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하굿둑 개방 정책포럼서
‘빅 히스토리’ 관점 중요성 제기
‘하구학’ 연구체계 구축 계기로
빅 히스토리(Big History, 대역사)가 유행이다. 어렵고 까마득한 이야기를 빅 히스토리로 풀어낸다. 우주사, 지구사(자연사), 고고학, 역사 등 다루는 영역도 점점 다양해진다. 공학과 철학이,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 통섭하기도 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데이비드 크리스천 등의 ‘빅 히스토리’는 이 분야의 장기 베스트셀러다. 광대한 스케일과 깊이 있는 통찰은 독자를 매료시킨다.
광대한 스케일과 통찰의 시선
시야를 넓혀(전문화 해) ‘낙동강 하구’를 빅 히스토리로 풀어낼 수 없을까. 전혀 엉뚱한 발상이 아니다. 지난 7일 낙동강하구기수생태계복원협의회 주최로 열린 ‘낙동강 하굿둑 개방 정책포럼’ 뒤풀이에서 ‘빅 히스토리’ 이야기가 나왔다. 요지는 이랬다. “낙동강 하구는 복잡하다. 강과 바다가 만나고, 기수역이 있고, 철새가 날아오고, 개발압력이 드세고, 기후위기가 현실화되는 곳이다. 이렇게 복잡한 곳은 빅 히스토리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공학자보다 인문학자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원로 철학자로서 환경운동 활동을 해온 박만준 동의대 명예교수였다.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다는 그는 이날 정책포럼 좌장이었다. 그의 말인즉, 하굿둑 개방 등 역동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낙동강 하구를 크고 넓게, 통찰·통섭의 시각으로 깊이 보자는 얘기였다. 그가 다시 말했다. “기수역 복원이니 생태계 복원이니 하는 공학적 얘기를 시민들이 알아 듣겠어요? 쉬운 말, 인문학적 언어로 시민에 다가서고 대중을 설득해야 문제가 풀려요.”
공감 가는 얘기였다. 낙동강 하구가 막힌 지 38년. 우리나라 하구의 50%가 보나 하굿둑, 방조제에 막혀 있다. 막힌 하구는 썩어갔고 고기들도 사라졌다. 토건 중심 개발주의의 산물이다. 이 답답한 현실에서 희망의 물꼬를 튼 것이 낙동강 하굿둑이다. 시민환경단체의 끈질긴 활동으로 2022년 2월 마침내 막혔던 하굿둑 10개 수문 중 1개가 열렸다. 환경부는 이 수문 개방으로 2022년 상류 5㎞까지 162일 동안, 2023년 7.5㎞까지 191일 동안 기수역이 조성됐다고 밝혔다. 제한된 구역에서나마 1년 중 절반 정도 바닷물이 들어왔다는 얘기다.
이렇게 기수역이 조성되자 하구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경제성 있는 실뱀장어가 떼로 몰려와 강으로 올라갔고, 사라졌던 연어와 은어가 돌아왔다. 게다가 낙동 재첩이 구포 일대에서 잡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굿둑 개방 과정을 보기 위해 일본의 하천 연구팀이 부산을 찾기도 했다. 희망적 긍정적 변화 조짐이다.
여전히 문제는 있다. 개방 실험이 더디다, 왜 개방 확대를 않느냐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윤석열 정부 들어 하천에 대한 정책 기조가 변한 것도 문제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8월 전임 문재인 정부가 결정한 금강·영산강의 보 처리 방안을 모두 취소해버렸다. 낙동강 하굿둑의 개방 확대에 대한 의지도 없어 보인다.
민관 협치의 성공적 사례
돌아보면, 낙동강 하굿둑 개방은 민관 거버넌스(협치)의 성공적 사례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가 같이 치러진 지난 2012년,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은 ‘낙동강 하굿둑 수문 개방’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민주당이 패배했으나 개방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 해에 60여 개 시민·환경단체로 이뤄진 ‘낙동강하구기수생태계복원협의회’가 발족했다. 시 예산이 지원되는 상근자도 생겼다. 지난 7일 정책포럼을 연 그 단체다.
시민단체와 지역언론이 나서자 박근혜 정부도 반응했다. 2015년 9월 새누리당 소속 서병수 부산시장은 낙동강 하굿둑 개방을 만천하에 선언하고, 부산시에 낙동강살리기추진단을 출범시켰다. 그후 2020년 6월 시범 개방, 2022년 2월 공식 개방 및 비전 선포식이 거행됐다. 하나 하나 숨가쁘게 진행된 역사적 순간들이다.
하구에 빅 히스토리가 필요한 이유
하굿둑 개방은 여야, 좌우를 떠나 모두가 합의한 국가적 이슈다. 어느 정권의 입맛에 따라 선택하거나 회피할 주제가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빅 히스토리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수백만 년의 자연·지질·지형 변화와 진화를 통해 오늘에 이른 낙동강 하구는 강의 끝(河端)이자 해양의 입(海口)으로서 연구대상인 동시에 실생활 터전이다. 기후위기가 주는 변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엔 지금 에코델타시티를 비롯, 맥도 그린시티, 국가도시공원, 세계자연유산 지정 등 다양한 사업이 중첩, 추진되고 있다. 국토와 물 이용의 측면에서 첨예한 이해가 얽혀 있기도 하다. 크게 읽고 넓게 보지 않으면 소탐대실의 우를 범한다. 낙동강 하구 빅 히스토리가 필요한 이유다.
빅 히스토리가 만들어지려면 정교한 통합 관리 및 연구체제가 필요하다. 이른바 ‘하구학(河口學)’ 정립에 관한 것이다. ‘하구학’은 △환경 생태 △수리 수문 △문화 관광 △미래유산 식으로 세분해 연구하되, 궁극적으로 통섭·통합되는 방향을 찾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하구학이 자리잡아 스토리텔링이 활성화되면 하구 빅 히스토리는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이다.
너무 앞서가는 얘기인가? 그렇지 않다. 그동안 많은 자료와 연구, 경험이 쌓였던 만큼, 방향과 체계만 제대로 잡는다면 안될 일도 아니다. "낙동강 삼어(연어, 은어, 황어)가 돌아왔다! 낙동 재첩이 다시 소득원으로!" 이런 뉴스를 보고 싶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봐야 낙동강 하구가 웃고 대한민국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