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저택 '정란각,' 영화 <아가씨> 등 흥행타고 스포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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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저택 '정란각,' 영화 <아가씨> 등 흥행타고 스포트라이트
  • 취재기자 조민영
  • 승인 2016.08.1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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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대표 적산가옥....카페 겸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해 관광객 끌어 / 조민영 기자

최근 개봉된 영화 <아가씨>와 <덕혜옹주>가 인기몰이를 하면서 이들 영화의 주요 배경인 대형 일본식 가옥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다다미방, 아담한 정원을 갖춘 일본식 가옥은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곳곳에 지어져 일부는 현재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한편으로는 일제 침략의 증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픈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부산시 동구 수정동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일본식 가옥 '정란각'도 그 중의 하나이다(본지 2016년 3월 3일자 보도).

밖에서 바라본 정란각, 꽃으로 둘러싸여 있는 흰 담과 기와지붕의 정문이 눈에 띈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과거의 히트 영화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이기도 한 정란각이 최근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로 탈바꿈해 손님을 맞고 있다. 5월 30일 게스트 하우스로 개장한 정란각의 새 이름은 ‘문화 공감 수정.’  관광객들은 일반 카페처럼 정란각 안에 들어가 다다미가 깔린 방안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며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사전예약을 하면 여느 게스트 하우스처럼 묵을 수도 있다. 옛날부터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았은 정란각은 현재도 일본인들이 부산에 관광 오면 필수 코스로 들르는 곳이어서 일본 사람들이 꾸준히 많이 찾아오고 있다. 영화 <아가씨>에 등장하는 일본식 저택의 풍취를 맛보고 싶다면 이곳을 찾으면 될 듯. 

부산의 지하철 1호선 부산진역 1번 출구에서 나와 골목을 따라 10여 분쯤 걸어 올라가면, 하얀 담벼락의 집 한 채가 눈에 띈다. 이곳이 정란각이다. 이곳 주변에 있는 집들과 비교해서 높은 담과 기와로 지어진 정란각은 크기 자체가 매우 특별하게 느껴진다.

정란각의 정문과 현관, 한옥과는 다른 일본식 건물의 독특한 입구를 볼 수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정란각은 1943년 일제강점기에 부산에 거주했던 일본인 철도청장을 위한 별장으로 일본 무사 계급이 많이 사용했던 ‘쇼인즈쿠리’ 건축 방식을 따라 2층 가옥으로 지어졌다. 1층과 2층 사이에 반 2층 공간을 둔 것이 특징이며, 마당에 석축과 일본식 석등, 꽃장식 등 고급스러운 근대 주택 형식을 갖추고 있다. 당시 모든 건축자재는 일본에서 들여왔으며, 일본인 건축주의 주도로 일본 목수와 한국 목수가 절반씩 투입됐다고 한다.

정란각의 깔끔한 마당과 쌓아 올린 석축, 석등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이 가옥은 해방 이후인 1951년 한국인이 인수하여 기생집으로 변하게 된다. 기생집으로 바뀐 정란각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한때 200명의 기생이 머무를 정도로 성업했으며, 1990년까지 한국인의 출입을 금한 채 일본인 관광객만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일본 관광객 중에서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만이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고급 수준을 유지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기생 관광'이 시들해지면서 일본인 고객이 점차 줄어들었고, 그 이후 한국 손님들도 출입이 가능한 상태로 장사를 이어가다가 식당 운영이 중단됐다고 한다.

란각 2층 모습, 다다미가 깔린 방이며 한쪽 방에서 끝쪽 방까지 방문이 열릴 수 있는 구조로 술집으로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 이곳에서 촬영됐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정란각은 왜 수정동에 지어졌을까? 정란각 관리실장 이몽래(66) 씨의 추정에 따르면, 수정동이란 동명은 옛날엔 이곳이 진흙이 없고, 고운 모래가 많으며, 맑은 샘이 솟아 수정처럼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 이 씨는 “일제강점기의 수정동 근방은 지금과 달리 바로 앞이 바다였으므로 아름다운 경치와 편리한 교통조건이 맞아서 이곳에 짓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고 말했다.

수정동 인근에 사는 대학생 안모(26) 씨는 정란각을 두고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일본식 가옥을 왜 보존 관리하는지 처음엔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근대사의 족적과 나름의 건축미를 지닌 이 건물을 둘러보고는 일본식 가옥이지만 보존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안 씨는 “처음 정란각 안에 들어가 내부 모습을 보니 정말 정교하고 공들여 지은 건물이란 게 한눈에 보였다”고 말했다.

지은 지 70년이 넘은 가옥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란각 외부와 내부 모습은 깨끗하고 아름답다. 물이 빠지지 않는 곳엔 땅을 파서 물길을 만들어 놓았고, 기모노를 걸었던 옷장의 맨 밑 서랍에는 손가락 세 개가 들어갈 수 있는 홈이 파여 있다. 이렇게 정밀하게 설계된 정란각을 지은 목수는 가와노 시로로 일본에서 제일가는 대목장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도 깨끗한 정란각, 현재 건축물과 비교해도 고급스런 느낌이 여전하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이런 형태의 바닥을 헤링본 바닥이라고 하는데, 당시 이 바닥을 시공할 때는 못 하나 없이 일일이 목재를 끼워 맞췄다고 한다. 깔끔한 나무 바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못 하나 없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방과 방사이의 공기 흐름을 위해 문 위에 예쁜 모양으로 구멍을 내 놓았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사람이 지나가기 편하게 벽을 깎아 놓았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1층에는 사진처럼 위아래로 열 수 있는 현대식 창문이 있고, 2층은 미닫이 형식의 전통식 창문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계단 난간에도 무늬 장식을 해 놓았다. 창문이 있는 난간에도 구름, 나비 등등의 모양 장식이 있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정란각은 2007년 7월 3일에 등록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됐다. 정란각을 문화유산으로 관리하는 이유는 일제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건축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란다. 이후 2011년 3월 7일에 정란각을 소유했던 개인 소유자가 소유권을 완전히 정부에 넘기면서 정란각은 정부 소유로 바뀌게 됐다. 문화재가 된 정란각은 관리 상 이유로 지어진 한국식 구조물을 다 허물고 일본식 가옥의 형체만 남기는 개축공사를 거쳐 지금의 형태가 됐다.

정란각 마당에 있는 우물. 원래는 외벽을 넘어서 더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정란각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화공감 수정이란 카페로 운영된다(사진: 취재기자 조민영).

시간 맞춰 정란각을 방문하면, 관리자가 정란각의 역사, 건축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정란각 관리자 이몽래 씨는 “일본 사람들이 주로 찾아오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언제든지 놀러 와서 구경하고 차를 마시며 지내다 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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