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BIFF가 부산에서 열려야만 하는 이유...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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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BIFF가 부산에서 열려야만 하는 이유...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발견하다
  • 취재기자 박인영
  • 승인 2022.11.1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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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무려 3년 만에 정상 개최된 것으로 홍콩 배우 양조위부터 송강호, 강동원 등 톱스타들과 여러 감독이 대거 참석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볼 때마다 '왜 이렇게 큰 영화제를 굳이 부산에서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시상식이나 축제는 대부분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에서 으레 해왔는데,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배우와 감독들이 부산까지 찾아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생겼다.

해답을 찾기 위해 부산영화박물관에 갔다. 용두산공원과 가까이 있어서 방문하기에 수월했다. 지상 4층의 규모에 흠칫 놀라며 건물에 들어섰다. 입구에 들어가면 3면 스크린의 영상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긴다. 관람객들은 '그림자 아저씨'와 기차에 탑승해 과거로 돌아가 한국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황금기를 경험하는 시간 여행을 한다. 마치 4D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온 몸이 들썩거리는 것이 몰입력을 올리는데 한 몫했다. 그리곤 사라진 필름을 찾는 미션을 주고 '그림자 아저씨'는 사라졌다. 차근차근 부산이 가지고 있는 영화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부산 중구 동광동 용두산공원 인근에 있는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입구 모습이다                                     (사진:취재기자 박인영).
부산 중구 동광동 용두산공원 인근에 있는 부산영화체험박물관 입구 모습이다 (사진:취재기자 박인영).

일본인이 들여온 영사기로 활동사진 소개하면서 부산 영화시대 개막

부산이 영화의 도시인 이유는 간단했다. 1897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 한 일본인이 영사기를 가지고 들어와 일본인을 대상으로 활동 사진을 상영하는 등 돈벌이를 하면서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인 거류지가 부산에 있는 이유는 지리적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과 가까이 있던 부산에는 부산포가 있었다. 1876년 부산포의 빗장이 열리면서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는 부산항과 초량을 중심으로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일본 전통 공연을 할 수 있는 현대식 옥내극장이 들어섰다. 이는 1901년 초기 극장가를 형성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그 후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가 1903년에 설립되었다. '행좌'를 시작으로 '송정좌', '부산좌', '변천좌', '동양좌', '질자좌', '욱관' 총 7개의 극장이 20세기 초 부산에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부산 극장가에는 일본 공연단들이 건너와 흥행을 주도했다.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幸座)'가 1915년에 철거한 후 같은 자리에 '행관(幸館)''으로 신축된 모습이다. 사진은 부산영화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건물의 미니어처이다(사진: 취재기자 박인영).
부산 최초의 극장 '행좌(幸座)'가 1915년에 철거한 후 같은 자리에 '행관(幸館)''으로 신축된 모습이다. 사진은 부산영화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건물의 미니어처이다(사진: 취재기자 박인영).

변사가 등장하는 무성영화 시대에 채플린 영화 등 상영하며 부산극장가 흥행

등장인물의 목소리부터 배경음악까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영화를 본다면 어떨까?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가 1927년까지 일어났다. 소리 없는 영화, 그것은 바로 무성영화다. 소리 없는 영화를 관객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에 극의 진행과 등장인물의 대사 등을 설명하는 직업인 변사가 등장한다. 무성영화 시대 속 부산 극장가는 미국영화인 '명금'(1915), '채플린의 권투'(1915)와 같은 화제작이 상영되어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다. 또한 미국영화뿐만 아니라 조선 영화도 전국적으로 흥행을 하면서 영화제작 열기는 높아져 61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지만, 정작 부산 극장가에서 조선 영화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대다수의 극장 경영주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홀대를 받은 것이다.

부산을 영화의 도시로 만든 주춧돌, 국내 최초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사를 아는가?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부산에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작사이다. 현재 부산 중구청에서 출발해 남성여고 입구를 지나면 과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터가 나온다. 비록 일본 자본으로 영화제작을 하며, 순수한 영화제작 활동을 보장하기보다 식민지 통치에 초점을 맞춘 불합리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부산 제작 영화 제1호 '해의 비곡'을 제작하여 오늘날 영화의 도시인 부산을 있게 한 첫걸음으로서 의미가 있다.

라디오 등장에 영화산업 위기 맞지만 국내 최초 발성영화 '돌아오는 다리' 부산서 방영

라디오의 등장으로 1920년대 영화산업은 위기를 맞았다. 무성영화의 인기는 예전과 같지 않았으며, 변사의 역할에 대한 식상함과 장면에 맞춘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드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가운데 전쟁은 통신기술발달을 가져왔고, 이 기술이 영화에 접목되었다. 변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관람해야 했던 무성영화의 모습은 사라지고 1929년 7월 18일, 현재 남포동이라 불리는 남빈정의 행관(극장)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발성영화가 상영되었다. 발성영화란 화면과 함께 소리가 들리는 영화로 드디어 영화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록 상영 작품은 우리 손으로 만든 영화가 아닌 일본시대극 '돌아오는 다리'였지만, 이후 부산은 가장 빠르게 발성영화의 시대를 맞이했으며 발성영화 제작에 힘을 쏟았다. 그렇다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는 무엇인지 궁금할 것이다. 바로 '춘향전'이다. '춘향전'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는 물론 문 여닫는 소리, 다듬이 소리 등이 녹음됐다. 촬영 당시 스튜디오에 방음 설비가 되지 않아 멍석 1600여 개를 사들여 물을 축여 두 겹으로 막아놓고 촬영을 했다고 한다. 당시 녹음 기술은 빈약했지만, 발성영화를 만들기 위한 영화인들의 노력이 엿보이지 않는가.

수난 시대 속에서도 영화는 계속된다

한국 영화의 수난 시대는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영화통제령'으로 영화의 기반이 흔들렸다. 조국의 독립으로 해방 영화가 등장하며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1945년 미군정기가 찾아왔다. 미군정청의 직할 영화배급소인 중앙영화배급소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극장에는 할리우드 영화가 쏟아졌다. 이어 미군정청은 한 달 중 3주는 의무적으로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하게끔 만들어 영화계를 독점했다. 자연스레 남은 1주는 예전에 상영했던 무성영화를 재상영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사라졌던 변사가 다시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영화제작 및 배급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어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은 한국 영화계에 큰 타격을 입혔다.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많은 영화인들도 흩어졌고, 기자재 파괴, 필름 유실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이었다. 당시 부산극장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며, 국정의 한 축을 담당했다. 영화인들 역시 부산을 근거지 삼아 영화를 계속 만들었으며, 이때 만들어진 영화들은 국민의 상실과 전쟁의 슬픔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가슴 아픈 우리 민족의 역사는 영화 속까지 스며들었다.

여러 수난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는 다시 일어섰다. 1959년 한 해 동안 다양한 장르의 국산 영화가 100편 넘게 선을 보이며 한국 영화의 전성기인 1960년대의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이후 전포동에 영화촬영소가 건립되었고, 부산이 영화 로케이션지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온 노동자들이 영화로 위로받으며 부산 영화의 대중화를 이끌어 부산은 영화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배우부터 감독까지, 나도 될 수 있다" ...체험존에서 영화 촬영에서 제작까지 경험

마치 그 시대에 살았던 것만 같은 몰입을 하며 지나오니 어느덧 체험존에 다다랐다. 여기서 끝났더라면 전형적인 역사박물관으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은 단순한 역사 박물관이 아니다. 이곳에는 한 편의 재미있는 영화탐험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곳곳에 있는 체험을 완료하고 코어 필름을 획득하는 영화 체험 시설이 있다. 가장 인상 깊은 체험은 촬영이다. 영화 메이킹 필름에서만 보던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모션캡처, 고속 촬영, 드론 촬영 등 여러 촬영 기법과 함께 혼신의 연기를 담아 나만의 영화 예고편을 찍었다. 마치 영화배우가 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다음 체험 시설로 이동했다. 다음 체험 시설은 편집이었다. 영화배우 같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고 이번에는 영화감독이 된 것 같았다. 찍은 영상을 직접 편집해보니 어떻게 편집하냐에 따라 영화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외에도 영화의 기획부터 완성단계까지 알 수 있는 영화 제작 체험, 예전에 상영했던 인기작을 녹음실에서 더빙하는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직접 부딪치고 몸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촬영 체험을 할 수 있는 크로마키 배경의 스튜디오 모습이다(사진:취재기자 박인영).
촬영 체험을 할 수 있는 크로마키 배경의 스튜디오 모습이다(사진:취재기자 박인영).

한국 영화 역사와 함께 한 부산... BIFF 개최 의미 되새긴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의 관람을 마치며, 국제영화제가 부산에 열려야만 하는 이유를 단번에 깨달았다. 또한, 영화와 부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느끼며 영화의 도시 부산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뿌듯함이 밀려왔다.

강서구에 사는 주부 김미애(38) 씨는 "기대 없이 왔는데 아이들도 재밌어하고 잘 알지 못했던 부산과 영화의 역사 등에 대해 여러 체험과 전시로 알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십 년 이상을 부산에 살면서 한 번도 이곳을 어디서 본적도 없고 누구에게서 들은 적도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영화의 도시인 부산답게 부산 시민들의 꾸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어느덧 우리나라 영화는 칸 영화제를 비롯한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위상을 펼치고 있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만큼 부산이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더욱 발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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