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주부를 동화작가로 이끈 힘은 글쓰기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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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를 동화작가로 이끈 힘은 글쓰기 욕망"
  • 취재기자 이원영
  • 승인 2016.07.25 01:35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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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 비밀결사대> 한정기 작가가 말하는 '나의 삶과 문학' / 이원영 기자

동화작가 한정기(56) 씨는 아동문학계에서 열정적이고 성실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은 그는 곧 새 동화집 <개나리숲의 흰 양말>을 출간한다. 평범한 가정 주부로 살던 그가 동화작가로 변신하게 된 사연과  남극과 북극, 남태평양 등지를 다녀온 그의 여행담을 들어 봤다.

한정기 동화작가는 올해로 등단 20주년을 맞았다(사진: 취재기자 이원영).

'나는 누구인가'...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문

그의 나이 서른 중반 때. 평범한 가정 주부로서의 삶이 전부였다. 결혼 생활 10년차에 접어들자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가고 혼자 하루에 서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느날 문득 그의 마음에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는 “남편도 직장 생활을 잘하고 있고, 아이들도 잘 크고 있었다. 안정된 삶이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여지껏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면 행복을 느끼는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그때 그는 ‘나는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가정주부로만 살다가 죽기 위해 나는 이 세상에 온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한, 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문이 던져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자신의 내면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일찍 오는 사람이 있고, 늦게 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서른 중반에 그런 순간을 맞았으니 다행이다 싶다”고 말했다.

그가 만약 먹고 사는 데 급급한, 하루하루 허덕이는 삶을 살고 있었노라면 그에게 그런 순간이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를 돌이켜 보며 그는 “호화스럽지는 않았지만 안정되고 평범한 삶이어서 그런 성찰을 할 여유가 주어진 것 같다”며 감사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집히지 않아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작가로서의 삶, 그 시작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서

한 작가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결혼 후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친구가 “글쓰기 공부를 하면 잘할 것 같은데 같이 공부하러 다니자”고 했다. 자녀의 초등학교에서 같은 학부모로 만났던 그 친구는 참교육학부모회 동래·금정지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신규 회원을 모집하는 주부 글쓰기 교실에 그를 데려갔던 것. 그는 그렇게 해서 글쓰기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가 글쓰기 교실에서 만난 스승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초창기 멤버였던 백영현 교사. 글쓰기 교실에 가기 전 그는 부산일보에서 <교단서 만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화요일마다 연재되는 백영현 교사의 기고 글을 매주 챙겨 보고 있었다. 백 교사의 글은 교단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담은 에세이였다. 그는 “그 분의 글이 신문에 실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그런데 친구를 따라 글쓰기 교실에 가니 그 분이 선생님으로 계신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쓴 사람에게 배울 수 있으니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며 웃었다.

글쓰기 교실을 다니던 그가 집에 돌아온 아이들과 남편에게 저녁을 차려 먹이고 나면 밤 10시. 혼자만의 시간이다. 주방 식탁 위에 불을 켜고 앉아 밤새 대학노트에 생활 수필을 써 내려갔다. 글쓰기에 열중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보면 창 밖으로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묘한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참 신기한 게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 안에서 불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아이가 백점짜리 시험지를 받아 오거나, 남편이 직장에서 받은 보너스 월급을 가져다 주는 것에서 오는 기쁨과는 다른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가 아니라 ‘나’라는, 온전히 한정기라는 한 인간이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그렇게 즐겁게 글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동화작가가 돼 있었다”고 했다.

1996년 그는 부산일보 신춘문예에서 첫 작품인 동화 <작은 불꽃>으로 등단했다. 그런 그를 있게 한 건 글쓰기 교실에서 그를 가르친 백영현 교사와 김재원 교사였다. 그는 처음 백영현 교사 밑에서 2년간 공부했다. 백 교사가 그에게 “나는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김재원 선생에게 가보라”며 새로운 선생님을 소개시켜 줬다. 동래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김재원 선생은 동시와 동화를 쓰고 있었다.

교직에서 물러난 김재원 선생은 동래 온천초등학교 앞에서 '아동문학연구소 글나라’라는 글쓰기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 주부 글쓰기 교실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어느날 김재원 선생이 그에게 “한정기 씨는 생활 글도 잘 쓰지만, 동화도 잘 쓸 것 같다. 동화를 한 번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렇게 그가 처음으로 써낸 동화가 <작은 불꽃>이다. 그는 “백영현 선생님은 글쓰기의 세계로, 김재원 선생님은 나를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분”이라며 두 스승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정기 작가는 최근 한일교류문화협회와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에서 도자기 체험을 하고 돌아왔다. 한 작가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끌려 갔던 조선 도공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사진의 장소는 일본 규슈지역 아리타 도자기 마을(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동화작가로 등단 후 대학에 입학...새로운 도전

등단 후 동화작가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 한 작가는 1998년 부산예술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는 “2~3년 공부하고 처음 출품한 작품으로 덜컥 등단하니 무서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일천함이 들통날까봐 겁이 났다. ‘혹시 내가 문예창작이나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서야 할 자리를 뺏은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대학 공부가 절실해졌다”고 말했다.

이미 40대에 접어들어 한편으로는 “새삼스레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며 망설이던 그를 부추겨 대학 진학을 하게 한 사람은 바로 남편.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해 바로 대학에 갔더라면 79학번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그의 말대로 “여자 아이들은 상고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몇 년 하다가 남편 잘 만나 시집 가면 잘 사는 것”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던 때였다. 5남매 중 맏이었던 그는 부모의 바람대로 상업고 졸업 후 3~4년의 직장 생활 끝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던 것.

망설이다보니 어느새 대학 추가 등록 마감일이 다가왔다. 그날 오후 3시쯤 남편에게서 마지막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전화를 받고서야 마음을 굳혔다. 그 길로 당장 학교에 찾아갔다. 그는 등단한 작가로서 특별 전형으로 부산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한 작가는 “그 때만 해도 당시의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그는 부산예술대 문예창작과에서 2년간 공부하고 경성대 국어국문학과로 편입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대학 공부가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의 가닥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젊은 아이들과 강의실에 앉아서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전생에 얼마나 좋은 일을 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싶은 행복감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 작가는 대학 공부를 하며 새로운 세계에 개안하게 됐다. 대학에서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하며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학문인 문학에 빠져들었다. 그는 “오랜 역사로 축척돼 온 문학 이론들을 배우면서 모든 것이 새로웠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배움이란 새로운 세상을 알아 가는 것이다. 지식이 쌓이니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눈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한정기 작가의 아동 추리 동화<플루토 비밀 결사대>는 1~5권의 장편 시리즈로 구성돼 있다(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강인한 집념으로 탄생한 장편의 아동 추리 동화 시리즈

한 작가의 대표작은 아동 추리 동화 <플루토 비밀 결사대> 시리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EBS 드라마 16부작이 2014년 2월부터 5월까지 방영되기도 했다. 1권 <다섯아이들이 모이다>는 제11회 황금도깨비상 장편 부문 수상작이다. 황금도깨비상은 출판사 비룡소가 1992년 국내 아동문학계에서 최초로 만든 어린이 문학상. 그는 이 작품으로 아동 문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1996년 등단해 2005년 황금도깨비상을 수상하기까지 근 10년간 한정기라는 작가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플루토 비밀결사대>는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왔다. 플루토에는 염라대왕이라는 뜻도 있다. 1권은 부산 기장을 배경으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유추해 가는 비밀결사대 이야기다. 12세 같은 반 친구인 우진이, 동영이, 금숙이, 우진이 동생 서진이, 그의 친구 한빛이가 그 멤버이자 이야기의 주인공. 부산 아이들의 사투리까지 생생하게 살렸다. 비밀결사대는 2013년 5권을 끝으로 시리즈가 완간되는 순간까지 한 작가와 함께해 온 캐릭터들이다. 한 작가는 “다섯 명의 아이들과 10년을 동고동락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리즈를 완간하기까지 나는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았다. 그만큼 애정이 깊은 작품”이라고 밝혔다.

한 가지 일에 오랜 시간 몰두하기란 쉽지 않다. 장편 이야기를 1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완성해낸 원동력은  강인한 집념이었을 터. <플루토 비밀 결사대> 1권과 2권은 12살의 아이들이 5학년 봄과 여름, 3권과 4권은 6학년 봄과 가을, 5권은 6학년 겨울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왜 하필 추리 동화였을까? 아동 추리 동화라고 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추리 소설은 흔히 살인 사건과 같은 범죄 수사로 극이 전개되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초등학교 고학년에게 인기 있는 책 중 하나가 추리 소설이다. <플루토 비밀 결사대>에서도 살인 사건이 그려지는데, 한 작가는 아이들이 보는 동화에서 살인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했다. 그는 “아동 문학이라서 범죄 장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범죄가 일어난 원인과 과정을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각 편마다 그 시기에 이슈화됐던 유괴, 성추행, 강도 사건 등을 소재로 인간의 잘못된 욕망이 어떤 결과를 불러 오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한 작가는 대학에 다니며 부산 해운대 달맞이길에 있는 추리문학관에 습작 활동을 하러 종종 들르곤 했다. 2003년도 그는 이곳에서 추리소설계의 대가 김성종 작가를 만났다. “남들이 다 쓰는 동화 말고 추리 동화를 한 번 써보지 않겠느냐”는 김 작가의 말에 1주일에 한 번 이곳을 찾아 그에게서 추리 문학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추리물은 작가는 단서를 흘리고 독자는 그 단서를 추적해 가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플루토 비밀 결사대>는 한국 아동문학의 지형도를 넓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 아동문학에서 모험·탐정·추리소설 분야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한정기 작가처럼 오랜 기간 옴니버스 형식의 아동 추리소설 시리즈를 창작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 작가는 아동 문학계에서 “방정환 선생의 <77단의 비밀> 이후 끊어졌던 한국 추리 동화의 맥을 잇는 작가가 나왔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의 작품을 필두로 추리 동화가 쏟아졌다. 그는 “<플루토 비밀 결사대>로 아동 문학계에 ‘추리 동화를 쓰는 후배들이 많이 나와 보람을 느낀다”며 웃었다.

한정기 작가는 2006년 한국 극지연구소가 예술가들로 발대한 남극 연구 체험단에 참가했다. 그는 남극 세종과학기지에서 연구진, 월동대원들과 3주 동안 함께 지냈다. 사진에서 그는 배를 타고 있으며, 그의 뒤로 보이는 곳이 바로 세종과학기지다(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펭귄 보러 남극까지"

마음만 먹으면 송정, 해운대 바닷가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부산 해운대 신시가지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만큼 그는 바다를 좋아한다. 경북 동해안의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에게 바다는 그리움과 친숙함의 공간이다. 그가 중학생 때 외항선 선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는 이름도 모르는 곳에서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 봉투에 적힌 세계 곳곳의 생소한 항구 이름은 그에게 여행에 대한 동경을 심어 준 씨앗이 됐다.

한 작가는 2006년 6월 국제신문에서 <가자! 남극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게 됐다. 한국 극지연구소에서 일반에게 극지연구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예술가들로 연구 체험단을 조직해서 남극 세종과학기지에 파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기사를 보는 순간 옛날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던, 국내 최초로 배낭 여행으로 세계를 일주한 기록을 담은 김찬삼의 <세계 여행>이라는 책을 떠올렸다. 그는 어린시절 그 책에서 남극에 살고 있는 펭귄의 사진을 보고 “세상은 참 넒고 신기한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화가, 사진작가, 시인, 동화작가 1명씩 모집했는데 그는 동화작가 몫으로 뽑혔다. 40여 년이 지나 떠오른 사진 한 장의 추억으로, 그는 어렸을 때 봤던 사진 속의 펭귄을 직접 만나기 위해 남극으로 떠났다. 

남극 연구 체험단은 한 달간의 일정으로 그 해 11월 5일 남극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도착한 남극의 계절은 여름. 남극의 여름은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는 시기이다. 한 작가는 세종과학기지에서 연구원들, 기지를 지키는 월동대원과 3주 동안 함께 지냈다. 기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서 꿈에 그리던 펭귄을 만났다. 펭귄이 짝을 짓고,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또, 세종기지에서 약 12km 떨어져 있는 넬슨 섬에도 방문했다. 그는 “하루는 산책을 갔는데 바위가 꿈틀했다. 알고 보니 자고 있는 해표였다. 해표가 깜짝 놀라 도망가더라. 남극은 인간이 손님, 해표와 펭귄이 주인인 곳”이라고 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 앞에 놀러 온 크랩이터 해표 옆에 한정기 작가가 앉아 있다. 최장 39년까지 산다는 크랩이터 해표는 얼음 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한다(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남극에 사는 웨델 해표가 배를 보이며 누워 있다(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남극에서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많은 생명체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곳이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존재가 함께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상에서는 인간만이 살고 있는 세상처럼 느껴지는데 그곳을 벗어나 보니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 남극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는 깨달음도 들려줬다.

남극에서 돌아온 그는 세종과학기지를 지키고 있는 월동대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남극에서 온 편지 – 우리 삼촌은 세종기지에 있어요>를 2008년에 펴냈다. 이 책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세계의 교양 그림책 <지식 다다익선> 시리즈 중 하나다. 이 시리즈는 남극의 세종과학기지 설립 2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그림책이다. <남극에서 온 편지>는 과학자로서 세종기지에 간 삼촌이 조카 '솔이'와 '별이'에게 보내는 1년간의 편지다.

한 작가는 2007년 미크로네시아에 있는 한·남태평양 해양연구센터에 방문해 10일간 머물렀다. 한국 해양연구원이 2006년 극지연구소의 남극 연구 체험단을 성공한 프로젝트로 평가해, 어린이와 청소년 체험단을 꾸렸다 .이들은 해양소년체험단이라는 이름으로 열대 바다의 생태계를 공부하고, 미크로네시아에 있는 학교에 방문해 문화를 교류하는 활동을 했다. 한 작가는 남극 연구 체험단으로 활동했던 경험 덕에 체험단과 동행하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국 해양연구원 측과 공동으로 해양과학문고 <바다의 정글 산호초>, <배는 어디에서 자나요> 2권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 <안녕, 나는 열대 바다야> 역시 이곳에서 경험한 열대 바다의 생태계,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 원주민들의 생활과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도 <남극에서 온 편지>처럼 한·남태평양해양연구센터로 간 어린이 해양 체험단이 한국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2012년 북극에 도착한 한정기 작가와 한국 극지연구소 연구진과 승선원들이 한국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 호' 앞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한 작가는 40일간 아라온 호를 타고 북극을 항해했다(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남극, 남태평양, 그 다음은 북극이었다. 2012년 한 작가는 국내 최초의 쇄빙선(극지에서 얼음을 깨면서 항해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선박) 아라온 호에 올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극지연구소가 처음으로 운영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1명을 모집하는 데 그가 선정된 것. 그는 8월 1일 알라스카에서 출항을 시작으로 9월 10일까지 아라온 호를 타고 한국 극지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40일간 항해했다.

북극 항해는 남극에서의 생활과 사뭇 달랐다. 남극에선 세종과학기지라는 종착지가 있었지만, 북극에선 아라온 호를 타고 연구 목적에 따라 바다를 떠 다녔기 때문. 40일간 중에서 쨍한 햇볕이 내리쬔 시간을 모두 합해도 겨우 3일 정도. 눈이 오고 비가 오는 날씨가 계속됐다. 연구원들과 승선원들은 각자의 일로 바빴고 한 작가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선장에게 부탁해 아라온 호 브릿지에 있는 테이블에서 아침마다 개인 작업을 했다. 그는 “마치 안개 낀 바다를 유령선처럼 떠다니는 듯했다. 덕분에 추리 동화를 쓰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며 <플루토 비밀결사대> 5편의 탄생 비화를 전했다. 그는 “애초 목표는 남극에 이어 북극까지 갔다와서 극지방을 아우르는, 미래의 환경에 관한 공상 과학 소설을 써보고 싶었으나, 덩어리가 큰 이야기라 어려워서 아직 쓰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한정기 작가가 남극에서 배를 타고 파란 빙산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 한정기 작가 제공).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한정기 작가는 동화작가로 등단한 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한 작가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아동문학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결혼하고 낳은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간 때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는 자녀에게 좋은 책을 보여 주려고 했다. 디즈니 세계 명작 등 외국 동화에 성이 차지 않는 주부들이 동화작가로 등장하기도 했다. 각 출판사에서 어린이 문학상을 만들어 공모전을 여는 등 아동 문학계 작가들이 쏟아졌다. 한 작가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는 참 운이 좋았다. 가정 주부로서, 학생으로서, 작가로서의 삶을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고 균형있게 잘 걸어온 것 같다”며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한정기 작가는 최근 일본에 다녀왔다. 한일교류문화협회와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일본 도자기 체험을 하고 왔다. 10년간 1년에 한 번 꼴로 대마도에 여행을 가고 있다는 그는 “대마도는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끌려 갔던 조선 도공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신작이 곧 나온다. 제목은 <개나리숲의 흰 양말>. ‘흰 양말’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동화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볼 수 있는 생활 동화로, 판타지 요소가 가미됐다. 이제 출판 전 인쇄만 남았다.

인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한정기 작가는 “내가 79학번으로 대학에 갔더라면 작가가 안 됐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대학에 갔다면 공부는 뒷전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고 뒤늦게 대학에 가서 문학 공부가 절실했던 것이다. 뭐든지 즐기면서 하는 것이 좋다. 잘한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면 끝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 좋아하는 일은 오래 간다.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이 써지든 안 써지든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를 먼저 찾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출판을 앞둔 한정기 작가의 신작 <개나리숲의 흰 양말> 표지. 이 책은 '흰 양말'이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동화이다(사진: 한정기 작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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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기 2016-09-01 23:29:17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셨다니 기쁘고 고맙습니다.
사추기를 멋지게 극복하시길 응원합니다.

하이디 2016-07-30 21:06:09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저도 선생님의 젊은 시절과 비슷한 고민으로 지금 사추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인터뷰가 제게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리연 2016-07-27 14:55:02
무언가를 새롭게 도전한다는건..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멋지십니다.
좋아하는일을 하고 있어 행복하시겠어요

옹리 2016-07-27 14:44:54
인간의 존재론적인 의문을 갖는 것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잊고 살았는데 기사보고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님의 새로운 도전이 멋있고, 좋아하는 일을 실행하는 모습이 빛나는 거 같습니다.

애독자 2016-07-27 00:00:01
좋아하는 일을 할수있는 용기를 얻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