣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인구 35만 명의 이 도시에 매년 100만 명의 관광객이 꾸준히 몰려든다. 이 도시의 무엇이 세계 각지로부터 여행객을 불러 모을까.
빌바오 시 가운데를 흐르는 네르비온 강가에 들어선 범선 모양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전세계 여행객을 끌어 모으는 효자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미술관은 번쩍거리는 티타늄 패널로 외장을 치장해 멀리서 보아도 50m 높이의 기묘한 형상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프랭크 게리가 “물고기 형상을 패러디했다”고 한 것처럼 비늘이 번쩍이는 여러마리의 물고기가 덩어리를 이뤄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인다.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의 건축물도 놀라운 예술작품이지만 소장품 역시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미술관 1층 전시장의 리처드 세라의 ‘시간의 문제(The matter of time)’은 영구 설치작품이다. 미술관 밖에는 아니쉬 카푸어의 조각 ‘큰 나무와 눈(Tall tree & the eyes)’, 제프 쿤스의 거대한 ‘꽃 강아지(Puppy)’, 루이즈 브르주아의 ‘마망(Maman)’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빌바오가 구겐하임미술관 하나만으로 매년 세계에서 100만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네르비온 강 주변은 물론 도시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작품, 문화가 흐르고 있다.
스페인의 대표 건축가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한 네르비온 강 위의 보행자 전용교 ‘수비수리(Zubizuri)’,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일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가 설계한 ‘이소자키 아테아’, 역시 프리츠커 수상자인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독특한 외관의 캐노피를 가진 빌바오 지하철 역사 등 볼거리가 수두룩하다.
구시가에서 만나는 중세시대 교회와 건축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과 핀초 가게들이 빌바오의 다른 모습으로 반긴다. 그리고 유쾌한 스페인 사람들의 친근함은 여행자의 긴장감을 해방시킨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대해 갖는 자부심과 만족감, 그리고 도시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서 활기찬 오늘의 빌바오를 느낀다. 빌바오의 이런 모든 것들이 '빌바오 효과'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빌바오가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시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네르비온 강은 비스케이만을 거쳐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이런 지형적 이점을 살려 철강 조선산업이 발전했으며 한때 도시를 먹여 살렸다. 그런데 1970년 이후 한국을 비롯한 신흥 조선산업국가들이 치고 나오면서 빌바오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했던 중공업도시였던 빌바오는 1980년대 중반 실업률이 35%에 이를 만큼 도시는 급격히 쇠락했다.
빌바오 시와 의회, 상공계, 시민 등은 도시를 살리기 위한 도시재생 사업에 나섰다. 조선소와 항구 주변의 방치된 공장들을 철거하고 오염된 네르비온 강을 정화했다. 그리고 강을 따라 산책로와 공원을 조성하고, 미술관 음악당 광장 등을 조성했다. 특히 빌바오 시는 세계적인 미술재단인 구겐하임에 미술관의 운영을 위탁했으며, 프랭크 게리의 설계로 7년만에 완공해 1997년에 개관했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분관인 셈이다.
#3.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해안 비경 이기대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선택
부산 남구 이기대는 바다와 숲, 해안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비경을 가진 명소다. 바다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달맞이언덕과 느낌이 다르고, 해운대 광안리해수욕장과 감촉이 다른 곳이 이기대이다. 그래서인지 이기대 갈맷길은 전체 갈맷길 코스 중에서 가장 인기코스이다. 바다 숲 해안선이 아름다운 이곳에 미술관이 들어선다면?
부산시가 이기대에 ‘숲 미술관’을 조성한다는 계획아래 행정절차를 밟고 있다. 아마도 올해 안에는 예술공간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최근 부산시가 프랑스의 세계적인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분원을 머릿속에 두고 추진 중임을 내비쳤다. 장소로는 이기대 중간 쯤의 어울마당이 꼽히고 있다. 퐁피두 측에 3만㎡ 규모 부지를 내주고, 1만5000㎡ 건물을 짓는다는 구상안도 나왔다. 전시실 창작공간 수장고 커뮤니티홀 야외공원이 포함된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일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를 만나 이기대 예술공원 조성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는 등 적극적이다.
물론 반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이 있는데 무슨 미술관을 또 짓느냐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기대에 새롭게 짓는다는 미술관이 기존의 두 미술관과 성격상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는 질문도 이어진다. 지금까지 시립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의 예산 인력 조직에 대해 특별한 지원도 하지 않고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다가 새로운 미술관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다.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반론이고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렇다고 이기대 미술관 건립논의와 시도 자체를 초장에 싹부터 잘라버리자는 전투적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반대 혹은 제시된 의견에 대한 주장은 주장대로 논의하고 해결방법을 찾아 풀어나가면서 전향적으로 이기대 미술관 건립에 대해 검토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최근 해외로 나가는 국내 여행객 상당수가 미술관순례나 건축기행, 문학기행, 음악기행, 트레킹 등 테마별 여행을 즐길 정도로 세분화 전문화되는 추세다. 여행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눈높이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다.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천혜의 해안선을 자랑하는 부산에 멋진 미술관을 세우고 세계적인 작품들을 자연 속에서 즐길 수 있다면 해외로 나가는 발길을 상당수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해외 관광객 유치 또한 가능하다.
국내 어느 미술관에 가더라도 고만고만한 작품이 특별한 감흥이 없는 건축물 안에 전시돼 있다. 도토리 키재기 식이다. 세계적인 미술관과 명작을 꼭 해외로 나가지 않더라도, 또 그럴만큼 호주머니 사정이 안돼 꿈도 꾸지 못하는 국민들도 가까이에서 그런 경험과 감동을 느낄 권리가 있다. 루이지애나와 빌바오의 감동을 부산에서도 느껴보고 싶은 게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