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만인에게 갑질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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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이 만인에게 갑질하는 세상
  • 편집국장 강동수
  • 승인 2016.08.0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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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국장 강동수
편집국장 강동수

이탈리아의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동화 <쿠오레> 이야기부터. 1886년 출판된 이 책은 130년 전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엔리코란 한 어린이의 눈을 빌리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은 여러 영지로 쪼개져 있다가 비로소 통일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애국심과 자긍심을 불러 넣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사랑의 학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한 이 동화책의 에피소드 한 두 편쯤 읽지 않고 자란 어른들은 없으리라. 유명한 <엄마 찾아 삼만 리>도 이 책이 원전이다.

그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이런 게 있다. 잘 난 체하는 귀족집 애가 얼굴과 옷에 검댕이 묻은 석탄집 아이를 더럽다고 놀린다. 선생님에게서 이 일을 전해들은 귀족 아버지는 아들을 엄하게 꾸짖고 여러 친구들 앞에서 사과시킨다. 그리고 석탄 장수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하고 악수를 청한다. 선생님께도 자기 아들과 석탄집 아이를 나란히 앉혀 달라고 부탁한다.

어릴 때 읽은 동화 이야기를 꺼내는 건 며칠 전 뉴스를 보다가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를 함께 학구로 가진 초등학교들의 학생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고 한다. 대신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인근 학교들엔 학생 수가 크게 늘었다. 알고 보니, 임대 아파트 인근의 일반 아파트 학부모들이 제 애를 임대 아파트의 가난뱅이 애들과 한 교실에서 공부시키기 싫어서 위장전입까지 해 가며 옆 학교로 전학을 시키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 뉴스를 보다가 놀랐다. 아니, 씁쓸하고 노여워졌다. 도대체 자기네는 얼마나 대단하기에 제 아이들을 가난한 집 아이과 어울리지 않게 하려고 불법까지 저지른단 말인가.

그 뿐만이 아니다. 서울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의 입주민 대표란 사람이 관리소장더러 “너희는 우리 종놈이 아니냐”고 막말을 했대서 공분을 산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지난해엔 부산의 어떤 아파트에서 예순이 넘은 아파트 경비원이 손녀 같은 여고생에게 90도로 절하는 사진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도 있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일부 주민들이 경비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라는 거다.

모르긴 몰라도 제 아이를 임대아파트 아이와 섞이게 하기 싫다는 그 젊은 부모들이나 서울의 고급 아파트 주민회장은 대학은 나왔을 테고 우리 사회의 중산층일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 민주와 평등에 대해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고 보면 인간의 가치를 ‘돈’의 유무에 두어선 안 된다는 것쯤은 배워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아니, 어릴 때 읽은 <쿠오레>를 기억한다면 제 아이에게 그렇게 차별의식을 심어주지는 않을 것 아닌가.

우리나라에선 괜찮은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 소득이 500만 원이 넘으며 2000cc 이상의 중형차를 모는 사람 정도를 중산층으로 지칭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사뭇 다르다. 미국 국공립학교의 교육과정은 중산층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고,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며,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는 집. 옥스퍼드대학이 정의하는 영국 중산층도 비슷하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와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프랑스에서도 중산층의 요건 중에 약자를 도우고 봉사활동을 하는 의무가 포함돼 있다고.

중산층에 대한 우리나라식 정의는 ‘경제력’에만 초점이 모여 있다. 교양이 얼마건, 사회의식이 어떻건 돈만 있으면 중산층이란 거다. 그런데 말이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식으로 따지면 자식에게 친구 골라 사귀게 하느라고 위장 전입한 학부모, 관리소장에게 막말한 주민대표, 경비원에게 90도 인사를 시킨 어떤 아파트의 일부 주민은 결코 중산층이 아니다. 표현이 좀 거칠지만 ‘돈 가진 천민’이랄밖에. 진짜 천민은 임대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 제 자식을 그런 집 아이들과 섞이지 못 하게 하는 학부모가 아닌가 말이다.

감정 노동자들에 대한 하대와 갑질도 여간 아니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대학생 주차요원의 뺨을 때린 모녀가 있었는가 하면 매장 점원의 무릎을 꿇리고 욕설을 한 중년 여성도 있었다. 전화 상담원에게 첫마디부터 반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질하는 남성들도 적지 않다. 지하철 임산부 보호석을 차지하고선 다리를 쩍 벌린 ‘쩍벌남’은 또 어떻고... 이런 사람들을 요즘 젊은이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표현이 거칠더라도 용서하시라. ‘개저씨,’ ‘개줌마’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나름대로 제몫을 하는 멀쩡한 사람들이란 데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직업상 남들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말 한 마디 못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또 어떻게 하겠는가. 자기가 고객이 될 때 다른 점원이나 상담원에게 ‘갑질’을 함으로써 평소에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자기네 아이들을 임대주택 아이들과 구분 짓고 싶어 한 그 젊은 부모들도 직장에선 상사의 갑질에 속앓이 깨나 했을 거다. 입주민회장이란 사람이 만약 작은 회사 사장이라면 자기보다 센 거래처에 설움 깨나 당했을 테고. 알바생들의 임금을 후려치고 하루 아침에 문자 하나 달랑 보내 자르는 ‘알바 갑질’을 하니, 알바생들은 한창 주문이 바쁠 때 슬며시 줄행랑을 놓아 주인을 골탕먹이는 ‘알바 추노’로 앙갚음 하지 않나.

하기야 자기네 비행기회사 직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퍼스트 클래스에서 온갖 행패를 부린 재벌댁 따님도 있고, '국민의 종’이어야 할 고위 공무원이 거리낌 없이 "민중은 개돼지"라고 하는 나라이니 무슨 말을 더 하리오만. 이러니 ‘전 국민의 갑질화’라고나 할까, 우리 사회가 ‘갑질의 악순환’이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갑질화’의 악습에 빠져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터이다.

부잣집이라 해도 고기 굽는 냄새가 담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혼자 좋은 음식 먹는 걸 삼갔던 우리네 조상들이었다. 가난한 이웃들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몰래 쌀을 가져가라고 집 밖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뒤주를 놓아 둔 부자도 있었다. 아니,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네 심성이 지금만큼 각박하지는 않지 않았던가.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이 행여 가난한 집 아이들을 무시할까봐 단속하지 않았던가. 가난한 집의 자식 친구가 놀러오면 제 자식과 겸상으로 밥 한 끼는 먹여 보내지 않았던가. 요즘처럼 부모 사는 형편을 따져 제 아이들 친구 사귀는 것까지 갈라놓고 차별 짓는 부모는 없었다.

무엇이 우리네 심성을 이토록 망가뜨린 걸까. 압축된 고도성장의 부작용일까. 빈곤에서 탈피하는 걸 지상목표로 삼아 너도 나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후유증일까. 그래서 돈만 준다면 아무에게나 갑질하고 막되게 굴어도 된다는 의식이 시나브로 우리 무의식 속에 쌓였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갑질에 대한 피해의식에 절어 버렸기 때문일까. 내가 갑질을 당했으니 나도 기회가 있으면 갑질해서 속을 풀어보겠다는 뒤틀린 심사가 생긴 것일까. 어쨌든 구성원 다수에게 크고 작은 화가 쌓여 있고 그것을 약자에 대한 가학으로 풀려는 사회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내남 없이 이젠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내가 나보다 처지가 궁한 누구에겐가 갑질을 하면 언젠가는 나보다 강한 누군가에겐가 갑질을 당한다는 사실을 좀 기억했으면 좋겠다. 남에게 갑질하는 것으로 자신의 울분과 열등감을 보상받는 것이야말로 가장 저열한 ‘자기 치유’의 방식이란 걸 깨달으면 좋겠다. 글쎄, 지금대로라면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 10만 달러가 되더라도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존중 받기는 그른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두둔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게 중산층의 의무라는 그 사람들이 우리네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이왕 <쿠오레>라는 책 이야기를 꺼냈으니 거기 나오는 에피소드 하나 더 소개하고 끝내겠다. 어느 여객선에 때가 꼬질꼬질한 소년이 타고 있었다. 멀리 일 나간 아빠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외국인 신사들이 굶어서 비쩍 마른 소년의 딱한 처지를 듣고는 동전을 한 움큼 모아 주었다. 아이는 때 묻은 침대에 누워 여비는 물론 아빠에게 줄 선물을 살 수 있겠다고 흐뭇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신사들이 만찬을 하며 이탈리아 사람들이 교활하다는 둥, 더럽다는 둥 함부로 욕을 지껄이는 걸 듣게 됐다. 소년은 동전을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내 조국을 욕하는 사람들의 돈은 받지 않겠다”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면서 말이다.

 ‘쿠오레’란 말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마음’이란 뜻이다. 가난하고 처지가 궁박한 사람들에게도 자존심은 있는 법이다. 돈 몇 푼 있다고, 자기가 손님이라고, 자기가 고용주라고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말라.

그건 그렇고 나도 마음 한 구석이 좀 찔린다. 이런 말을 하는 나는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지 않았을까. 물건을 사러 간 편의점 알바 학생에게, 휴대전화 요금이 예상보다 많이 나온 것 같아 확인하러 전화했던 젊은 여성 상담원에게 행여 함부로 말하지나 않았을까. 슬며시 걱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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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희 2016-08-06 21:19:32
저자신을반성하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