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박물관, 김원일 작품무대 등 구도심에 스토리 산재
'붉은 노을' 속에 감춰진 역사의 상처, 지역 걷기로 치유
김해 인문책방 '생의한가운데' 지역서점 문화활동 펼쳐
경남 진영.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 단감! 맞다. 국내 생산 과일 가운데 유일하게 생산량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과일이 단감이다. 진영 단감은 우리나라 단감의 본산으로, 1927년부터 진영 역장을 지낸 일본인 식물학자 요코자와가 한국 여성과 결혼한 후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5년 시작된 진영단감축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산물 제전이다.
다시 보게 된 진영
단감 다음은? 선뜻 답이 나오지 않지만 진영평야도 있다. 김해평야가 약 7,000정보이고 진영평야가 약 5,000정보라니 규모가 짐작된다. 1정보(町步)가 3000평이다. 이 넓은 땅을 일제 강점기때 7명의 지주가 차지했단다. 진영에 소작농이 많았고 농민운동이 활발했던 배경이다. 농민운동은 사회주의, 좌익운동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진영은 해방과 한국전쟁 와중에 처절한 좌우 이념투쟁의 장이 되었다.

진영의 인물로는 봉하마을 출신 노무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 만화 ‘코주부’로 유명한 김용환 화백이 또한 진영 출신이다.
문학적으로 놓칠 수 없는 인물은 작가 김원일이다. 진영 출생인 김원일은 ‘노을’ ‘아들의 아버지’ ‘어둠의 혼’ 등을 쓴 분단문학의 대가다. 그의 부친은 진영 대창초교 출신으로 일제때 농민·좌익운동을 했고 6.25때 빨치산 활동하다 월북했다고 한다. 작가 김원일은 이른바 ‘빨갱이의 아들’로서 평생 붉음의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다.
진영은 '용광로같은' 근현대사를 품은 소읍이다. 단감부터 일제 강점하의 농민운동,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그리고 분단작품의 무대, 대통령의 탄생, 현대의 도시재생 투어까지 많은 이야기꺼리를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창원의 외곽 신흥주거지로 뜨면서 인구가 8만 명을 넘어섰다.
진영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 건, 김해의 인문책방 ‘생의한가운데’(이하 '생가')에서 지난 12일 마련한 ‘진영의 붉은 노을: 근현대사 탐방’ 행사를 진행하면서다. 이번 탐방은 한국출판문화진흥원의 공모사업인 지역서점 문화활동 지원사업의 일환이었다. 때맞춰 김해시가 만든 ‘진영에 머선 129?’ 워킹투어 프로그램이 있어 김원일 작가의 문학현장과 근현대사의 흔적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진영은 ‘속으로 붉게 타는’ 곳이었다. 단감처럼, 노을처럼 말이다.
철도와 성냥에 얽힌 추억
진영 탐방의 출발지는 진영역 철도박물관이다. 1905년 들어선 진영역은 삼랑진과 마산을 연결한 마산선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마산선은 일본 제국이 수탈을 위해 경부선과 함께 건설한 중요한 철도 노선. 옛 진영역은 2010년 경전선 복선전철화에 따라 퇴역하고 박물관으로 거듭 났다. 열차에 실려 떠나고 돌아오는 근현대 풍경이 아스라하다.
철도박물관 주변은 아담한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다. 기존 선로에 퇴역한 새마을호 기관차와 객차 두 량이 멈춰서 있다. 새마을호 7115호. 1975년 미국 GM사에서 제작한 전기식 특대형 디젤 기관차다. 열차는 엔진을 끄고 객차에 카페를 들여놓았다.
객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냥전시관이 있다. 진영에 국내 마지막 성냥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성냥에 대한 추억을 불러내는 불쏘시개였다. 1948년 진영읍 진영리에 설립된 경남산업공사는 2017년 문을 닫을 때까지 오랫동안 진영사람들과 동고동락했다. 대표 브랜드는 ‘신흥’과 ‘기린표’. 경남산업공사는 70년대 직원이 300명에 달했고, 김해시 전기요금 납부액 1위에 오를 정도로 잘 나갔다. 마지막 성냥공장이 문을 닫자, 지역민들은 진기한 기계와 설비, 각종 물품과 자료를 모아 전시관을 만들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전시관이다.

지금이라도 성냥불을 그으면 불이 확 붙을 것 같은 추억 뭉치지만, 전시장이 작고 콘텐츠가 다소 미흡했다. 제대로 키운다면 진영의 확실한 효자 관광상품이 될 것 같다.
이어 일행은 철하마을(철도 아래에 있는 동네)을 엿보며 옛 경전선 굴다리를 지나 적산가옥 거리를 거쳐 찬새내골에 도착했다. 찌그러져가는 적산가옥과 귀신 나올 것 같은 철도 굴다리는 진영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게 한다. 작은 산동네에 세 개의 우물을 둔 찬새내골은 아기자기한 담장벽화와 트릭 아트, 우표전시장 등 볼거리로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마을 창고벽에는 마을찬가도 붙어 있었다.
보도연맹 사건의 최전선, 진영
답사의 발길은 진영성당과 깨비골목, 진영전통시장을 거쳐 작가 김원일의 생가, 우물, 진영파출소 그리고 강성갑 골목, 금병공원으로 이어졌다. 김원일의 장편 ‘노을’과 ‘아들의 아버지’는 진영이 작품의 핵심 무대다. 소설에 언급된 장소가 진영 읍내에 온존한다는 것은 진영의 자랑이자 시대의 상처다.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로 진영지역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했다. 김해(진영)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씻을 수 없는 진영(陣營) 대결의 상처를 남겼다. 국민보도연맹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고안해 낸 좌익 포섭단체였다. ‘보도(保導)’는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뜻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후방에서는 사상검증 및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것) 등을 이유로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 짐승의 시간이었다.
진영은 보도연맹사건의 최대 피해지역 중 한 곳이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한 김해지역 희생자는 272명. 이들은 김해 생림면 나밭고개와 상동고개, 대동면 주동광산, 진영 설창고개 등지에서 군경에 의해 무차별 살해됐다. 유족회와 단체에서는 전국에서 최소 20만 명, 김해에서만 750명(진영 258명)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여전히 붉은 노을 속에 가려져 있다.
진영중학교 여교사였던 김영명(당시 25세)은 결혼 6개월의 임산부였다. 미모가 뛰어났고 인간 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의 오빠 김영봉은 일본 메이지대학 출신 지식인으로 진영에서 과수업을 하다 붙잡혀 학살 현장에서 총탄을 맞고 도주, 가까스로 살았다. 그 바람에 동생 김영명이 끌려가 고문과 성추행을 당했고 이에 저항하다 팔이 부러진채 결국 살해됐다.
김정태는 진영장터 3.1만세운동의 주역(1982년 독립유공자 인정)이었으나 요시찰 인물로 찍혀 무고하게 처형됐다.

진영 한얼중학교 설립자로 나눔의 교육철학을 폈던 강성갑 목사도 보도연맹 희생자였다. 6.25 전란기 한국정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고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1954년 5월 강 목사의 동상 제막식에는 당시 함태영 부통령이 참석할 정도로 국내외의 관심이 컸다. 강 목사는 진영여중 교정 한켠에 동상으로 서서, 진영시장의 ‘강성갑 골목’에서 담장 벽화로 야만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국가도 가해 사실을 감추진 않았다. 김병희 진영지서장은 군법회의에서 핵심 가해자로 지목돼 사형 당했다. 한국전쟁 중에 민간인 학살사건의 가해자로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김병희가 유일하다. 가해자·피해자 모두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다.
휴머니즘이 깃든 스토리도 있다. 최대성 한림면장은 보도연맹의 살육 현장에서 기지를 발휘해 주민 다수를 구출해 ‘김해판 쉰들러리스트’로 불린다.
역사의 화해와 교훈
진영의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조갑상의 장편 ‘밤의 눈’에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소설의 무대인 ‘대진’은 바로 진영이며 그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강성갑 목사의 사례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고, 학살 피해자들에겐 한동안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여졌다. 사건이 일어난지 70년이 더 지났건만, 피해자와 가해자는 역사 속에서 화해하지 못하고 붉은 노을로 엉켜붙어 있다.
'생가'의 진영 탐방팀은 금병공원에서 간단히 답사 소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어두운 색조의 김원일 문학비가 시대의 증인인양 지켜보는 자리였다.
“무심코 지나던 진영에 이런 감춰진 근현대사가 있을 줄 몰랐어요. 지역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어요.”(A참가자)
“성냥 한 통 집에 있어요. 내가 사는 터를 아는 것은 그 무늬를 기억하는 일이겠지요.”(B참가자)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선 요즘도 좌익, 빨갱이에 대한 막연한 증오와 반감이 있어요. 무의식 중에 빨갱이라 말하곤 그렇게 규정해 버려요. 무서운 일입니다.”(C참가자)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 한림면장을 하시면서 다수의 민간인을 구한 ‘김해판 쉰들러리스트’ 그분이에요. 할아버지 행적을 더 조사하고 연구해 책으로 펴내고 싶어요.”(D참가자)
“학교 다닐 때 진영지역 학생들이 다소 거칠고 무뚝뚝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과거 보도연맹 사건의 피해가 낳은 트라우마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E참가자)

진영의 ‘노을’은 보기에 따라 붉기도 하고 창백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구름 낀 날은 무채색으로 나타난다.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다. 붉음에 이데올로기를 입혀 타인을 억압하고 타자를 살육한 광기의 역사는 청산돼야 한다. 아니 성냥불에 태워버려야 한다. 진영을 함께 걸으며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답사를 준비한 ‘생가’의 박태남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함께 걸으면 새로운 길이 생깁니다. 유월의 초록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 난 작은 길을 보았습니다”라는 후기를 남겼다.
진영은 사람들에게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이 될 수 있을까? 김원일의 ‘노을’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분명 어둠을 맞는 핏빛 노을이 아니라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오색찬란한 무지갯빛이리라.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현구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고향도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그런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는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일 수도 있으리라.’
답사를 마치면서 누군가가 핸드폰으로 이문세의 ‘붉은 노을’을 틀었다.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면 슬픈 그대 얼굴 생각이나/고개 숙이네 눈물 흘러 아무 말 할 수가 없지만/난 너를 사랑하네 이 세상은 너 뿐이야/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