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석 칼럼] 다산초당에서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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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석 칼럼] 다산초당에서 오늘을 생각한다
  • 편집국장 송문석
  • 승인 2022.01.1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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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신유박해로 강진 유배생활 18년 중 10년을 보내며 500여 권의 책을 남긴 다산초당
국가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백성을 수탈하며 소수 권력자들의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정부를 신랄히 비판
백성위해 있어야 할 임금과 목민관이 거꾸로 군림한다면 '천명'을 어긴 것이라며 망해야 한다고 주장
대통령 선거 앞두고 국가와 국민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사람 누군인지 유권자들 눈 부릅뜨고 선택해야

만덕산 아래 다산초당은 맑고 서늘했다. 삼나무가 쭉쭉 뻗어 청신한 바람을 만들고, 한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푸르디 푸른 차나무에선 차향이 풍겼다. 몇 걸음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멀리 바닷물이 넘실대는 강진만(옛 구강포구)이 눈에 들어왔다. 40여 년 전 처음 다산초당을 찾았을 때 분명 마을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거렸던 걸 기억하곤 이상하다 싶었는데 간척사업으로 일대가 농토로 바뀌어 탐진강 하구가 멀리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10년을 보내며 방대한 저작물을 생산해 낸 다산초당(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10년을 보내며 방대한 저작물을 생산해 낸 다산초당(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신유박해(1801)로 유배생활을 하면서 분노와 절망을 삭여내 학문을 완성한 곳이다. 한 인간이 이뤘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한 분량과 깊이의 저작물을 쏟아내 ‘다산학’이라는 거봉을 이룬 산실이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 일가친척은 서학(천주교)을 믿으며 봉건적 질서를 배척하고 열린 사회를 희구했다는 이유로 갈기갈기 찢겼다. 정약용의 막내형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장남 철상과 죽임을 당했고, 셋째 부인 유 씨와 둘째 아들 하상, 딸 정혜는 기해박해(1839) 때 사형당했다.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같은 날에 각각 유배돼 약전은 정약용 다시 만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정약전은 최근 영화 '자산어보'로 재조명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정약용의 이복 맏형 정약현은 천주교도로 몰리지는 않았으나 사위가 ‘백서’를 쓴 황사영, 처남이 정약용에 천주교를 소개한 이벽인 탓에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과 처남 이벽, 정약용의 외종육촌 윤지충,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 등은 처참하게 사형당했다. 정약용의 집안은 폐족으로 몰려 벼슬길이 막혀 암흑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멸문지화를 당하고 더는 물러설 바늘구멍만한 틈조차 없던 정약용에게 다산초당은 유일하게 숨을 쉴 공간이었다.

다산초당과 석가산
정약용은 다산초당을 짓고 그 옆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 돌을 쌓아 연지석가산을 조성하고 잉어를 키우며 외로움을 달랬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1808년 봄(순조 8년) 다산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현 만덕사(萬德寺, 현 백련사) 서쪽에 자리한 윤단(尹慱)의 산정에 놀러갔다가 마음을 뺐겼다. 현재 강진군 도암면 귤동 뒷산이다.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을이면 유자가 노랗게 익어가는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을 해남 윤씨 집안에 전했고 윤단 일가는 흔쾌히 허락했다. 정약용의 어머니가 해남 윤씨여서 그에게는 외가 쪽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이름을 붙였다.

정약용은 다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강진으로 유배된 지 8년 만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유배 초기에 대역죄인이라면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아 주막집과 글공부 제자 집 등으로 떠돌며 마음고생을 한 뒤였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유배 생활 나머지 기간인 10년간 무려 500여 권의 불후의 저작물을 남기며 ‘다산학의 산실’로 거듭났다.

다산초당 동쪽에 있는 천일각
다산초당 동쪽에 있는 천일각. 정약용은 멀리 구강포가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서서 흑산도로 유배를 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사진: 취재기자 송문석).

정약용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해 고립무원 상태에 있음에도 부패하고 타락한 정부와 관료, 불의한 시대를 향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또 끝없이 수탈당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동정과 안타까운 마음을 기민시(飢民詩)로 토해냈다.

‘백성들 뒤주에는 해 넘길 것 없는데/ 관가 창고에는 겨울 양식 풍성하네/ 가난한 백성 부엌에는 바람, 서리 뿐인데/ 부잣집 밥상에는 고기, 생선 가득 하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부정부패가 극심해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하며 생식기를 베 버린 한 사내의 절망과 분노, 그 부인의 슬픔을 노래한 ’애절양(哀絶陽)은 서럽고 읽기조차 고통스럽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애절양’의 사연을 적어놨다.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지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면서 칼을 뽑아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렸다. 그 아내가 아직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식기를 가지고 관가에 가 울며 하소연했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정약용은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고 목민관이 있는 것이지 임금이나 목민관을 위해 백성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인 천명(天命)은 백성의 마음이며, 천명이 떠나면 왕과 왕조는 망한다고 봤다. 힘없는 백성이 잘못된 정치로 자신의 남성을 잘라버려야 할 정도로 천명을 거스르는 나라라면 그런 왕조는 망해야 마땅하다는 말을 정약용은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시대를 아파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굶주림에 슬퍼하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정약용. 정약용은 다산초당 동쪽 만덕산 아래 있는 백련사(당시에는 만덕사)에 머물고 있던 혜장(惠藏: 兒菴) 스님과 벗이자 사제지간으로 지내며 위안을 받곤했다. 정약용은 마음이 울적할 때면 다산초당 뒷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 제자인 혜장과 격의없이 논어 맹자 주역을 이야기하고 시와 그림을 짓고 그렸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1km 정도의 동백나무 숲길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져 있고, 오솔길 위에는 200여 년 전 유배 온 유학자와 선승의 숨결이 배어있는 듯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당과 후보들, 그리고 패거리로 나눠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이전혈투를 벌이고 있는 때에 다산초당에서 오늘을 생각한다. 과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나라와 국민을 위함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싸움인가. 입으로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을 위한 수단으로 국민들을 이용한 정부를 우리는 숱하게 봐 왔다. 대통령과 정부, 공무원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도 ‘왕권신수설’을 믿기라도 하는 건지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은 것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고 주인행세를 하는 정부가 얼마나 많았던가. 정약용이 말한 ‘천명’을 어긴 나라이고 정부이며 권력이라고 할 만하다.

유권자인 국민의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고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은 국가와 정부는 국민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난폭한 야만이고 괴물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혼탁한 세상을 바라보며 다산초당에서 다시금 오늘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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