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강이 된 남자' 김상화의 무소유 발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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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강이 된 남자' 김상화의 무소유 발품 인생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3.02.0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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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공동체 고 김상화 대표
그가 남긴 통장 잔고는 25만 원
엄혹한 자본세상에 보내는 메시지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것 많다!”

#돈과 밥의 지엄함

‘강이 된 사나이’. 지난 연말 별세한 (사)낙동강 공동체 김상화 대표의 이름이다. 그는 쓰러지기 한달 전까지 동래 온천장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오랫동안 기거했다. 10여 평의 오피스텔이 그의 집이자, 사무실, 작업실, 휴식공간이었다. 여관과 모텔, 단칸방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자리잡은 보금자리였다.

김상화 선생은 이렇다할 직업 없이 평생을 낙동강 살리기에 투신한 환경운동가였다. 벌이가 없다보니 가난했다. 강 살리기 운동도 일종의 살림이라 통장이 있어야 했고, 입출금 관리가 필요했다. 그가 이용한 통장은 모두 5개. 이런 저런 활동에 필요한 단체 및 개인 통장이었으리라. 그가 남긴 통장의 잔고는 도합 25만 원. 선생의 통장을 정리한 생명그물 이준경 대표는 “당신의 잔고 25만 원은 아무 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살았다는 증표”라면서 “한편으로는 슬펐고 한편으로는 놀라웠다”고 말했다.

낙동강 공동체 고 김상화 선생이 사랑한 낙동강. 2023년 1월말 경북 상주시 일대의 꽁꽁 언 낙동강 모습이다(사진: 이준경 생명그물 대표 제공).
낙동강 공동체 고 김상화 선생이 사랑한 낙동강. 2023년 1월말 경북 상주시 일대의 꽁꽁 언 낙동강 모습이다(사진: 이준경 생명그물 대표 제공).

김상화 선생은 그렇게 가난하게, 청빈하게, 강처럼 살다가 강으로 돌아갔다. 숭고한 한 시대 삶의 처연한 종막이다. 이 대목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엄혹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없이, 돈을 벌지 않고 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수도자처럼 산다 해도 돈이 든다. 일상에서 돈 없이 생활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가정을 가진 처지라면 이 질문은 더 엄혹해진다.

‘돈과 밥의 지엄함’이 어떠한지는 김훈 작가가 쓴 수필에 잘 드러나 있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돈 없이 입만을 나불거려서 인의예지이며 수신제가를 이룰 수 있겠느냐? …돈 없이도 혼자서 고상하게 잘난 척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말아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이다. 돈과 밥 위에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김훈,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생각의 나무, 2002)

돈벌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김상화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일생일대 선택은 강이었다. 자본의 속성은 무엇이든 낚시바늘을 꿰는 것이어서 거기에 묶이거나 연관이 되면 목적 수행이 어렵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정과 강 살리기의 양립.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지 못한 게 김상화의 슬픔이면서 한계였다.

#무보수, 무소유의 삶  

어떤 의미에서, 김상화 선생은 무소유(無所有)의 또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법정 스님이 탐심(貪心)을 떨쳐내는 무소유를 이야기하고, 인도의 간디가 비폭력과 무소유를 설파했지만, 김상화 선생은 무소유 이전의 무보수 발품 인생을 살았다. 무보수는 돈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상화는 무보수 명예직 낙동강 파수꾼이었다. 그것은 눈이 와도 비가 와도, 배가 고파도, 가족들이 원망해도 혼자 짊어지고 가야 했던 개인적 윤리였다.

김상화를 법정과 간디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가진 것 없이, 가질 것 없이 삶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낙동강 하류에서 현장 조사활동 중인 김상화 선생(사진: 박창희 기자).
낙동강 하류에서 현장 조사활동 중인 김상화 선생(사진: 박창희 기자).

생전 김상화 선생은 주로 핸드폰 문자로 세상과 소통했다. 핸드폰 문자는 그의 뉴스레터였고 활동보고서이면서 소액 후원 요청서였다. 문자를 통해 얼마가 들어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발품을 위한 최소한의 경비는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주변 지인들은 선생의 지난 활동과 진정성을 믿고 5만 원, 10만 원씩 소액 후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십시일반의 도움은 아름다운 마음씀이었는데, 선생은 삶이 다할 때까지 그 고마움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은총이 따르기를 기원했다.

김상화의 낙동강 사업은 그렇게 꾸역꾸역 굴러갔다. 필요한 최소 경비는 신뢰자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부지런한 발품으로 신뢰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었다. 돈이 없어 못 움직인다, 사업을 못한다는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돈은 환경운동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자본사회의 엄혹한 현실에서 그가 꾸려나간 살림은 우리들에게 엄중하게 묻는다. 물신을 앞세우고 자본에 속박된 채, 어쩌면 그러한 사실조차 모른 채 살고 있지 않느냐? 자본의 쇠사슬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우리들, 그러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흠칫 놀란다.

김상화의 유물론(唯物論)에 비춰보면,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사내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일갈한 김훈의 언명은 반쯤 맞고 반쯤 안맞다. 돈을 벌지 않아도 큰일을 할수 있는 방법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본 세상의 한 가운데에서 자본의 힘을 무찌르고 살아온 김상화의 삶은 연구대상이다.

김상화 선생의 마지막 통장 잔고 25만 원은 우리에게 ‘천금같은’ 성찰을 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돈으로 무엇을 하느냐,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 그가 남긴 25만 원에는 자본주의의 무게로 계량할 수 없는 엄혹함이 배어 있다. 김상화 선생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빈다. 정월대보름인 5일이 선생의 49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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