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철 칼럼]임을 봐야 뽕을 따지(2): 가정의 달에 꼭 만날 사람이 있어 미국에 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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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철 칼럼]임을 봐야 뽕을 따지(2): 가정의 달에 꼭 만날 사람이 있어 미국에 간 이야기
  • 경성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정태철
  • 승인 2023.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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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부터 7년 전인 2016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나와 1985년 유학 시절 첫해부터 지금까지 진한 우정의 인연을 이어온 미국 싱글남 팻 도노반(Pat Donovan) 박사와의 사연을 시빅뉴스의 칼럼으로 남긴 적이 있다(htt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3 임을 봐야 뽕을 따지’).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을 먼저 읽고 이 글의 후편 격인 아래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앞의 글에서는 내가 전형적인 미국 싱글남 도노반 박사와 가까이 지내보니, 그가 나이 들수록 가족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지낸다는 점을 들어, 가정의 달을 맞아 젊은이들에게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고, 자식 많이 낳을 것을 권하는 칼럼을 썼다. 그리고 그 칼럼을 2021년 8월 말 정년을 앞두고 그해 6월 20일 발간된 나의 정년 기념 산문집 ‘큰 산 작은 나무’에 실었다.

나는 코로나가 한참이던 2020년 여름에 도노반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엇보다 코로나로부터 그의 안전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언제나 명랑 털털한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잘 지내고 있음을 나에게 알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심장에 이상이 생겨 그해 가을에 심장 수술을 받게 됐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2020년 가을도 지나고 2021년 정년이 다가오는데도, 나는 도노반 박사에게 전화하기를 주저했다. 만약 수술이 잘못되어 그가 이 세상을 하직했어도, 나는 코로나가 극성이던 당시에 그를 조문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나는 ‘큰 산 작은 나무’의 ‘임을 봐야 뽕을 따지’ 편에 ‘후기’로 적었다.

정년을 앞둔 2021년 7월, 나는 내 산문집을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정년 선물로 배포했는데, 도노반 박사와 나와의 인연을 소개한 ‘임을 봐야 뽕을 따지’ 편을 감명 깊게 읽어준 선배 한 분이 나에게 전화해서 그분 생존 여부와 안부를 조속히 미국으로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재촉했다. 그 선배는 인간적으로 도노반 박사의 안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심호흡 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전화했더니, 다행히 도노반 박사는 심장 수술을 무사히 잘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또 다른 소식을 나에게 알렸으니, 그것은 그가 다시 폐암 판정을 받아서 암 수술을 그해 2021년 가을에 받을 예정이란 거였다. 그리고 폐암 수술의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이 전화를 받지 못할 상황을 대비해서 자신의 친구 한 명 이름과 전화번호를 내게 알려 주었다. 당시 기분이 참 묘했다.

그후 2021년이 해를 넘겼고, 또 다른 2022년 한 해가 흘렀음에도, 나는 도저히 도노반 박사의 핸드폰 전화 버튼을 누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2023년이 왔고, 코로나 사태로 인한 해외여행 제한이 풀리면서, 쌓여있던 무료 마일리지도 쓸 겸, 코로나로 왕래가 없던 미국에 사는 누님 두 분도 뵐 겸, 나는 미국 여행에 나서게 됐다. 그게 4월 12일부터 2주간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미국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도노반 박사의 생존 여부 확인과 만남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미리 도노반 박사와 통화를 해볼 수도 있었지만, 막상 미국에 가게 되니 더욱더 전화하기가 겁이 났다.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 결국 미국에 가서 전화하기로 작정하고 그냥 출국했다. 그래도 도노반 박사의 생사 여부가 궁금하기 짝이 없어서 나는 출국 전날 밤 내가 기자 생활했던 ‘콜럼비아 미주리언’ 신문의 인터넷판으로 들어가 부고 기사에서 ‘Pat Donovan’, 또는 그의 풀 네임인 ‘Pat Louis Donovan’ 등을 검색했다. 미국 지방 신문은 주민의 탄생 기사, 결혼 기사, 부고 기사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적어도 일생에 세 번은 그 지역 신문에 이름이 실린다는 말이 있다. 나도 기자 시절에 콜럼비아 지역 장의사들로부터 사망자 명단과 정보를 날마다 받아서 부고 기사(영어로 obituary)를 쓴 기억이 있다. 미주리언 지(紙)에서 도노반 박사의 부고 기사는 다행히 검색되지 않았다. 이는 출국을 앞두고 그의 생존을 확신한 내 희망의 근거가 됐다.

그는 살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정보는 그의 전화번호와 주소, 그의 친구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한국전 참전용사인 그가 아프면 미국 정부가 치료해 주고 죽으면 장례까지 치러준다는 사실, 이게 전부였다. 4월 12일, 드디어 나는 미국에 도착해서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누나와 매형을 상봉하고 긴 시간 동안 코로나가 막은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4월 13일쯤 비장한 마음으로 도노반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의 신속함을 위해 국제 전화인 내 폰보다는 미국 국내 폰인 누나 전화를 이용하기로 했다. 살아서 괄괄하게 전화를 받으리라는 내 기대와 달리, 그의 전화에서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라는 안내음만 들릴 뿐이었다.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대답은 같았다. 나는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미국에 왔고 곧 미주리 콜럼비아로 갈 예정이니 메시지 확인하는 대로 이 번호로 전화해달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하루가 지나도 아무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도노반 박사가 중태로 병석에 누워 전화를 못 받을 때를 가정해서 “이 전화 메시지를 확인한 그 누구라도 나는 도노반 박사의 한국 친구이니 즉시 나에게 전화를 해주기 바란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 후에도 리턴 콜은 걸려 오지 않았다. 이때부터는 도노반 박사가 알려 준 친구의 번호를 돌렸다. 그랬더니 착신이 중지됐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눈앞에 캄캄해졌다. 연락처가 다 사라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답답한 심정을 이어가고 있을 때인 15일 오전, 드디어 누나 폰으로 도노반 박사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내가 “Pat! This is Taechul!” 하고 외치자, 그쪽에서 아주 작은 노인 음성으로 “Who are you?”란 말이 들렸고, 다시 내 이름을 밝히자, 그쪽에서는 “Who?” 하다가 그만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즉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메시지를 남기라는 종래의 안내음만 반복됐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 전화의 목소리는 매우 아픈 노인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가 작고 힘이 없어서 불확실했지만, 일단은 도노반 박사의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전화번호로 왔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그의 집이나 병원에 몸져누워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상황이 판단되자, 미주리 콜럼비아로 신속하게 날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어서 콜럼비아로 가자!

다음날 4월 16일 새벽, 나는 학생으로서 5년, 방문 교수로 2년, 총 7년의 미국 생활을 경험한 미주리 콜럼비아로 날아갔다. 비행기 연착이 3시간이 넘었고, 뉴욕을 경유해서 미주리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서 다시 두 시간을 달려 예약해둔 콜럼비아 호텔에 도착하니, 현지 시각으로 저녁 7시가 넘었다. 다음날 17일 날이 밝자마자, 유학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콜럼비아 거리를 달려 미주리대학 캠퍼스에서 겨우 두 블럭 거리에 있는 도노반 박사의 아파트 건물 앞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 나는 현관문이 굳게 잠긴 방 5-6개짜리의 작은 3층 건물 앞에서, 다른 입주자들이 출근하러 나오면 그때 안으로 들어가려고 30여 분을 현관문 앞에서 기다렸지만, 건물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건물 주차장에 세워진 차가 한 대도 없는 걸로 보아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건물 벽에 붙은 부동산 관리회사 전화번호가 눈에 띄었다. 즉시 전화했더니, 직원은 이 아파트는 재건축을 위해 몇 달 전 폐쇄됐고, 입주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한테도 알려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도노반 박사의 집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이렇게 물거품이 됐다. 터벅터벅 미주리대학 캠퍼스를 힘없이 걷다가, 나는 한국 공무원의 미국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미주리대학 부속 아시아센터를 들르기로 했다. 센터의 소장과 실무자인 박사 한 분이 모두 한국인이며, 이들이 미주리대학 홍보 관련해서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두세 번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친분이 있었다. 그곳에 들러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그때, 미주리대 출신으로 한국에서 교수직을 은퇴하고 미주리대학 한국학 강좌 담당 기간제 교수로 있는 분의 이름을 소장이 말하며 혹시 아는 분이냐고 물었다. 그분은 유학 첫 학기에 나와 한 학기 룸메이트를 했던 절친한 선배였다. 그 선배는 소장의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와 반갑게 나와 조우했다. 선배도 나와 룸메이트 시절에 가끔 도노반 박사와 만난 적이 있었고, 아시아센터도 도노반 박사와 업무상으로 접촉한 적이 있어서, 우리 대화는 자연스럽게 도노반 박사의 행방으로 이어졌다. 그때 선배는 이곳 스시 식당을 운영하는 한국인 사장이 콜럼비아에 사는 한국전 참전용사를 찾아 감사 모임을 갖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와 저녁 식사를 그곳에서 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식사 후에 아시아센터 분들과 함께 선배 댁에서 조촐한 와인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 식당 사장을 통하면, 콜럼비아 한국전 참전용사 중 누군가는 도노반 박사의 근황을 알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 만난 한국인 식당 사장은 이곳에 오기 전 도시에서는 한국전 참전용사를 찾아서 감사의 표시로 대접을 잘 해드렸는데, 이곳에 와서는 한국전 참전용사를 찾는다는 광고를 몇 번 냈어도 아직 단 한 명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크게 낙담했다. 할 수 없이 식사 후 선배 집으로 가서 아시아센터 분들과 와인을 마시며 도노반 박사 행방에 대한 추론을 이어갔다. 결론은 이곳 콜럼비아에 있는 Harry S. Truman Memorial Veterans’ Hospital(한국의 보훈병원에 해당)에 가서 도노반 박사의 치료나 입원 기록을 찾는 길밖에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아시아센터 책임자가 보훈병원 환자 담당 목사님이 한국 사람이라며 즉시 전화했고, 내일 18일 아침 10시에 내가 목사님을 병원 로비에서 만나게 주선해 주었다.

한국 목사님의 ‘신의 한 수’

드디어 가슴을 두근거리며 병원 로비에 도착했다. 나는 목사님을 만나면 목사님이 병원 직원에게 도노반 박사의 입원 여부 검색을 부탁해서 그 결과를 내게 알려 줄 것으로 예측했다. 나는 10시 정각에 40대 정도의 젊은 목사님을 만났고, 목사님은 나를 8층 그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목사님은 책상에 앉자마자 그의 컴퓨터에서 바로 환자 기록을 검색했다. 목사님은 병원 환자 기록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곧 ‘Pat Donovan’ 이름으로 두 명의 환자 이름이 컴퓨터 모니터에 떴는데, 2004년, 2007년에 이미 각각 사망한 분들이었다. 이들은 내가 찾는 도노반 박사가 아니었다. 목사님은 Pat Donovan 이외에도 미들 네임을 넣어서 ‘Pat Louis Donovan’으로도 검색했으나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때 목사님은 미국인 중에는 미들 네임을 퍼스트 네임처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며 Louis Donovan을 입력했더니, 한 환자의 기록이 떴다. 그 환자의 주소와 전화번호는 내가 가지고 있던 것과 동일했다. 그가 바로 도노반 박사였다. 그러나 그는 2021년 10월 30일 새벽 5시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도노반 박사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오열했다. 중환자실에 있다면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볼 수 있기만을 그토록 바랐건만, 끝내 도노반 박사는 나와 마지막 통화한 2021년 7월 이후 가을에 폐암 수술을 받은 후 생을 마감했다. 목사님은 도노반 박사의 기록에서 한 여성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비상 연락처로 적혀 있다며 나에게 적어 주셨다. 나는 목사님의 위로 말씀을 듣고는 잠시 숨을 고르고 진정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도노반 박사의 묘지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보훈병원에서 한국인 목사님을 만난 것, 그리고 목사님이 내가 알고 있던 ‘Pat Louis Donovan’이 아니라 ‘Louis Pat Donovan’이 도노반 박사의 실제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찾아낸 것은 정말로 기적, 아니면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도노반 박사는 사망했는데, 내가 버지니아 누나 집에 있을 때 도노반 박사의 번호로 전화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도 한 사람이 쓰던 번호가 반납되면 그 번호가 다른 사람에게 배당되는 것과 같은 경우가 아닐까. 그리고 새로 배당된 번호의 당사자도 공교롭게도 역시 나이 들고 몸이 아픈 분이 아니었을까? 대강 이런 추측으로 의문의 전화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은인, 할머니 저널리스트

나는 발길을 시청으로 옮겼다. 시청의 안내 데스크 여자분에게 나와 도노반 박사의 사연을 간단히 얘기하고, Louis Donovan이 콜럼비아 어느 묘지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있냐고 질의했다.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 이러 저리 10여 분 전화를 하더니, 콜럼비아 시내 장의사에 도노반의 장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미주리주의 기록보관소인 ‘State Historic Society(SHS)’로 가서 사망확인서를 열람해 보라고 권했다.

미주리주 정부는 콜럼비아에서 30분 거리의 제퍼슨시티에 있지만, 기록보관소인 SHS는 콜럼비아 시청 인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곳에 들르니, 어느 인자한 할머니 한 분이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도노반 박사의 사망확인서에 묘지 관련 기록이 있는지 알고 싶다는 내 민원을 들은 할머니는 여기 저기 전화를 하더니 사망확인서 기록은 가족이 아니면 열람이 안된다고 했다. 나는 다시 내가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출신으로 박사를 하고 한국에서 교수하다 은퇴하고 이렇게 친구 찾아 멀리 바다 건너 한국에서 왔는데,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됐으며, 이제는 묘지 참배라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말했다. 그 할머니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그녀는 평생을 기자로 생활하다가 은퇴하고 몇 년 전에 이곳 미주리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기사 작성 시간 강사를 했고, 이제는 시간 강사마저 은퇴하고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과거에 한배를 탔던 사람 아니냐”면서 자신의 취재 능력으로 묘지를 찾아보겠다고 팔을 걷고 나섰다. 컴퓨터에서 여러 곳을 검색하던 그녀는 루이스 도노반은 콜럼비아 인근 시댈리아(Sedalia)라는 소도시의 ‘H. T. May and Sons Funeral Home’이란 장의사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콜럼비아 시청이나 장의사에 그의 기록이 없던 이유는 그가 콜럼비아가 아니고 시댈리아에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 ‘Sedalia Democrat’이란 신문의 부고 기사도 나에게 보여줬다. 도노반의 부고 기사나 장의사 기록에도 묘지에 관한 기록은 없었다. 그런데 시댈리아 장의사 기록에 장례식은 ‘pending(보류중)’이라고 적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게 무슨 뜻인지 할머니도 의아하다며 장의사에 전화했더니, 장의사에서는 매장하지 않고 화장한 사람들을 ‘pending’이라고 표현한다고 설명해주었다. 도노반 박사는 2021년 10월 30일 수술 도중 보훈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시댈리아 장의사에서 화장한 것으로 그의 생의 마지막 퍼즐이 풀렸다. 도노반 박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그의 한 많은 삶의 흔적이나 묘지를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났다.

장의사 홈페이지에 나타난 도노반 박사의 사망 기록. ‘디테일이 pending’되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장의사 홈페이지에 나타난 도노반 박사의 사망 기록. 아래쪽에 ‘디테일이 pending’되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그의 마지막 연인

나는 맥이 풀렸고 허망했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애절했지만, 어쨌든 그의 마지막 간 길을 알았다는 사실로부터, 빈손으로 귀국하지는 않게 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버지니아의 누나로부터, 미군 참전용사의 유골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누군가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유골은 장의사가 아직도 보관 중이거나, 어디 미국 국군묘지에 안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담박 떠오르는 인물은 보훈병원 목사님이 알려 준 비상 연락처의 여성이었다. 가정이 없었던 도노반 박사의 마지막 연락처로 되어 있는 그 여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그녀가 유골을 가져갔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나는 그 여인의 주소지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그녀의 주소지는 요양원이었으며, 도노반 박사의 마지막 거주지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그녀가 그의 마지막 연인이었을까? 그랬을 거라는 추측 속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메시지를 남기라는 안내음만 반복됐다. 할 수 없이 요양원 로비로 가서 사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담당자는 요양원은 특정 입소자의 거주 여부조차 가족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해 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나는 어쩔 도리 없이 장의사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도노반 박사의 유골을 내가 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도 생겼다. 30여 분 차를 몰아 시댈리아 장의사에 도착하니, 담당자는 내 사연을 듣고 누가 유골을 가져갔는지, 혹은 여기에 보관되어 있는지 전산화되어 있지 않은 기록을 일일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내가 전화로 결과를 듣기로 했다. 다만, 장의사는 유골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가족이 아닌 나에게는 유골을 전해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다음 날인 19일, 장의사에게 전화했더니, 도노반 박사의 유골은 미네소타에 있는 ‘시스터’가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단다. 나의 어렴풋한 유학 시절 기억에 여동생이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산다는 말을 도노반 박사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제 도노반 박사의 마지막 생의 결말이 모두 확인됐다. 그의 비상 연락처였던 그 여인을 만났으면, 도노반 박사의 마지막 행적이나 언행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우리 가족에게 남긴 것들

그는 1934년생으로 나보다는 22세가 많았고, 한국전 참전 후 미주리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런던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후 아이 없이 부인과 이혼하고 다시 콜럼비아로 와서 은퇴 교수의 삶을 살면서,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신혼 시절이었던 나와 5년 동안 친구처럼 지냈다. 그리고 1997년, 2002년 두 차례 연구년 기간에 새로 태어난 나의 두 아이와 함께 우리는 재회했고 뜨거운 우정을 나눴다. 그는 나에게는 미국 문화의 안내자였으며, 인생의 멘토였고, 격의 없는 친구였다. 그는 나에게 한국이 잘살게 되면서 미국처럼 본질보다는 겉모양인 이미지 과잉 사회가 될 거라며 다니엘 부어스틴의 ‘이미지’란 책을 선물로 주고 번역을 권했다. 나는 그 책을 번역해서 ‘이미지와 환상’이란 책으로 출간했다. 그 책 번역 작업을 하던 2002년 미국 체류 시절에 그는 어려운 영어 문장의 해설 조력자가 되었고, 나는 그의 수준 높은 조언을 대부분 각주로 처리했다. 2004년 발간된 그 책으로 나는 한국언론학회 ‘그해의 번역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9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는 나에게 자기가 교수 시절 런던에서 들고 다녔던 ‘브리즈번 골프 클럽’ 브랜드 가죽 가방을 자신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며 선물했다. 나는 교수 재직 시절 학회 출장이나 세미나 참석 때마다 그 가방을 폼 나게 들고 다녔고, 지금도 그 가방은 신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도노반 박사가 런던에서 교수 시절 들고 다니던 ‘브리즈번 골프클럽’ 브랜드 가죽 가방을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을 앞둔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도노반 박사가 런던에서 교수 시절 들고 다니던 ‘브리즈번 골프클럽’ 브랜드 가죽 가방을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을 앞둔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가정이 없었던 그는 우리 아이들을 매우 예뻐했다. 아이들은 그를 ‘Uncle Pat’이라 부르며 그가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따랐다. 그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망원경과 체스 등 보드게임을 선물했다. 특히 2002년 미국 체류 시 중학생이던 큰아이가 미식축구를 좋아한다고 하자, 자신이 개인 학습 튜터를 했던 미주리대학 풋볼 선수들의 싸인을 직접 받은 풋볼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소중한 우리 집 보물이 됐다.

그는 왜 이토록 나와 우리 가족에게 사랑을 베풀었을까? 그는 나와 1989년, 1997년, 그리고 2003년 헤어질 때마다 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을까? 그는 나중에 나에게 보내온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는 17세 때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의 탄광촌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란 소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전에 참전하면서부터 잠자고 있던 그의 무의식이 깨어났고 자기 인생에서 소중한 지혜를 바로 한국에서 얻게 됐다고 했다. 자신의 의미 있는 인생 경험은 오랜 고난의 세월을 겪은 한국 사람들이 그에게 보여준 용감함과 아름다움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서 나를 만나고 같이 보낸 시간은 자신의 그런 한국에서의 인생 경험과 추억을 되살렸으며, 자신의 인생 일부가 된 한국 경험을 다시 일깨워 준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헤어질 때 ‘굿바이’란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고, 눈물만이 앞을 가렸다고 했다.

가정의 탄생, 가정의 복원

나는 매년 10월 30일을 나의 친구 팻 도노반 박사의 기일로 삼아 한국식으로 추모하려고 한다. 나는 가족이 없이 쓸쓸히 혼자 생을 마감한 도노반 박사의 유일한 상주가 되어 그의 사후 세계를 위로하고 싶다. 한국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 한국인 평균 수명은 세계 최고 수준이니, 젊은이는 줄고 연금을 타는 노인네는 많아지고 있다. 인생 50 이후 줄곧 혼자 살아온 도노반 박사는 나이 들수록 외로움에 힘 들어 했다. 혼자 외롭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난 도노반 박사의 별세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는 무엇보다도 그를 추모할 그의 ‘가족’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가정의 달에 조상과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미래는 ‘가정의 탄생’과 ‘가정의 복원’에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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