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재운 칼럼] “인간은 자연을 너무 모른다”...기후위기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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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재운 칼럼] “인간은 자연을 너무 모른다”...기후위기의 경고
  • 진재운 KNN 대기자
  • 승인 2022.06.12 2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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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인간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린다”는 통찰 음미
환경을 자원과 폐기물로 구분... 결국은 폐기물 신세
기후 변화는 예측불가... 언제든 밀양 산불 같은 재앙 발생

“자연은 인간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린다.”

기억나지 않은 어느 시점, 어느 책에서 읽고 메모해 둔 문장입니다. 이 말을 개인적으로 풀어 봅니다. “자연이 눈을 뜨면 인간은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자연이 눈뜨기 전 인간이 먼저 눈을 떠야 한다. 하지만 지금 자연이 먼저 실눈을 이미 뜨고 있다.”

어떠신가요? 이렇게 풀어쓴 이유는 최근 밀양의 꺼지지 않은 산불을 보면서입니다. 숲에 물기가 잔뜩 오른 시기지만 꺼지지 않는 산불은 우리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물기에 젖은 나뭇잎에는 불이 옮겨 붙지 않지만, 밀양의 숲은 6월인데도 잔뜩 메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여름 날씨를 보여야 할 요즘 늦가을의 모습 또한 자연이 실눈을 떴기 때문일까요?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자연은 인간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린다. '난 늘 눈을 뜨고 세상을 보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죠?’ ‘무슨 눈을 떠야 된다는 것일까요?’ ‘인간이 눈을 뜰 때 자연은 무엇을 한다는 것이죠?’ ‘인간이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요?’

다시 내 방식대로 풀어봅니다.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가 자연을 모른다.’입니다. 자연이 뭔지를 모르니 늘 곁에 있어도 자연을 자연으로 못 보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우리가 자연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지난 5월말 밀양시 부북면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사진: 더 팩트 제공).
지난 5월말 밀양시 부북면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사진: 더 팩트 제공).

원점으로 돌아와서 그럼 자연이 무엇일까요? 황당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자연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 모두 그 자체로 자연입니다. 나뉠 것도 없이 모두가 모두에게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그 원인이 또 다른 원인을 낳고 결과로 이어지고, 그 결과가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불교의 소위 ‘연기법’이라 해도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바로 나 자체입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한 인식의 차이를 느낍니다. 나는 내 몸이고 내 몸은 내 피부를 경계로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는 분리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멈춰 서서 팔뚝의 피부를 느껴보고 오늘 점심 메뉴로 무얼 먹었는지, 그 음식이 어디서 왔고 내 몸 속 어디를 어떻게 스쳐가고 있는지를 느껴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나라고 생각했던 내 몸 내 피부세포의 생명주기가 끝이 나면 세상으로 흘러나갑니다. 어디를 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모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경계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알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을 ‘환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연을 나로 보지 않고 타자화로 시킨 것입니다. 자연은 내가 아닌 나를 둘러싼 환경이 되고 그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나를 위한 이용가능한 척도로서만 해석해 버립니다. 사막에서 석유가 유용한 자원이면 오로지 석유에 탐닉합니다. 석탄이 나무가 그렇고, 돌이 물이, 모든 것이 쓰일 모로 가치가 매겨집니다. ‘자연’이 ‘환경’이 되고 ‘자원’으로 가치가 매겨지고 쓰일 모가 없어지면 결국 ‘폐기물’이 됩니다. 세상 모든 환경은 결국 폐기물로 생을 마감합니다. 순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자원과 쓰레기로만 나뉩니다. 그러면서 자원은 줄어가기만 하고 쓰레기는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지질학자들이 지금의 세상을 ‘홀로세’에서 한층 더 나간 ‘인류세’로 부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환경으로 그리고 자원으로 쓰레기로 폐기해버린 자원들이 전 지구적인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환의 고리가 단절된 이런 생태계에서는 결국 나도 우리 모두도 폐기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례로 우리는 ‘인적자원’의 세상에 삽니다. 노동으로 가치를 매기고, 이 가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폐기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정년을 불안해하고, 비정규직을 힘들어 합니다. 폐기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자연이 쓰레기로 끝을 맺는 이런 구조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의 구도가 되고 경쟁이 전쟁이 됩니다. 그러자니 어느 곳에서는 굶어 죽고, 어느 곳에서는 50도의 폭염이 기상관측 이래 최대의 홍수가 가뭄이 넘치고 메말라 합니다. 자연에서 분리된 나는 그러다 보니 늘 외롭습니다. 뭔지 모를 상실감으로 인한 고독이 늘 엄습해 옵니다. 외로움은 공격적이 되고 폭력으로 변질되기가 다반사입니다. 내가 뭔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 원래 내 것을 찾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고 심지어는 빼앗아 와야 합니다. 그것이 합법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지 않아서 빚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몰라서 빚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침탈을 당하고 파괴적 공격을 당해도 늘 복원이라는 그 본래 항상성으로 돌아갑니다. 아프면 몸이 회복을 위해 움직이는 것과 한 치의 차이도 없습니다. 자연이 회복을 위한 성질 중의 하나가 바로 지금의 ‘기후변화’입니다.

자연의 치유과정인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자연은 기후변화라는 매개체로 치유를 하는데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자연이 폐기물로 되는 시스템이 심할수록 기후위기는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지금의 기후변화를 다시 불러봅니다. 과정의 결과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쉽겠네요. 예측이 불가능한 날씨로 전환되면서 얼마만큼 더 예측이 어려운 공격적인 기후가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확히는 살기 좋은 기후가 되는 것보다 그 반대가 자명해진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내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제 기후위기를 이야기 할라치면 다들 외면해 버립니다. “그래서 어쩌라고?”가 돼버립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오로지 입만 벌린 채 소란스럽습니다.

6월이 근 일주일 넘게 가을 날씨가 됐습니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는 틀렸다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의 핵심은 예측불가능성입니다. 날씨가 예측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강해진 태풍과 더 심각해진 가뭄, 여름에 난 밀양의 산불을 보노라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자연이 실눈을 뜨고 있을 때 우리는 늦지 않게 눈을 떠야 합니다. 사실 자연은 인간의 눈이 뜨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연이 기다리는 것은 자연의 회복 그 자체입니다. 인간과 자연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강하게 회복과정을 그쳐 치유가 되면 그 속에 살았었던 인간은 진화의 기억으로만 남아도 어느 곳 하나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자연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회복을 합니다.

기후변화라는 회복의 모습이 너무 거칠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많이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변화’라는 이 사건은 나의 생존입니다. 우리 모두의 생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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