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희 칼럼] 고향집에서의 따뜻한 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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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칼럼] 고향집에서의 따뜻한 임종
  • 논설주간 박창희
  • 승인 2022.10.2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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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0여 년 사이 장례문화 큰 변화
'죽으러 병원 가는' 세태 괜찮은지
이어령 ‘죽음의 기록’...많은 것 생각
집에서 임종, 가족들이 도와줘야

시골 노모의 목소리가 떨렸다. “뒷집 하동댁이 죽었대이.”

시골집에서 흙담을 사이에 두고 앞집 뒷집으로 살아온 이웃의 부고였다. 노모의 목소리엔 서운함과 상실감이 짙게 묻어 있었다. “죽을 복은 타고난 노인이지. 아프다고 병원에 간지 한 열흘 됐나? 집에 가고 싶다 카더니 죽었뿟다 안카나. 마이 서운타!”

‘서운타!’는 말이 귓전에 오래 맴돌았다. 노모가 좀처럼 쓰지 않는 말이었다. 흙담에 매달린 호박 한덩이가 쿵, 땅에 떨어지는 소리같았다. 노모의 전언을 모아 보면 하동댁은 마지막까지 요양원에 가길 싫어했고, 시골집에서 임종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병원 침대가 그를 마지막까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향의 흙내음과 풀내음은 끝내 그리움이 되고 말았다.

하동댁은 노모보다 서너 살 아래였지만, 노모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고구마 한 덩이, 밤 한 톨도 나눠먹었고 터놓고 집안 대소사를 털어놓는 사이였다. 영감들 일찍 보내고 홀로 사는 처지의 동변상련이랄까. 하동댁은 몸이 성치 않은 장애 손녀를 30여 년간 데리고 살아온 ‘애많은’ 할머니였다. 노모가 맞딱뜨린 상실감과 낭패감 속에는 담 넘어 이웃의 아픈 가족사도 틈입한 듯하다.

시골 노인네들이 끌고 다니는 유모차. 많은 노인들은 살던 집에서 자연사하기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시골 노인네들이 끌고 다니는 유모차. 노인들은 살던 집에서 자연사하기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사진: 박창희 기자).

“'죽을 복’은 타고 나느니라. 나도 그래야 할낀데….” 노모는 입버릇처럼 ‘죽을 복’을 되뇌었다. 그러면서 “요양원은 안 갈란다, 내 집이 최고지. 여기서 죽을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늘어놓곤 했다.

고종명을 바라지만... 

‘죽을 복’이란 말이 씁쓰레하다. 시골 노인네들은 집에서 자연사하고 임종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긴다. 이른바 고종명(考終命)이다. 고종명은 집안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는 것을 뜻하며 5복 중 하나로 여겨져왔다. 밖에서 죽는 것은 객사라고 하여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전통 상례에서는 임종(臨終: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하지 못하는 것을 큰 불효로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죽기를 원하지만, 현대 의학과 편리를 좇는 세태는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사망 장소 통계 자료를 보면 1998년에는 집(60.5%)이 의료기관(28.5%)보다 휠씬 많았으나, 2021년에는 병원(74.8%)이 집(16.5%)을 완전히 압도한다. 한마디로 ‘죽으러 병원(요양원) 가는' 현실이 됐다. 병원에서 작성하는 사망진단서에는 병사·외인사·불상 식으로 기록될 뿐 자연사는 없다. 병원에서 죽으면 곧장 병원장례식장이나 전문장례식장으로 가게 된다. 마치 정해진 수순같다. 집에서의 장례는 언감생심 꿈꾸기도 어렵다.

장례문화의 일대 변화 

장례는 인류의 통과의례로 역사 문명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선사시대의 고인돌부터 삼국시대의 매장풍습, 고려시대의 불교식 화장, 조선시대의 유교식 상례까지 장례문화는 그 자체로 생활 문명사다. 고려시대까지 장의사와 장례식장의 역할을 절에서 했다. 조선시대에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장례는 집에서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수백 년 이어지던 집 장례는 최근 20~30년 사이 병원과 전문장례식장(1973년 도입) 중심으로 변했다. 한국 장례문화의 일대 지각변동이다. 

내 경험으로는,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집에서 치르는 장례가 전문장례식장으로 옮겨간 듯하다. 1995년 가을 부친이 타계했을 때 풍습에 따라 상여를 동원한 전통장례를 치른 기억이 아련하다. 돌이켜보니 그게 집에서 치른 우리 시대 마지막 장례 풍경이었다.

장례문화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아파트 중심의 핵가족이 늘고 화장이 보편화되면서 편리와 편의를 찾다보니 전문장례식장을 선호하게 된다. 문제는 장소의 변화가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인식과 태도이다. 요즘 부음(訃音)이나 부고(訃告)는 대부분 ‘기계적으로’ 전달된다. 메시지나 단톡방에 부고가 뜨면 편리하게 '카톡 애도'를 하고 조의금을 얼마낼 지 걱정한다. 상가에서 밤을 쇠는 밤샘 조문은 찾기 어렵다. 상가에 가더라도 고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웰빙 못지않게 웰다잉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죽음을 여전히 터부시하고 ‘낯설게’ 바라본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의료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하는 것 같다.   

이어령의 '눈물 한 방울' 

하동댁의 부음과 노모의 상실감·서운함을 엿보면서 고종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집에서, 집에 돌아가 죽고 싶다는 노인들의 소박한, 아니 진솔한 바람을 외면하지 말자는 얘기다.

시대의 석학 이어령 선생은 올초 생을 마감하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증언해 책으로 남겼다. 그가 택한 마지막 안식처는 집이었다. 그가 사력을 다해 남긴 ‘마지막 수업’과 ‘눈물 한 방울’은 죽음학의 소중한 텍스트가 됐다. 

지인 중 말기암 환자가 있는데, 최근 병원에서 집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가망없다고 판단하고 집에서 임종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병원에서 치렁치렁 달고 있던 의료기구들을 모두 떼고 햇살 잘 드는 창가에서 쉬게 하자 환자의 마음의 안정되고 표정이 한결 밝고 편안해졌다고 한다. 그 다음은 하늘에 맡기고 기도만 하기로 했다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첨예하게 맞붙어 있다. 삶의 대단원은 죽음이고 죽음으로써 개별적 삶은 완성된다. 잘 사는 일만큼 잘 죽는 일(웰다잉)도 중요하다. 고종명을 바라는 노모의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주말에는 시골 노모를 뵈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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