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어떤 '배움지기'가 순천에 새 집을 지은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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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어떤 '배움지기'가 순천에 새 집을 지은 사연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3.01.02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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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맨발동무 도서관' 만든 활동가 임숙자 씨
순천 대안학교에 아이 보내고 배움지기의 삶 선택
진정한 귀촌 의미 실현... 순천발 교육혁명 '새싹'

순천 와온 바다의 따뜻한 석양 

전남 순천에 와온 해변이 있다. 순천만 지척이다. 와온(臥溫), 이름에서 따뜻함이 전해진다. 어떤 이는 와온을 와인이라 읽기도 한다. 그것도 괜찮다. 

와온 해변 인근에 새 집이 하나 들어섰다. ‘보리밥’ 집이다. 보리밥을 파는 집이 아니라, 보리밥이라 불리는 사람이 사는 집이다. 집주인 인상이 보리밥처럼 후덕하고 푸근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저 마음이 수굿해진다.

곽재구 시인은 ‘와온 해변’에 가서 절창 한편을 남겼다. 석양에 비낀 시인의 따스한 눈길이 느껴지는 시다. 

‘해는/이곳에 와서 쉰다/전생과 후생/최초의 휴식이다/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새벽이면 아홉 마리의 순금빛 용이/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곽재구 시 ‘와온 바다’ 중)

순천시 해룡면 와온 바다로 빠지기전, 샛길로 접어들면 해룡면 농주리다. 이곳에 순천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랑어린학교’가 있다. 초-중등 대안학교다. 학교에서 10여분 떨어진 자리에 보리밥 님의 새집(해룡면 하사리)이 들어서 있다. 아늑한 산세를 품고 적당한 농토에 바다까지 끼고 있는 아름다운 가거처(可居處).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여기서 와온 바다까지는 걸어서 20여 분 거리다.

순천 해룡면 하사리 전경. 보리밥 님이 사는 마을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순천시 해룡면 하사리 전경. 보리밥 님이 사는 마을이다. 멀리 와온 해변이 보인다(사진: 박창희 기자).

귀촌, 그리고 조촐한 집들이 

2022년이 가기 전 집들이를 해야 한다는 채근에 보리밥 님은 마음을 열어 길손들을 초대했다. 아직 싱크대도 식탁도 놓이지 않는 집이었다. 이불과 베개는 각자가 챙겨갔다. 피란민같은 들이닥침에도 보리밥 님의 표정은 연신 함박꽃이었다. ‘새 집이 좋긴 좋은가보다…’. 보리밥 님은 집들이 온 길손들에게 새 방을 내주며 밤새 얘깃거리를 들고 토닥거렸다. 만면의 미소와 행복해하는 표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보리밥 님의 새 집은 남향의 아담한 2층 양옥이었다. 땅이 비스듬하고 작아 설계가 어려웠는데, 함께 계모임 하는 지인이 ‘용도’를 파악해 용케 설계를 해 주었고, 주인은 힘닿는대로 몸을 썼다고 했다. 방이 4개였다. ‘왜 그리 방이 많으냐’고 묻자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같이 쓰려고”라는 답이 돌아왔다. 구상부터 설계-시공-활용까지 구석구석 보리밥 님의 섬세한 시선이 닿아 있었다.

보리밥 님은 부산 출신이다. 본명은 임숙자 씨. 북구 화명동에서 2005년 어린이도서관 ‘맨발동무’를 창립해 텃밭을 일군 주역이다. 자녀 진학 문제가 닥치자 그는 평소 생각해온 대안교육을 선택했고, 둥지를 튼 곳이 순천 사랑어린학교였다. 두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면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은 것이 대안학교 교사. 한 몸 던져 일할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진정성과 협동심, 교육적 비전에 믿음이 갔다. 그렇게 그는 사랑어린학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 사이, 아이 둘은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누구보다 '주체적'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진학에 대한 주변의 우려는 기우였다. 순천에 집을 짓겠다는 생각은 10여년 전부터 꾸어온 꿈이었다. 갈 길이 정해지자 삶의 목표가 선명히 다가왔다.

부산에서 살다 순천까지 흘러든 인생. 운명적으로 선택한 귀촌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한 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질문이 쏟아졌다. 

“이건 세컨드 하우스인가?” “새 집 짓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했나?” “자금은 얼마나 필요한가?” “원주민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보리밥 님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 가려는 방향이 중요하겠죠. 돈? 내 돈으로 집을 짓나요? 욕심 줄이고 걷기를 일상화하고 나누고 돕는다는 자세로 살면 다 돼요.”

“어쨌든 하고 싶은 것 하고 꿈을 이뤘으니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자, 보리밥 님은 “오늘은 행복한 표정만 지을래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서로 돕고 나누는 마을공동체  

그날 저녁 동네 주민들이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찾아왔다. 포도주 한 잔에 딱딱한 자리가 금세 훈훈해졌다. 한 분은 이름이 두더지, 다른 한 분은 너구리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두더지는 사랑어린학교 촌장(교장), 너구리는 하사리 이장이었다. 방문객을 환영하고 집들이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마을 대표였던 것이다. 너구리 님은 “내일 아침엔 반드시 우리 집에 들러 커피맛을 보고 가셔야 한다”고 강권하기도 했다.

보리밥, 두더지, 너구리…. 이같은 별칭 사용은 순천 사랑어린학교의 독특한 운영방식이었다. 사랑어린학교는 2003년 3월 순천평화학교로 개교하였다가 2012년 해룡면 농주리로 이전하면서 사랑어린학교로 개칭하였다. 교육목표는 함께 어울려 놀면서 크는 집. 저마다 자신의 길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

사랑어린학교에서 실시한 지난 가을 벼베기 체험 활동(사진 제공: 임숙자 님).
사랑어린학교에서 실시한 지난 가을 벼베기 체험 활동(사진 제공: 임숙자 님).

명상과 마음공부가 교육 활동의 중심이며, 외면적으로는 마을 교육공동체와 결합을 중요시한다. 교육철학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 즉 ‘내가 머무는 곳에서 주인공으로 산다’이다.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라는 말이다. 마을공동체 교육으로 매일 아침 와온 바닷가에서부터 학교로 걸어오면서 주민들과 소통, 각 마을 주민들의 삶을 체험한다. 장거리 순례도 떠난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세월호 추모를 위해 서해안을 따라 걷기도 했다. 학교 안의 밭과 학교 밖의 논을 학생들이 직접 경영하며 자신들의 먹거리를 제공하는 생태체험 교육도 진행한다.

사랑어린학교에서 교사의 명칭은 ‘배움지기’다. 교사공동체에서 만든 단어다. 그러나 아이들은 배움지기들을 ‘신난다’, ‘푸른솔’, ‘수박꽃’ ‘보리밥’ 등의 별칭으로 부른다. 자연스레 말을 놓게 된다. 배움지기들에겐 3가지 원칙이 있다. 어머니 같을 것, 수행자일 것, 학생일 것. “우리는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먼저예요. 아이들은 어른들의 기운 속에서 배워요.” 이곳 배움지기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배움지기들은 매년 수행자로 산다는 서원(誓願)을 하고 스스로 실천한다. 보수는 최저임금 수준이거나 그 이하지만 불평을 갖지 않는다. 보리밥 님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얻으며 선택한 단순 소박한 삶이기에 불만은 없다”고 말한다.

사랑어린학교의 학생 수는 40~50명 선이며 배움지기는 10여 명이다. 등록금이 있긴 하지만 형편껏 알아서 낸다. 일반 자본주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사랑어린학교에서 마을 주민들과 배움지기들이 '마음공부'를 하는 모습(사진 제공: 임숙자 님).
사랑어린학교에서 마을 주민들과 배움지기들이 '마음공부'를 하는 모습(사진 제공: 임숙자 님).

다음날 오전, 우리 일행은 어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을 이장인 너구리네 집을 찾았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고 소문 난 커피맛도 확인하고 싶었다. 너구리네 집은 와온해변 가는 길목에 있었다. 50대 초반의 부부가 낯선 길손을 맞아주었다. 작지만 아담한 집에 정원과 텃밭이 가꿔져 있었다. 10여 년전에 정착하여 지은 집이라 했다. 거실과 방엔 온통 책이었다. 부창부수, 너구리 님은 커피를 내렸고 그의 아내는 간식을 준비했다.

너구리 님은 ‘몽하리 사람들’이란 계간 잡지를 보여주며 “우리들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소개했다. 뜻이 통하는 주민들이 사랑어린학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모습. 실내에 고소한 커피향이 퍼졌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공짜 커피”라고 치켜세웠다. 낯선 집에서 환대받는다는 느낌에 기분이 맑아졌다.

순천 사랑어린학교 학부모와 주민들이 합심해 펴내는 계간 '몽하리 사람들'(사진: 박창희 기자).
순천 사랑어린학교 학부모와 주민들이 뜻을 모아 펴내는 계간 '몽하리 사람들'(사진: 박창희 기자).

순천발 유쾌한 교육혁명 

‘이게 진짜 귀촌이고, 사람 사는 것이로구나!’

보리밥 님이 순천에 새 집을 지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있고 없고는 따지지 않고 가진 만큼 내놓고 깜냥껏 나누며 사는 사람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서, 자연으로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삶의 진정성과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 현실속 이상세계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순천 사람들은 2022년 초 ‘순천 백인회’라는 교육포럼을 만들어 순천을 유쾌한 교육혁명 도시로 만드는 대장정에 들어갔다. 그 중심에 사랑어린학교가 있다. 사랑어린학교의 과감한 시도는 경쟁과 소유가 아닌 ‘함께, 우리’라는 가치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되고, 새로운 마을공동체의 비전을 전하는 등대가 될 듯하다.

보리밥 님의 귀촌은 막연히, 낭만적으로만 생각해온 귀촌을 다시보게 한다. 거기엔 와온이란 지명보다 더 따뜻한 대안의 삶, 행복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었다. 순천에 가면 사랑어린학교를 한번 찾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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